[셜록/존] unsync -1-
1.
함께 사는 플랫메이트가 자신의 친형과 성적으로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때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격전지 한 복판에 놓이게 되었을 때의 대처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대한 몸을 낮춘 채 가능한 한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후퇴할 수 없는 전장이 있듯이 인생에는 최선책도 차선책도 아닌 차악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존 왓슨은 자기 앞에 놓인 이 처참할 정도의 불가피한 상황이 단 한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마저 느꼈다.
‘망할 놈의 집세’
생각 같아서는 베이커가 221B번지를 중심으로 한 반경 50km내에는 발걸음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랬다가는 아예 런던에 들어오지 못하게 될 판이다. 친애하는 마이크 스템포드가 말했듯이 존 왓슨은 런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존 왓슨은 조용히 점퍼를 챙겨들고서 템즈 강으로 후퇴했다. 요전번 방문 시, 윗층의 방으로 올라가버렸던 것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형제를 시야에서 차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이 내는 차마 그 원인을 생각해내는 것 자체가 두려운 소음으로부터 도피하는 데는 심히 부적절한 방법이었다. 겨울의 템즈라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지만 아무래도 집 안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 존은 이를 갈았다. 차라리 방문이 정기적인 거였으면 좋겠군. 그럼 그 시간동안 어디서 샌드위치 점 알바자리라도 알아보지.
신발의 가장자리만 보고서도 그 주인이 어디서 헤매다 왔는지 알 수 있는 홈즈가의 두 형제는 존이 유유히 흐르는 템즈 강을 바라보며 자신들에 대한 생각으로 심란해할 것을 생각하며 짓궂게 웃었다. 단, 셜록의 경우는 그리 길게 웃지 못했다.
“이봐, 살살해.”
대뜸 눈초리가 사나워지는 동생을 성질 까다로운 고양이라도 되는 양 어르며 마이크로프트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점잖음과 음흉함이 섞여서 그려내고 있는 근사한 마블링을 보면서도 셜록은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한 듯 보였다. 시큰둥해보이는 표정은 마이크로프트의 애무가 점점 집요해지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셜록의 석고처럼 하얀 얼굴에선 흥분을 찾기가 힘들었다.
“oh, dull.”
결국 셜록은 마이크로프트를 밀어내었다. 일어나자마자 셔츠까지 껴입고 반대쪽으로 돌아앉은 그 등을 보며 마이크로프트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뭐냐?”
“뭐가 뭐?”
“하다가 그만 뒀잖아. 넌 하다가 그만두는 걸 제일 싫어하는데 말이다.”
“.....지겨워.”
“응?”
“지겨워, 지루해, 싱겁고 재미없어.”
남자의 자존심을 자극당할 만한 발언이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어린아이의 투정을 듣는 심정으로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채 길게 누웠다.
“이번엔 또 뭐냐, 셜록.”
“Anyway, you're wrong.”
“틀리다니?”
보석이나 수정같은 무기질을 떠올리게 하는 저 청회색 눈동자가 그래도 살아있는 생명의 것임을 알게 해주는 번뜩임이 스쳐지나갔다.
“형은 이게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잖아. 존에게 우리가 같이 자는 사이라는 걸 알려주고 그 반응을 살펴보는 거.”
“그랬지.”
“Well, obviously it isn't.”
셜록은 물어뜯기라도 할 기세로 형에게 덤벼들었다.
“형은 존이 패닉할거라고 했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 작고 귀여운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해낼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지금까지 경과를 보자면 존은 눈도 깜짝 하지 않는 거 같거든?”
“My dear brother, 그게 지금 우리 둘만의 ‘의식’을 중단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지 난 잘 모르겠구나. 존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해보도록 하고 일단은 하던 거나.....”
그러나 관능적인 움직임으로 셜록의 어깨를 쓰다듬던 마이크로프트의 손은 매섭게 손등을 얻어맞고 움츠러 들 수밖에 없었다.
“작작 좀 해, 마이크로프트. ‘의식’이라니, 지금 몇 살이야 대체? 별 것도 아닌 섹스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
마이크로프트는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물러났다. 지금 그의 동생은 명백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괜히 했어. 그래봤자 똑같은 섹스인데 쓸데없이 존을 가지고 형이 꼬드기는 바람에....”
“....그 별 것도 아닌 섹스에 실컷 요염한 소리로 울었던 건 바로 너였던 것 같구나, 셜록.”
“5년만이었던가. 오랜만에 하니까 이 지극히 단순한 근육운동도 제법 괜찮게 느껴졌거든.”
“.......”
“하지만 역시나였어. 생리적인 쾌감 따위, 바닥에 쏟아진 에탄올 같은 거지. 순식간에 휘발되서 흔적도 없어. 시간낭비에 기력낭비야. 아무리 해봐도 내 취향은 아냐.”
셜록은 멋대로 침대에서 나가더니 의자에 앉아 양손끝을 모으며 생각에 빠졌다.
"프렌치 토스트."
"음?"
"존은 프렌치 토스트를 구워주고 나갔어. 형이 오기 15분전에. 스크램블 에그도 있지. 정확히 2인분이야. 존이 돌아올때쯤엔 둘 다 식어빠져서 맛이 없을 음식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명백하게 형과 나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지."
"........"
"만약 그가 그냥 집을 나가버렸다면 나는 이걸 점잖은 무시라고 받아들였을 거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당신들의 일에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는 프렌치 토스트와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어놓고 갔어. 형 몫까지. 형이 여기에 어떤 목적으로 오는 지 뻔히 알면서도 형까지 배려했다, 이걸 묵시적인 인정으로 보아야 할까? 존이 형과 나의 관계를 알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나의 사려깊은 플랫메이트이자 충실한 친구로 남아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야. 내가 아는 존 왓슨은 도덕적인 사람이야. 그리고 대부분의 도덕적인 사람들이 그렇듯이 상식에 필요이상의 가치를 두는 경향을 보이지. 형과 나의 관계는 명백하게 존이 알고 있는 모든 상식과 도덕률에 위배되고 있어. 내가 아는 존 왓슨이라면 어떻게든 이 관계를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어야 해. 내가 어렸을때부터 형에게 성적 학대라도 당해서 관계를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던가 사실 알고 보니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입양된 아이였다던가. 하지만 존은 그러지 않았어. 존은 프렌치 토스트와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어놓고 갔어. 내가 알아서 끼니를 챙겨먹는 것과 형이 부엌에 서서 요리를 한다는 것은 존의 머릿속에서는 동등하게 있을 수 없는 일인가보지."
"존이 나에 대해 물어보든?"
"Never."
"그래놓고 2인분의 브런치라..."
"그렇지? 흥미로워...."
방금 전까지 전희에 몰두하던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표정으로 셜록은 허공을 응시하며 자신이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불가사의의 영역으로 성큼 떠나가버린 현 사태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동생을 보며 형에게는 한가지 방책이 떠올랐다.
"셜록, come to bed."
"사양이야."
"존은 지금쯤 템즈에 이르렀겠지. 런던 아이는 그의 취향이 아니야. 그렇다고 어디 카페로 가지도 않았을 거야. 비가 올때도 실내에 들어가지 않았던 존이 카페에서 돈을 낭비할 리가 없지. 저번에도 그랬듯이 물끄러미 강이 흘러가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거야. 그러면서 너를 생각하겠지. 아니, 정확히는 너와 내가 하고 있을 짓을 말이야."
마이크로프트는 두 손을 모은 채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던 동생이 기계처럼 목만 돌려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동생에 비해서는 조금 높고 하지만 더 부드러워서 때로는 간교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음성이 리드미컬하게 이어졌다.
