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의 흔적 3
1. 여전히 생각나는 대로 쓰고 있음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는 설립한 지 25년째인 중소로펌으로, 업계에서 전통적으로 명망있는 로펌이라 할 수 없었지만 최근 몇 가지 큰 사건들에서 연달아 승소하며 일반 대중들에게도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 ‘몇 가지 큰 사건들’은 모두 대기업과 정부, 군대 등을 상대로 한 것으로 그 중 실제로 승소판결을 받은 건은 2건에 불과했으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골리앗이 먼저 협상을 제의하여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화해를 이룬 점은 분명 주목받을 만한 일이었다. 실로 회사의 수준과 평가등급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만한 기회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목표는 - 그 목표를 추구한 사람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 좌절됐다. 우선, 창립 파트너인 그렉 레스트레이드가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개인적 불행이 겹친 탓에 그답지 않게도 신경쇠약증세를 보이며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고 둘째로 기명 파트너는 아니나 곧 그 자리에 오를 예정이었던 셜록 홈즈가 자신이 이때까지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에 기여한 모든 공적을 뒤로 하고 다른 로펌으로 이직했다. 갓 로스쿨을 졸업한 몰리 후퍼는 이런 시기에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에 채용되었다.
“몰리 후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근사한 회색 여성정장 차림의 흑인 여성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샐리 도노반, 형사사건팀 팀장이에요. 승선한 것을 환영해요.”
간단한 악수 뒤에 샐리 도노반은 ‘뛰지 않으면서도 남들보다 2배 속도로 움직이기’ 신공을 펼치며 몰리를 끌고 탕비실, 자료실, 회의실, 상담실 등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몰리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고 샐리 또한 그녀가 한번에 기억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존 왓슨은 기명 파트너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기명 파트너가 되리라고 기대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회사 내에서뿐만 아니라 업계 내에서, 심지어 라이벌 회사의 사람들에게도 널리 인정받고 호감과 호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 좋은 변호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입증했으며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를 사회적 평가를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었던 계기가 된 빅 케이스들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존, 잠깐 시간 있어요?”
“샐리, 어서 들어와요.”
“존, 몰리 후퍼를 소개할게요. 이번에 들어온 신입이에요. 몰리, 여기는 존 왓슨, 당신의 멘토이자 직속상관이에요.”
“승선을 축하해요, 몰리 후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미스터 왓슨.”
“John, please. 잠시 앉겠어요?”
“간단하게 하세요, 존. 참, 나중에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마사가 전해달랬어요.”
“알았어요. 이따 봐요, 샐리.”
존의 사무실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전망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존은 몰리에게 자리를 권했고 몰리는 존의 맞은 편에 엉거주춤 앉았다. 존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았고 정장과 구두에 익숙하지 않아 어설퍼보이는 그녀의 몸가짐에 주목했다.
“우선, 당신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 있군요. 고마워요, 몰리. 날 승진시켜줘서.”
“예?”
“15년동안 우리 회사에 의료과실소송담당 변호사는 나 혼자였거든요. 몰리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의료과실소송‘팀’이 꾸려졌고 나는 팀장이 됐지요.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어요?”
“.....예.”
“그런데도 우리 회사에 오고 싶어요?”
“물론입니다! 저, 전 언제나 여러분들이 하신 일을 존경해왔어요. 피터슨 vs 노버리 사건 때는 방청도 갔는 걸요. 전 스크랩북도....”
“그 ‘여러분들’이라는 건 정확히는 셜록 홈즈와 나머지를 의미하는 거겠죠?”
“아니예요! ....하지만 제가 그 분을 다른 분들보다 조금 더 존경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면 거짓말이겠죠.”
시무룩해진 몰리를 보는 존의 마음은 복잡하지도 심란하지도 않았다. 그 자신도 그 사실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유감이네요, 몰리. 셜록 홈즈는 빌어먹을 개자식에 전생의 업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고통의 근원같은 작자지만 내 편으로 두었을 땐 그보다 더 든든한 남자가 없었죠. 그 때문에 우리 회사에 지원한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제가 애들러 앤 모리어티에 채용될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혹시 그 회사 이름이 왜 애들러 앤 모리어티가 됐는 줄 알아요? 대부분의 자산은 모리어티측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글쎄요, 알파벳 순서?”
“동전던지기요. 제임