"존은 다른 이의 침대매너를 궁금해하는 유형의 사람일까? 설령 아니라고 해도 친형제간의 패륜이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 혐오감 이전에 원초적인 호기심을 갖지 않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존의 이성이 아무리 다른 것을 생각하려고 해도 존은 우리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어, 셜록. 너와 나, 침대 위에서 과연 무슨 짓을 하길래 그렇게 요란한 소리들을 낼까 하는 의문들이 그의 시냅스에 엉켜 떨어지지 않을 거야."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그의 말에 무관심한 척 하기 위해 제법 애쓰는 것을 유쾌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셜록이 노력해도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무심한 눈동자에 열기가 돌아오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Go on."
관심은 없지만 계속 떠들면 들어주기는 하겠다는 그 오만한 태도에 마이크로프트는 '사실은 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잖아' 라고 추궁하고 싶은 것을 초인에 가까운 인내심으로 꾹 참았다. 셜록은 늘 이랬다. 7살 이래 바뀌지 않는 행동패턴이다. 조금 더 교묘해지고 능숙해졌지만 마이크로프트에겐 모든 것이 뻔히 보였다. 원래부터 범인을 뛰어넘는 통찰력의 소유자인 마이크로프트였지만 동생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직관에 가까운 수준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직관은 신의 계시를 받는 사제처럼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독점적인 지위는 그 마적인 통찰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만큼 셜록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셜록에게 있어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자도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그가 어디까지 상상할까, 셜록? 그 충직하고 선량한 의사선생은 늘 상상력이 부족한게 흠이었지. 그 빈약한 상상력으로 어디까지 갈까? 그가 너의 신음소리에 대해 생각할까? 아니면 나의? 내가 너를 어떻게 만질지, 만진 다음은 또 어떻게 할지를 그 작고 귀여운 머릿속에 떠올리며 얼굴을 붉일까?"
셜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마이크로프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빤히 보였다. 마이크로프트는 자상하고 부드럽지만 결코 사람을 안심시키는 지는 않는 특유의 목소리로 최면을 걸 듯 말했다.
"그러니까, 셜록. 침대로 오렴."
셜록은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았다. 형의 팔에 이끌려 침대에 눕는 셜록도, 동생의 몸 위로 올라가는 마이크로프트도 지금 존이 템즈강 수면에 반사되는 창백한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리라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셜록뿐만 아니라 마이크로프트도 흥분시켰다.
그러나 드물게도, 두 형제는 모두 틀렸다. 그때, 템즈 강변을 걷고 있던 존 왓슨은 홈즈 형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올리버 레드브릿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2.
그 곳에서 빌 머레이를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펍은 빌이 사는 곳에서 가깝지도 않았고 존이 평소에 자주 가던 곳은 따로 있었다. 이번 사건은 무척 찜찜한 여운을 남기고 끝났다. 범인은 잡혔지만 죄없는 어린아이가 연루되어 있었고 누군가의 인생은 이미 엉망이 된 후였다. 존은 술이 고팠다. 술은 즐기지 않을 뿐더러 펍에도 가는 법이 없는 셜록을 생각해서 존은 그를 먼저 집으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왠일인지 셜록은 존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존과 셜록은 빌 머레이와 마주쳤던 것이다.
"존! 존 왓슨!"
"빌?!"
한껏 웃으며 이쪽을 향해 오는 빌을 보며 솔직히 존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혼자 있었다면 더할 나위없이 반가운 친구였겠지만 지금 곁에는 셜록이 있었다. 존은 셜록이 하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예의바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빌 머레이는 사건 관계자가 아니다.
"셜록, 이쪽은 내 친구 빌 머레이, 빌, 이쪽은...."
"'The' Sherlock Holmes, I know. 드디어 이렇게 만나뵙게 되는 군요."
악수하려고 내민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흔드는 빌의 태도에는 친근감이 가득했다. 셜록의 석고상 같은 얼굴에 떠오른 명백한 의아함은 그의 동거인이 아니더라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존의 블로그를 통해 홈즈씨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다니 보니 그만 홈즈씨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말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어쨌거나 이렇게 만나뵙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존이 오랜 친구를 위해 무슨 변명이라도 해주려고 입을 연 직후였다.
"괜찮습니다. 셜록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저야말로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쁘군요."
존은 그만 금붕어처럼 벌렸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셜록은 입가에 미미한 미소마저 띠우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는 존을 사이에 두고 빌은 드디어 '그' 셜록 홈즈를 만났다는 흥분에 원래 그러했던 것보다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하이 텐션을 보여주고 있었다. 존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셜록의 반응이었다. 셜록 특유의 냉랭하게 사람을 쳐내는 분위기는 간 곳 없이 사라져서 비록 바라보는 눈동자가 차갑기는 해도 셜록은 명백하게 빌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간간히 맞장구까지 쳐주며 호응해주는 데는 아주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셜록은 얼마든지 남의 말을 듣는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존도 이제는 듣는 척 하는 것과 정말로 듣고 있는 것과의 차이를 알만큼 셜록에게 붙어있었다. 존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있었던 일을 줄줄이 늘어놓는 빌과 그걸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는 셜록 중 어느쪽이 자기를 더 짜증나게 만드는 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셜록의 옆얼굴을 바라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속으로는 빌 머레이의 인생을 꿰뚫어보고 있겠지. 한 사람을 구성하는 태피스트리의 모든 씨줄과 날줄을 낱낱이 분해해서 다시 실타래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문득 존은 그에 반해 자신이 셜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왠일이야? 집 여기서 멀잖아."
용케 끼어들 틈을 찾아서 존은 화제를 돌리려 했다.
"몰랐나? 짐머만이 이 근처에 살잖아. 그 친구 보러왔다가 들렸지."
결과부터 말하자면 소용없는 짓이었다. 짐머만 또한 전우였기 때문이다.
"불쌍한 친구, 애인이랑은 끝내 헤어진 모양이야."
"....안됐네."
"안된 일이지. 안됐고 말고. 에휴, 결국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건 몸 뿐인 거지."
착잡해하는 빌의 말을 들으며 존은 짐머만의 애인을 생각했다. 전장에서 살아돌아왔을때는 백년, 천년 행복할 줄 알았겠지. 더이상 둘 사이의 미래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거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돌아온 애인은 더이상 자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의 참담함을 상상해보았다. ....셜록이 허구헌날 자신에게 상상력을 발휘해보라고 채근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존은 정말로 자신이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 쓸데없이 꿀꿀한 얘기하지 말자! 좋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 우리 너에 대해서 말하자, 존 왓슨! 다리도 고치고 매일매일이 끝내주는 모험이고! 다른 건 몰라도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으로 고마워요, 셜록. 예전의 존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놀랄 겁니다. 존은 진짜 많이 밝고 명랑해졌어요."
셜록은 그런 때는 '많이'가 아니라 '훨씬'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당할 거 같다고 지적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에게는 참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개과천선한 고교생한테나 어울리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셔. 아니, 그리고 내가 셜록 때문에 죽을 뻔한 사건들은 왜 빼먹는 건데?"
"처음에야 죽을 만큼 걱정했지! 그런데 번번히 살아돌아오는 걸, 뭐. 크하하하! 자, 마셔! 마시는 거야!"
아마도 빌은 짐머만때문에 굉장히 우울해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성격부터가 남 챙겨주기 좋아하고 자기 오지랖의 광활함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친구인데다가 조금만 기쁜 일이 있어도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었지만 지금 보이는 행태는 거의 조증에 가까웠다. 존은 빌이 우울한 일이 있으면 오히려 과도하게 긍정적인 기운을 주변에 흩뿌리고 다닌다는 걸 알았다. 아, 짐머만의 상태가 정말로 별로인가보다. 존은 생각했다. '여기에 알콜이 과다하게 첨가되면 결과가 정말 좋지 않을 텐데.'
존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빌을 셜록에게 넘기고는 - 이때 셜록은 '왜 나한테?'라는 뜻을 전달하는 강렬한 눈빛으로 존을 노려보았지만 존은 모른 척 했다 - 길거리에 나가 택시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때는 저녁시간이라 공급보다 수요가 많았고 아무도 술 취한 사내를 태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빌은 어찌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있었는데 상태가 자못 심각했다. 기본적인 인지능력마저 떨어져서는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희고 크고 깡마른 사내를 존 왓슨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셜록은 자신을 존이라고 부르면서 깨어진 도자기 파편처럼 본래의 구조를 짐작할 수 없는 음절들을 주절주절 읊조리고 있는 이 사내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존의 새로운 부속품 정도로 취급받고 있으리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존은 쉽게 택시를 잡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 수록 셜록은 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엉망진창인 말들을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해도 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존... 난 네가 평생 극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망할 레드브릿지 새끼. 이렇게 말하면 넌 슬퍼하겠지만 난 그 새끼가 지옥에 떨어졌으면 좋겠어. 지옥 한복판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고 나서야 괜히 죽었다는 생각이 들텐데. 아아,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도 하고... 그러다보면 너한테 좀 미안해지기도 하겠지."
그리고는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존은 겨우 택시를 잡는데 성공했고 술에 취한 빌 머레이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뭐, 그럭저럭 괜찮았지."
우울한 기분을 풀려고 펍에 갔다가 더 우울해져 있던 사람에게 치이는 바람에 우울감에서 조금 벗어났다는 아이러니한 결과 앞에 존이 붙인 짤막한 논평이었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는 대신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다. 이대로 걸어갔다가는 밤이 아주 깊어져서야 도착할 텐데도 두 사람 중 어느 누구하나 택시를 잡자는 말이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불쑥 셜록이 물었다.
"레드브릿지에 대해 생각하나?"
존이 경악에 의해 마비된 성대를 어떻게든 정상으로 되돌리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셜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빌이 말했어. 비록 그는 내가 아닌 너한테 말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셜록, 너 방금 정말로 날 놀래켰어.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됐다, 말을 말자."
"레드브릿지가 누구야?"
"........"
존은 대답이 없었다.
"존, 내가 너없이 알아내도록 만들지 마."
"너한테 그냥 넘어간다는 선택은 아예 없는 거지?"
"가끔은 있지만 이 경우는 아닌걸."
"어째서?"
"빌이 말한 내용때문에 그렇지."
"빌이 뭐라고 했는데?"
"네가 슬퍼하겠지만 레드브릿지가 지옥에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더군."
".........뭐, 그 친구가 할 법한 말이로군. 별로 빌답지는 않지만."
셜록은 그런 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슬퍼보이는 군. 우울해하기도 하고."
라고 말했다. 그 말에 깃들어있는 흥미롭고 신기해하는 기색이 존을 거슬리게 했다.
"왜냐하면 지금 내 기분이 슬프고 우울하니까."
"왜? 레드브릿지 때문에?"
"아니, 빌 때문에."
"빌이 뭐 어쨌는데?"
"빌 머레이는 지나가는 말로도 남에게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아, 쓸데없이 흥분해버렸다. 존은 셜록에게, 아니 상대가 누군지 간에 언성을 높여버렸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
"그리고 빌이 그렇게 말하게 만든 책임은 레드브릿지보다는 나한테 있으니까."
보통 사람은 이쯤되면 물러서기 마련이다. 하지만 셜록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레드브릿지가 누구야?"
"오, 제발, 셜록!!"
"간단한 질문이잖아. Who's Redbridge? 3음절도 안돼."
"이제와서 멍청한 척 해봤자 소용없어. 질문이 간단할 수록 답은 복잡해지기 마련이라고 네 입으로 뻐기듯이 말해준지 1주일도 안 지났거든?"
"Oh, John, don't be so dramatic. 그냥 질문이잖아?"
"그냥 질문이니까 너도 좀 넘겨."
"그냥 질문이니 그냥 대답만 해줘도 되잖아."
"으으윽!!! 난 너랑 네 형에 대해서 단 한번도 물은 적이 없잖아! 너도 좀 나한테 같은 배려를 해주면 안돼?!"
마침내 존이 꺼내든 비장의 카드에도 셜록은 그저 뻔뻔했다.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난 네가 물어봤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야."
"Oh, God! 제가 이 인간을 두고 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Dramatic, again."
승패에 상관없이 끝도 없이 추격해오는 로마 장군 마르켈루스를 보며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내뱉은 탄식을 닮은 말에도 셜록은 꿈쩍 하지 않았다. 존은 셜록을 상대로는 기싸움을 벌이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한 수 접어주게 된다. 문득 존은 자신이 이런 오만불손한 천재 타입에게 무척 약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프라이버시같은 것은 알 바 아니라는 듯 흙발로 쳐들어오는 태도에 존이 느끼는 감정은 자기방어에서 비롯된 반사적인 저항감일 뿐, 진짜 불쾌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존이 정말로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 함부로 침입해들어오는 셜록에게 진짜 불쾌감을 느낀다면 이미 첫만남에서 느껴야 했다. 친동기가 알콜중독자에 배우자와 사이가 안좋다는 사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털어놓을 만한 일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눈에 그걸 간파하고 그대로 면전에서 말해버리는 셜록의 태도에 존은 오히려 호감을 느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제 무덤을 제가 판 격이다. 그 뒤로 셜록에게 존의 프라이버시는 '만만한 영역'으로 찍힌 것이 틀림없다.
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름은 올리버 레드브릿지야. 24살이었고 미국인이었고 아이오와 출신이었는데 의대에 가고 싶었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자원입대했어. 매복에 걸려서 소속되어 있던 소대의 절반이 날아간 뒤, 마침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내 군부대로 이송되어 왔지. 난 그 전까지 아이오와란 지역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올리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그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나고 자랄 수 있는 지 의아해졌어. 그의 가족도 그에 못지 않아서 대학에 진학한 이는 5대를 통틀어 올리버가 유일했고, 역시나 올리버를 제외한 모든 식구들은 열성적인 프로테스탄트였지. 유전자에 무신론 인자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우리 영국인으로서는 정말 이해가 안가는 일이지만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무신론자로 산다는 건 굉장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가봐. 그는 철이 들었을때부터 고향을 빠져나오는 일만 생각했다고 했어. 자신의 유년기를 질식사하는 과정에 비유했지. 하지만 그는 가난했고 대학까지는 장학금으로 갈 수 있었지만 메디컬 스쿨까지는 무리였지. 그가 생각할 수 있었던 최선의 탈출구라는 게 기껏해야 자원입대였던 거야. 그의 부모님은 말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어. 그들은 그걸 '신의 군대'라고 불렀지. 미치광이들. 올리버는 자신의 부모님이 얼마나 무지하고 편협한 인간인지에 대해 설명할때마다 웃었어. 마치 웃지 않고서는 회상하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전쟁에서 죽는 것의 다섯배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어."
"........."
"나는 젊었고 올리버 레드브릿지는 내가 맡았던 첫번째 장기환자나 다름없어서 지나치게 그에게 이입해버렸지. 나는 그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어. 그는 재능이 넘치는 영민한 청년이었고 고향이 아니라면 그 어디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내 임무는 그의 다리를 고치는 것뿐이었는데 나는 그만 그를 구원해주고 싶어졌지. 그게 첫번째 실수였어."
"두번째 실수는 뭐였는데?"
셜록은 질문을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 셜록에게 있어 후회란 지레짐작과 비슷하다. 절대로 하지 않고 만약 했다면 철저하게 잡아뗀다 - 그 후에 존이 보여준 표정은 절대로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에 집어던진 쇳덩어리처럼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는 그 무서운 침잠.
"그의 다리가 아물어서 목발을 짚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자마자,"
"I slept with him."
셜록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떠오른 것은 채 0.3초도 되지 않았다. 셜록은 자신의 당혹감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빌 머레이도 그걸 알아?"
존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셜록이 자문자답했다.
"당연히 모르겠지. 알았다면 네 블로그에 게이가 되어버린 거냐는 글 따윈 안남겼을 테니까. ....갑자기 멍청해졌군."
"이제 만족해?"
"어쩌다 죽은 거지? 전사했나?"
"아니. 정식으로는 총기 오발 사고로 처리 됐지. 총기 소제 중에 총알이 잘못 발사되어서 얼굴의 반이 날아갔어."
"왜 빌은 그게 자살이라고 생각하지?"
".....그 당시에는 내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빌도 영향을 받은 거 뿐이지. 정황상 자살로 보이지만 유서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 결정적으로 자살이라고 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어."
"왜 죽었다고 생각해?"
"모르지. 하지만 심리치료사가 절대로 자기 담당환자랑 자면 안되는 것처럼 어떤 관계에는 절대로 성적 욕망이 개입되어서는 안되는데 나는 그 선을 넘어버렸지. 안그래도 예민하고 불안정한 청년의 정신에 나와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악영향을 미쳤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죽은 뒤에 검시하듯 머릿속을 해부해볼 수도 없는 거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셜록은 존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식은 죽 먹기였다. 존의 표정을 읽는 건 어린아이의 손목을 뒤트는 것보다 쉽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풀어야할 수수께끼가 형태를 드러내고 셜록의 목표도 정해졌다. 이로서 한동안 지루할 일은 없을 거다. 마이크로프트 더러 당분간은 찾아 오지 말라고 해야겠다고 셜록은 생각했다.
"그리고 네가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하니까 말해두는 건데, 나는 정말로 너와 네 형의 관계에 대해 신경쓰고 싶지 않아."
"........"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모르는 체 하고 싶어. 난 너와는 달라서 이제 슬슬 지루한 게 그리워. 매일매일이 다이나믹할 필요는 없는 거야.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조금이라도 그 관계가 상호합의가 아닌 다른 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거라면......"
존은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셜록과 달리 존은 남의 형을 아동추행범으로 가정하는 데 상당한 심적 부담감을 느꼈다.
"....아무튼 소프 드라마 30년치의 다이나믹함이 내 일상을 점령해도 상관없으니 앞으로 10년 후든 20년 후든 네 손으로 네 머리에 총알을 박는 일만은 없게 해줘. ...한번은 견뎠는데, 두번은 정말 자신없어."
"...I promise."
"그거 고맙군."
셜록은 앞서 걷기 시작하는 존의 등을 바라보며 자신이 알게 된 몇가지 사실을 조합했다. 우선, 올리버 레드브릿지는 근친상간의 피해자일 가능성이 크다. 존은 무의식중에 자신과 레드브릿지간의 관계를 근친상간과 동급으로 여기고 있었다. 난데없이 셜록과 마이크로프트의 이야기를 꺼내고 셜록에게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는 말까지 덧붙인 것을 보면 적어도 존의 머릿속에서 셜록은 올리버 레드브릿지와 모종의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셜록의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 갑작스럽고 압도적인 불쾌감의 근원을 찬찬히 추적해보고 있는 와중에 두 사람은 어느새 베이커가 221B번지에 도착했고 안락하고 익숙하며 따스한 집안 공기가 두 사람을 맞이해주었다.
3.
"분명히 한동안은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동생아. 오늘은 공적인 일로 온거야. Hello, John.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아, 예, 뭐... 그럭저럭..."
홈즈 형제의 관계를 알게 된 이후 어떻게든 마이크로프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그동안의 노력이 무력하게도 결국엔 이렇게 만나서 얼떨결에 인사를 주고 받고 악수까지 나누게 되었다. 존은 마이크로프트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베이커가를 나갈 적당한 명분과 시기를 찾기 위해 두뇌를 풀가동했다. 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손바닥을 보듯 파악한 셜록이 형을 노려보는 시선을 늦추지도 않고 말했다.
"존, 우유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고 통조림은 콩에다 옥수수까지 있어.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마."
"음...."
"그리고 대답은 노야."
"아직 내 제안을 들어보지도 않았잖니."
"상관없어. 무슨 일을 제의하든 무조건 거절이야."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태연하게 셜록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궁지에 몰린 햄스터처럼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한참동안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존은 마침내 핑계를 생각해냈다.
"계란! 계란이 없어."
"WHAT?"
"빵도 없고 베이컨도 없군."
"우린 베이컨 안먹잖아!"
"이제부터 먹을 거야."
셜록이 저지하기도 전에 존은 순식간에 점퍼를 걸치고 장바구니를 들었다.
"카드 안 줄거야."
셜록의 어린아이같은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목에 걸린 것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존은 놀리는 기색도 없이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신용카드를 들어보였다. 셜록은 재빨리 자기 지갑을 찾았지만 도대체 자기 지갑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 수가 없었다. 탁자 서랍을 빼서 아예 거꾸로 털었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코트 안에 있는 걸까. 그렇다면 옷장이 있는 침실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 존은 떠나버릴 것이다.
"그건 또 언제 꺼내갔어?!"
"꺼내가다니, 네가 나한테 맡기고 안찾아갔거든?"
"이번에 우유 사놓은 건 나잖아!"
"우유 한통을 사면서 카드로 결제하진 않았겠지. 그 정도는 나도 알겠다. 그리고 네가 우유를 사놓는 건 100만년만에 한번쯤 일어나는 이벤트잖아. 먹고 싶은 거 없어? 파스타 해줄까?"
"Damn the pasta!"
"오케이, 라비올리나 라자냐도 괜찮지."
뒤도 안돌아보고 마트로 향하는 존의 뒷모습을 향해 셜록이 목청을 높였다.
"이탈리아 음식 따윈 꺼져버리라지! 우린 영국인이야! 로스트 비프에 푸딩이나 먹어!"
이미 계단을 내려갔는지 조금 멀리서 존의 대꾸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샐러드도 먹을까? 과일도 사올게."
그리고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셜록은 혀를 찼다. 그리고 아까보다 조금 독기가 옅어진 눈으로 마이크로프트를 응시했다.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아까도 말했잖니. 엄연히 공적인 업무라니까."
"공적이든 사적이든 상관없어.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사건은 무척 복잡하고 스케일이 커서 나라고 해도 총력을 기울여야 겨우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일이야. 형의 멍청한 직원들이 벌려놓은 멍청한 사건의 뒷수습이나 할 여력은 없어."
"셜록, 너의 애국심이나 공익의식을 고취시켜보려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을 테니 이건 어떻겠니. 네가 이번 일을 무사히 해결해준다면 영국 정부는 그에 합당한, 아니 그 이상으로 관대한 물질적 보상을 해줄 용의가 얼마든지 있단다."
동생을 돈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마이크로프트이니 만큼 셜록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자신의 제의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셜록은 그것을 잘 아는 형이 왜 굳이 여기와서 이런 헛수고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이번에는 브루스 패딩턴 사건과는 달리 존도 여왕과 나라를 위해 마이크로프트를 대신해 셜록을 독촉해주지 않을 것이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한꺼번에 팝업창처럼 셜록의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의 형은 오직 한가지 목적만으로 움직이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 가능성들은 겉으로는 판이하게 달라보이면서도 실상 많은 요인들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그 진의를 더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이것도 일종의 집착이다. 셜록은 내심 혀를 찼다. 뭘 생각하든 존에게로 사고가 흘러가버리는데 이게 정말로 타당한 추론에서 비롯된 결론인지, 아니면 마이크로프트가 개입된 바람에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두려움이기도 했다. 동생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는 마이크로프트가 존을 뭔가 상대로 술수를 부릴 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가 셜록의 뇌리에 강박관념처럼 들러붙었다. 셜록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셜록은 자신이 왜 이런 강박관념을 갖고 있으며 어째서 마이크로프트가 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 알지 못했다.
말 속에 말이 숨어있고 의도 속에 진의가 숨겨져있으며 그 진의조차도 양파처럼 까면 깔 수록 새로운 면모가 드러났다. 보이지 않는 체스판 위에 놓여진 보이지 않는 체스말들을 옮기는 것처럼 형제는 서로의 진의을 감추고 내보이며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대화를 나누었다. 형의 집착이 진절머리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완전히 자기 삶에서 잘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셜록이 비릿하게 웃었다. 형이 아니라면 내가 세상 어느 곳에서 누굴 상대로 이런 체스를 둬보겠어. 나는 내 재능의 가장 큰 희생자야. 당신이 내 형이 아니라 정말로 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나의 삶은 끊이지 않는 경이와 수수께끼들로 가득차 정말이지 단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겠지.
"좋아, 하지만 한가지 조건이 있어."
조금 더 이 아슬아슬한 대화를 즐기고 싶었던 마이크로프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셜록은 그것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형의 만족감을 훼손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심지어 귀찮은 공무를 떠맡는 것도 감수할 수 있었다.
"어떤 남자에 대한 총체적인 신상정보가 필요해. 유명인사가 아니니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형의 능력을 믿겠어."
"....오케이, 그럼 일단 사건 정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아니,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그 정보는 선수금이야."
그 어떤 의뢰인에게도 선수금을 요구해본 적이 없는 셜록을 잘 알고 있는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한번 인상을 찡그려 동생을 즐겁게 해주었다.
"어째서 내가 이 일을 좋아하지 않게 될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드는 걸까?"
"왜냐하면 맞는 예감이니까. 올리버 레드브릿지에 대한 모든 것이 알고 싶어."
"........."
"아무리 작고 사소한 세부사항이라도 빠뜨리면 이번 의뢰는 없었던 일로 하겠어."
".....이건 좀 지나치게 치졸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셜록?"
셜록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끔 형이 나와 존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수집했을지 궁금해지다가도 무서워서 알기를 포기하게 되는 거 알아?"
"존은 아니지. 너다. 오직 너뿐이지. 그러니 너와 나 사이의 알력다툼에 존을 이용하는 건 그만 두는 게 어떻겠니?"
셜록은 입꼬리를 올리며 이빨을 드러내기 직전의 뱀처럼 웃었다.
"이런, 창피하지도 않나, 친애하는 형님. 우리가 만난지 반나절만에 존을 데려간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그것이?"
셜록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약이라도 한 거냐고 물어볼 정도로 유쾌해했다. 이렇게 과장된 유쾌함이 사실은 극도의 불쾌감, 혹은 노여움과 얇은 종이 한장을 맞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이크로프트는 알고 있었다. 셜록은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을 부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를 모욕하면서도 자신은 뒤돌아서면 모든 것을 싹 잊어버리기로 악명높았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사실 셜록은 모든 종류의 감정에 그런 식으로 대처했다. 그런 만큼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정말로 극심한 감정을 느끼게 되면 아주 상궤에서 벗어난 희한한 방법으로 그걸 드러내곤 했는데, 존은 물론 레스트레이드조차 그런 셜록을 본 적이 없었다. 자기가 통제하거나 묻어둘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셜록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마이크로프트 뿐이었다.
"존을 만난 순간, 형은 이미 우리 둘 사이에 존을 끼워넣은 거야. 형이 이 모든 걸 시작했어. 나를 염탐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존은 거절했지. 그리고 만난지 하루 밖에 안된 남자를 위해 기꺼이 살인을 했고.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야. 존이 형의 제의를 승락했다면 형은 나를 감시할 염탐꾼을 하나 '더' 갖는 셈이고 설령 거절한다해도 형으로선 잃을 게 없지. 존은 용수철 같은 성격이야. 얌전하고 조용한 사람처럼 보여도 불합리한 압력에는 결코 굴복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세차게 반항하는 성미지. 그런 존에게 내가 아주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인양 꾸며대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형이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형은 존을 체스말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서 나를 위해서, 혹은 나와 함께 하는 스릴을 위해서 얼마든지 위험을 무릅쓸 남자를 하나 확보하게 된 거야. 형이 형의 수를 냈으니 나도 내 수를 낼 뿐이야."
하지만 셜록은 마이크로프트가 존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방식에 화를 내면서도 자신 또한 그런 형에게 반격을 먹일때 존을 이용하는 것을 그만 두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존에게 플랫메이트에게 보이는 것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접근할 수록 조금씩 초조해했고 그런 형의 모습은 셜록에게 상당한 만족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프는 상심한 듯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매정하구나. 너도 존에게 우리 관계를 알리는데 동의했으면서 모든 것이 내 탓인양 미루는 건 너무한데."
그것은 납득할 만한 발언이었다. 셜록은 방금 전 보였던 과도한 유쾌함을 순식간에 몰아낸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더니 내가 그 멍청한 고양이꼴이 된거지."
아직 마이크로프트가 나가지도 않았는데 그가 떠난 후 존이 돌아오기까지 이렇게 시간을 때울 거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바이올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쇼팽의 고양이 왈츠를 제멋대로 편곡해서 켜대기 시작했다. 셜록의 연주는 언제나처럼 수준급이었으나 쉴새없이 몰아치는 음의 양과 부산스러움이 마이크로프트를 질리게 했다.
한편, 존은 우연히 마트에서 마주친 사라와 함께 시장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존은 일부러 냉동식품을 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돌아오는 길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사라는 존이 MP3 플레이어 기능에 이메일도 보낼 수 있는 최신기종의 핸드폰을 기껏해야 문자나 보내는데 쓴다는 것을 알고 크게 웃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몇 곡을 다운로드해주었다. 그 노래를 듣기 위해 존은 사라와 헤어진 후 문구점에 들려 이어폰을 샀다. 존에게 특별한 음악취향이 없었던 탓인지 사라가 골라준 노래는 존에게도 좋게 들렸다.
시장 보러 간다더니 베이컨을 만들어서 오는 지 2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플랫메이트를 기다리다 지쳐버린 셜록은 토라져서 소파 위에 그 긴 몸을 옹송그린채 누워있었다. 노래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며 자기 몸통 만한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온 존은 셜록이 그러거나 말거나 요리를 시작했고 부엌에서 서서히 맛있는 음식냄새가 흘러나올때쯤 셜록은 효과도 없는 시위를 그만 두고 식탁 앞에 순순히 앉았다. 그리고는 부지런히 접시를 나르고 있는 존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마이크로프트와 자지 않았어."
셜록은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따질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존이 자신이 의도한 것 이상으로 밝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Good for you."
셜록은 아무 말 없이 주어진 라비올리를 얌전히 먹기 시작했다.
4.
손에 쥐여져있는 편지가 계속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편지의 종이가 지나치게 뻣뻣한걸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다. 그는 침대에 앉아서 기껏해야 세문단이 넘어가지 않는 편지 내용을 읽고 또 읽고 있다. 마침내 내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고 이쪽을 바라본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애써 웃어보이는데 나는 그 웃음이 견딜 수 없이 싫어진다. 자신의 슬픔과 소외감과 환멸을 애써 농담거리의 영역으로 집어넣으려는 그 발버둥이 너무나 무용해서 견딜 수가 없다.
'누나가... 딸을 낳았어요. 그 아이의 이름을 올리비아라고 지었대요. 올리비아라고...'
'...올리버.'
'어떻게 누나가 나한테 이럴 수 있죠? 어떻게....'
그때 다가가서 곁에 나란히 앉거나 어깨에 손이라도 얹어주었다면 좋았을까. 무언가가 변했을까.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때 나는 그저 두려웠다. 그에게 품은 애정과 연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에게 하는 일들이, 그로 인해 점점 변해가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고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자기혐오와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자신있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예 외면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은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한심한 자기합리화에 쌓여있었다.
그것이 훗날 이렇게도 무거운 회한으로 돌아올 줄 그때의 나는 전혀 짐작도 못했다.
존은 아침식사로 먹을 베이컨을 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자신은 평범한 영국 남자다. 특별히 보수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으며 파격적인 부분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고 먼 이국땅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전쟁을 수행하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루고 있는 어떤 부분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평균, 평범 그 자체인 그가 유난히 상식의 대변자나 모럴의 기준처럼 취급받는 것은 지금 그가 다름 아닌 셜록 홈즈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존이 셜록을 만나기 전, 이미 5년동안이나 알고 지낸 주제에 레스트레이드 경감과 경찰들은 마치 존을 셜록 홈즈에게 인간성과 세상의 상식의 의미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신이 내려보낸 사람 쯤으로 취급했고 셜록 홈즈를 모르는 이들도 존이 동석해있는 자리에서 셜록과 15분 이상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자연스레 존을 외계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필수적으로 동반해야 하는 통역자쯤으로 여겼다. 셜록의 지성은 위대하다고 평해지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세상은 그가 있어서 더 좋은 곳, 최소한 더 흥미로운 곳으로 변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그는 극도로 위험한 화약약품으로 가득찬 탱크와 같은 존재였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주변 사람들을 긴장시킨다. 그렇지만 탱크 속의 물질은 위험해도 꼭 필요한 것이고 주의를 기울여 다루어야 할 뿐, 본질적으로 유독하지는 않다. 하지만 금속 주제에 물처럼 흘러내리는 수은처럼 셜록 홈즈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근원에서부터 불안정했고 존은 그를 반대로 찍어낸 것처럼 '평범한' 재료들로 지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견고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존을 셜록의 안전장치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존은 그런 자신에게 조금 시니컬한 지위를 부여했다. '파이프' 만들어질때부터 텅비었고 타자 둘을 서로 연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래도 존은 곧 이어 덧붙였다. '제법 괜찮네.' 그는 자신의 '파이프'적인 위치에 만족했다. 아니, 만족 이상으로 보람도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흔들리고 있다. 그래도 결함이 생긴 쪽이 탱크보다는 파이프라고 하는 게 공평할 것이다. 탱크는 애초에 만들어질때부터 그 모양이었으니 새삼스레 문제가 발생했다면 변인은 파이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과민반응일까. 존은 고민했다. 근친상간이라는 말을 떠올리자마자 거기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위치를 만들어내고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강요하는 일방적인 관계를 상정해버리는 것은 자신의 선입견에 불과한 것일까. 근친상간이라는 문화적 사회적 최대 금기를 이렇게까지 일상적인 수준에서 수용하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싶지만 사실은 슬슬 한계다. 우선은 정신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가끔은 자신의 뇌가 셜록에게 마이크로프트라는 형이 있다는 사실만 기억한 뒤, 마이크로프트라는 한 개인에 대한 정보는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물론 그는 셜록이 아니니 때문에 지우고 싶은 정보를 정말로 지울 수는 없었다. 그의 동생만큼이나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강렬한 개성을 가진 인물이고 그런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존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음으로 생리적인 거부반응이 따라온다. 존은 정말로 마이크로프트와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식은땀이 났다. 공포증이 있는 사람처럼 심장박동수가 올라가고 시야가 불분명해지고 호흡과 체온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셜록과 마이크로프트가 함께 있다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방사능이 퍼지거나 바이러스가 유출된 공간에 맨 몸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로 육체적으로 괴로워진다. 존 자신에게는 아무런 물리적 정신적 해악을 끼치지 않는 사실 하나가, 단순히 인류 문화상 최대 금기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해서 그를 이렇게까지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셜록이라면 분명 흥미로워하겠지. 존은 쓰게 웃었다. 존은 자신이 왜 이렇게 괴로워하는 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둘의 관계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하는데 그게 도무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을 반강제적으로 추행하고 있는 거라면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영국 정부, 아니 UN과 NATO를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적대하고 그가 셜록에게 접근하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았을 것이다. 그 결과가 별로 성공적이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하지만 그 둘의 관계는 존조차도 부정할 수 없이 완벽한 상호합의 아래 이뤄지고 있었고 셜록이 비록 친동기간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형에게 애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보였다. 마이크로프트 역시 마찬가지였고. 어쩌면 그 둘의 정사라는 것은 어린 새끼 사자 둘이 서로를 물고 뜯고 할퀴며 뛰어노는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존은 결국 이렇게 밖에 결론내리지 못했다.
'지금 장난하냐!?'
당연히 이해 못하지. 누가 이런 것을 이해해?! 존은 눈앞에 없는 상대를 향해 입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불을 뿜었다. 존은 이마를 짚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너무 다이나믹하게 살았어...."
그에게는 일상의 평온함이 필요하다. 적어도 일시적이나마 평온이 보장되며 외부의 자극과 변화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독립된 시공간이 필요하다. 그로 하여금 평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존 왓슨에게 어울리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세계가 기반에 깔려있지 않다면 셜록 홈즈와 함께 하는 위험하고 과격한 모험은 모험이 아니라 위기이고 재앙이 된다. 이제 존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음'을 견딜 수 없는 만큼 '그 무엇도 일어날 수 있음'이 두려웠졌다.
바싹 구워진 베이컨을 접시에 내려놓고 다음으로 계란을 익히려고 하는데 문득 셜록이 계란을 완전히 익혀먹는지 아니면 노른자는 동그랗게 반만 익히고 흰자만 익히는 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제야 지금은 셜록치고도 기상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보니 존이 식사를 준비하려고 부엌에 내려왔을때부터 인기척이 없었다. 존에게는 그냥 아침일 뿐이어도 셜록에게는 일이 없으면 새벽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어딜 나간 거지? 레스트레이드 경감에게서 연락이 왔다면 날 깨우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하는 수 없이 존은 두 사람 몫으로 구운 베이컨을 모두 혼자서 맛있게 먹어치웠다. 간만에 혼자하는 아침은 평화로웠다. 셜록이 이대로 늦게 들어온다면 이때를 틈타 사라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째서 형을 상대로는 연전연승이 불가능한 걸까? 셜록은 고뇌했다. 그를 고뇌하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그게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지금 당장 셜록은 형에게 또 한방 먹었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트리며 고뇌중이었다. 처음부터 존을 패로 이용한 것이 패착이었던 걸까. 존을 이용하는 것만큼 형을 동요시킬 수 있는 수가 달리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셜록도 존을 게임말로 쓰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해왔지만 이래서야 되돌아왔을 때의 데미지가 너무 크다. 살을 주고 뼈를 치는 것도 한도가 있다. 이러다간 이쪽도 살이 다 드러나 남는 게 뼈밖에 없게 생겼다.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친구더구나, 네 의사선생은."
저번에 궁지에 몰렸던 것은 셜록이 약에 취해본 환각인것 마냥 마이크로프트는 언제나처럼 여유만만한 얼굴로 돌아와있었다.
"그래, 선수금에는 만족하니? 이제 본론에 대해 논의를 나눠도 될까?"
"Wait, 아직 다 안 읽었어."
"오, 셜록. 아무리 나라고 해도 대서양 건너에 거주했던 민간인의 사적 정보를 시시콜콜 다 알아올 순 없다. 당사자가 4년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사고사'한 사병이라면 더더욱 힘들지. 차라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봤더라면 아주 자세히 알려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
셜록은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무시했다. 어차피 그는 올리버 레드브릿지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셜록은 존 왓슨과 접점이 없던 시절의 올리버 레드브릿지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설령 접점이 있던 시절이라해도 존 왓슨과 상관없는 올리버 레드브릿지란 인물의 독자적인 개성에 대해서는 일부러라도 무시하고 싶었다. 지금 그게 잘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인적기록에 사진으로 남아있는 이 24살 청년의 잘생긴 얼굴이 '누군가'를 강하게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아이오와 옥수수 농장주의 아들이 창백한 피부와 뼈와 근육, 피부로만 이루어진 듯 마른 몸을 가졌을 리는 없다. 올리버 레드브릿지는 키가 크고 건장한 몸을 한 건강체에 볕에 그을려 만들어진 짙은 피부색, 그리고 거의 백금발에 가까울 정도로 밝은 색의 머리카락과 갈색과 녹색이 뒤섞인 눈동자를 가졌다. 다만 보통 개인의 개성을 뭉개버리고 규격화시키기 마련인 입대자원서 증명사진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게 타인의 개입을 거부하는 듯한 눈빛과 배타적인 분위기, 그리고 학적부에 남아있는 뛰어난 지성과 맹렬한 목표의식이 결합한 흔적이 성실성이나 야심보다는 히스테리나 강박관념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을 '한 인물'을 연상시켰다. 분명 마이크로프트도 이 자에 대한 신상정보를 건네받은 즉시 그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셜록 앞에서 저리도 희희낙락해서는 셜록의 당혹감과 도무지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 수 없는 낙담함을 비웃고 있는 것일터. 셜록은 형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표정관리를 하지 못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존 왓슨은 셜록과 만나기 전, 셜록과 아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청년과 깊은 교제를 했다. 그 관계는 매우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끝났고 존은 아직까지도 그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셜록은 존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무한한 헌신과 깊은 우정을 생각했다. 보통 타인을 당황하게 만들고 불쾌하게 만드는 것 이외에 다른 역할을 한 적이 드문 셜록의 언행들이 어떻게 존을 매료시켰고 그로 하여금 그것을 즐거운 자극이라고 받아들이게 했는지를 추적했다.
셜록의 결론은 너무나 명확해서 유치할 정도였다.
'이것은 불공평해.'
셜록에겐 존이 처음이었다. 무엇이 처음이냐고 딱 잘라말할 수는 없지만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자기와 자신의 모체가 다른 개체라는 것을 인식할때의 충격만큼이나 셜록에게 존은 새로운 사람이었다. 존은 다른 어떤 것보다 바로 그 새로움으로 셜록에게서 독점적인 위치를 점했다.
순전히 사회적인 경험만 따지면 존이 자신보다 훨씬 경험이 풍부한 사람임은 셜록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셜록은 그냥 무시해버렸지만 존은 해결하며 살아왔고 그 갈등의 종류와 형태에 대해서도 훨씬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다. 셜록은 유형을 수집할 뿐이지만 존은 경험했다. 그 차이는 근본적으로 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셜록은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인정했다.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것은, 이렇게까지는...
'나한테는 네가 처음이었어. 헌데 어째서 나는 네 처음이 아니지?'
세상에 어느 누가 연인도 아니고 플랫메이트의 과거에 대해서 이런 감정을 가지겠는가. 하지만 어쨌거나 셜록은 그랬다. 그저 감정에 불과했기에 그 영향력은 더욱 폭발적이었다. 셜록은 지금 자신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셜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셜록."
마이크로프트가 불렀지만 셜록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메일 보내."
마이크로프트는 말그대로 엉망진창인 몰골로 집무실을 뛰쳐나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차고 우아한 특유의 무표정으로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날 따라 타이밍이 나빴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셜록이 돌아왔을때 존은 사라와 만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기 감정을 추스리는데 익숙하지 않은 셜록이 집에 왔는데 바로 존이 보이지 않자 그 즉시 문자를 보냈지만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사소한 일이겠거니 여긴 존은 그걸 무시했다. 그 뒤로 쉴새없이 문자 메세지가 날아왔지만 문자가 다섯개가 넘자 존은 아예 문자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고 열여섯통이 넘었을때는 바로 폰의 배터리를 빼버렸다. 어떻게 보면 만난지 하루도 안된 사람에게 불편하더라도 오라는 문자를 보내 런던 반대편에서 달려오게 만든 주제에 기껏해야 문자 메세지 하나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예전 일의 대가를 치루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그날 저녁 늦게 존이 베이커가로 돌아왔을때 셜록은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한 커피를 열다섯잔쯤 마신 것처럼 흥분해있었다.
"왜 전화 안받았나?"
존은 셜록이 전화를 걸었다는 것에 놀랐다. 존이 주머니에서 휴대폰과 분리된 배터리를 주섬주섬 꺼내 다시 끼우는 것을 본 셜록의 눈에서 말그대로 불똥이 튀었다.
"꺼놓고 있었어?!"
"기다려봐."
존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조차 없었다.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셜록이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 폰에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문자가 띵똥띵똥 소리를 내며 쉴새없이 뜨기 시작했다. 존은 총 54개의 문자 메세지가 들어와있는 것을 보고 좀 어이가 없었다.
"셜록, 우린 아무 사건도 맡고 있지 않잖아?"
"없긴 왜 없어. 하나 있잖아. 마이크로프트가 의뢰했던 거."
"....그거 안하기로 하지 않았어?"
"해! 빌어먹게도 하게 됐다고!"
그것은 전적으로 셜록의 선택이었다. 올리버 레드브릿지의 정보와 교환해서 마이크로프트의 사건을 맡아주기로 했던 것은. 하지만 형에게 찔러넣을 창으로 골랐던 그 정보는 우습게도 알고 보니 창이 아니라 부메랑이었다. 일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에 대한 짜증에 존에 대한 아직까지도 그 정체를 밝히지 못한 기이한 억하심정까지 더해져서 셜록의 흥분은 점점 하늘을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보통은 존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 조금씩 가라앉았는데 지금은 정 반대였다. 존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면 볼수록 치밀어올랐다.
"그것 때문에 문자했던 거야? 중요한 일이면 중요한 일이라고 말...."
"올리버 레드브릿지가 자살한 이유가 뭐야?"
사람은 칼에 찔리고도 자신이 칼에 찔렸다는 사실을 모르면 한 블럭이 넘는 길을 멀쩡히 걸어가다가 쓰러질 수 있다. 존은 자신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처럼 한동안 눈을 깜박거리다가 멍하니 되물었다.
"......뭐?"
"사고사였다는 둥 말도 안되는 소리는 집어치워! 너도 그게 사고사가 아닌 자살이었다는 걸 알고 있잖아! 어느 미친 놈이 한밤중에 자다가 침대맡에서 불도 켜놓지 않고 실탄을 넣어둔 채 총기소제를 한단 말이야? 그는 자살했어. 넌 그와 잤지. 그리고 형과 나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자 그를 떠올렸어. 왜? 그도 근친상간자였나? 피해자였어? 아니면 가해자? 그와 어디까지 어울려줬지? 그가 너한테 투영한 건 어느 쪽이었나? 자신의 학대자? 아니면 피학대자?"
"셜록 홈즈!!!"
"네가 레드브릿지를 투영한 건 어느 쪽이야? 나? 아니면 마이크로프트?"
존은 흥분과 노여움으로 말을 잘 잇지도 못했다.
"...너, 너... 너 그의 뒷조사를 했어?"
"그게 중요한 가? 마이크로프트는 네가 알려준 적 없는 네 폰넘버까지 알고 있는데?"
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음성을 다듬어 말을 꺼냈다.
"...마이크로프트로군. 내가 올리버 레드브릿지에 대해 말한 사람은 너 뿐이지. 네가 부탁했어, 아니면 마이크로프트가 어떻게든 줏어듣고 제멋대로 조사한 건가?"
'줏어듣다', '제멋대로'란 어휘에서 배어나오는 희미한 경멸에 셜록은 그 와중에도 고소를 감추지 못했다.
"셜록!"
"....내가 했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그게 중요한.........하!"
셜록의 목소리에 미미하게 배어있는 죄책감을 감지하고는 이 자식이 자기가 잘못했다는 건 아나보다 싶어 버럭 화를 내려던 존이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텅 비었다. 불쾌하다. 한없이 화가 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럴싸한 이유를 들어 납득시켜주지 않으면 셜록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초면에 '당신 형은 알콜중독자고 최근에 부인과 헤어졌군요.'라고 말한 남자다. 그런 소리를 듣고서도 화를 내지 않았던 자신이다. 하지만 존은 네 능력을 발휘해 내 신상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마이크로프트의 힘을 빌려 나의 과거를 '캐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것을 반드시 셜록에게 납득시키고 넘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쩌면 자신이 레드브릿지의 일을 셜록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진정한 까닭은 셜록이 짐작하는 이유에 가까울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은 정말로 올리버의 일만큼은 셜록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해리의 일과는 다르다. 올리버의 일은 필연적으로 '존 왓슨'이란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는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존 왓슨과 올리버 레드브릿지와의 관계를 고찰하는 일은 곧 존 왓슨이란 남자의 비겁함과 트라우마와 이기심에 대한 소고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은 절대로 셜록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의 앞에서는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도, 셜록이 자신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해도 그걸 제멋대로 재단하고 심판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존 왓슨의 문제다. 다른 사람이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멋대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영역이다. 설령 그 사람이 셜록 홈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존은 냉정해졌다. 이것은 존이 타고난 본성일 수도 있고 군인으로서 훈련받은 결과일 수도 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생사를 가르는 위기가 닥치면 그의 이성은 오히려 심해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해저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쇳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아서 존은 저절로 조용하고 침착하게 말할 수 있었다.
"너와 올리버는 전혀 달라. 하나도 같지 않아."
셜록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똑똑한 청년이었지만 너처럼 천재적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었어. 불행한 환경에 처해있었고 네 짐작대로 근친상간의 피해자였지. 나는 의사로서는 그를 치료하는데 실패했고 친구로서는 그에게 위안이 되어주는데 실패했어. 그는 내가 죽는 날까지 내 실패의 기록 중에서도 가장 큰 실패로 남아 있을 거야. 그렇기에 생각하게 되는 거야. 너와는 상관없어. 그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너와 네 형의 관계를 내멋대로 이해해보려고 애쓴 과정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불과해. 너희 둘을 이해하지 못해서 내멋대로 이해할 수 있는 조악한 틀을 만들다보니 내가 아는 유일한 사례가 나온 거야."
셜록은 그 정도로 납득하지 않았다. 그는 끈질기게 물었다.
"...그가 자살한 이유가 뭐야."
존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누군가가 그랬다. 거짓을 말할때는 진실을 약간 섞는 것이 훨씬 설득력을 높인다고. 그리고 어떤 거짓은 거짓을 꾸며대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약간 은폐하는 것으로도 훌륭하게 성립한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존에게 주는 부담은 어마어마했다. 존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존 왓슨. 여기서 망설이거나 머뭇거리거나 어떤 조짐이라도 보인다면 셜록은 귀신같이 알아차릴 거야. 네가 셜록 홈즈를 상대로 말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 일생일대의 연기야. 한번쯤은 성공해봐.
"그가 죽기 나흘 전에 고향에서 편지가 왔어. 그의 누나가 보낸 거였어. 그가 입대하기 전에 그의 누나는 이미 임신 중이었는데 이번에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었어. 가족들은 먼 곳에서 '신의 일'을 하고 있는 막내아들을 기려서 그 딸의 이름을 '올리비아'라고 지었어. 이 훈훈한 이야기가 올리버의 목숨을 끊은 이유는..."
'어떻게 누나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죠?'
"...그 아이의 친부가 그 누이의 남편이 아니라 올리버였기 때문이야. 올리버는 자신의 죄악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듯한 누나의 행동에 완전히 겁에 질렸어. 그게 단순히 올리버의 피해의식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올리버를 자살로 몰아가기엔 충분했지."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셜록이 추궁했다.
"그게 단가?"
"그게 다야."
"아닌 거 같은데."
"아니, 이게 다야."
"그것 뿐이라면 네가 그 친구에게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지. 또 무슨 일이 있었지?"
"......."
역시 자신은 연기랑은 맞지 않는가보다. 존은 포기했다. 그저 포기라고 말하기엔 그 질감이 너무도 단호했지만 그래봤자 포기는 포기였다.
"아니, 그게 다야."
"존."
"이 이상은 내가 말하지 않을 테니까."
존은 자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셜록은 어느새 격렬했던 흥분을 가라앉히고선 진실을 탐구할때마다 그가 보이곤 하는, 사람을 꿰뚫는 눈빛으로 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알아내려고만 한다면 알아낼 수 있다는 걸 넌 알고 있어."
"그래, 알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이상은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거야. 이건 조건이기도 해."
셜록이 살짝 인상을 썼다.
"무슨 조건?"
"너와 마이크로프트가 이 집 천장 아래에서 무슨 짓을 하든 묵인하겠다는 조건."
"이미 그러고 있잖아."
"그래,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다는 게 내 조건이야. 만약 네가 이 조건을 무시한채 마이크로프트와의 관계를 지속한다면 나는 런던을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너와 동거하는 것을 그만 둘 작정이야."
존의 이러한 뜻은 셜록을 정말로, 진실로 놀라게 했다. 셜록은 거의 경악했다.
"설명할 수는 없어. 이런 감정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깊은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나는 너와 네 형이 맺고 있는 관계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이건 내 노력으로는 안되는 일이야. 미안해. 하지만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네가 나와 올리버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 알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나를 생각해서 참아준다면 나 역시 아무리 내가 참지 못할 일이라도 너를 생각해 참아보겠다는 거야. 그리고 그게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최저한의 조건인 거 같아. 상대를 위해 조금씩 양보해주는 거지."
존이 논리가 아닌 감정과 배려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셜록은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건... 그건 달라."
"뭐가?"
"마이크로프트와 올리버 레드브릿지에 대한 일은 같지 않아!"
셜록의 말은 그 자신의 귀에도 어린애가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존은 시종일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게는 같아."
"내게는 달라! 내게 있어 마이크로프트는 네게 있어 레드브릿지와 같은 의미를 차지하지 못해! 그는 내 형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네게 있어서 그는...."
아픈 기억이야.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세에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긴 그림자를 가진 유령이야.
존은 납득할 수 없었다.
"너는 네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과 섹스를 해? 그냥 타인도 아니고 피를 나눈 친형이기까지 한데?"
셜록이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셜록 홈즈 인생에 몇번 해보기 힘든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존은 의기양양해하지 않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는 더이상 머리 아프게 따지고 싶지 않았다.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너무나 피곤했다.
"....그래, 네 말이 맞을 지도 몰라. 둘은 다를 지도 몰라. 그래도 네가 정말로 나를 생각한다면, 우리 사이에 우정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이번만큼은 같이 취급해줬으면 좋겠어."
셜록은 할 말을 잃었고 존은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온 몸이 흠씬 두들겨맞은 것처럼 피곤하고 아팠다. 과연 심적인 트라우마로 다리까지 절만큼 심약한 사람이라고 할까, 존은 자조하며 2층 침실로 올라갔다. 갑자기 다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셜록과 말다툼을 한다고 밖에서 돌아왔는데 채 씻지도 못했다. 다시 욕실로 내려갈까 하다가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존은 실이 끊긴 꼭두각시처럼 침대 위에 쓰러졌다. 몸을 태아처럼 동그랗게 말고는 그저 이대로 똘똘 뭉쳐서 아주 작아지고 작아져 그냥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존, 당신은 어디까지 해줄 수 있어요?'
아직도 귓가에 그 목소리가 생생하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셜록과 마이크로프트의 일로 부딪히면 부딪힐 수록 생생해진다. 올리버는 좀처럼 그를 존이라고 부르려고 하지 않았다. 격식에 집착하는 영국인들을 머쓱하게 만들 만큼 끝까지 닥터 왓슨이라는 호칭을 고집하더니 그날 밤, 존의 침실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을 입밖에 꺼냈다.
'존, 날 위해 어디까지 가줄래요?'
난 아무데도 갈 수 없었어, 올리버. 널 위해서는 물론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나는 원래부터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인간이었어. 그래도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누가 억지로 머리를 물 속에 눌러 익사시키는 것처럼 존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수마에 저항하지 못했다. 잠들기 직전, 존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미안해, 셜록. 너의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라는 자리가 하필이면 나같은 사람에게 주어져서 정말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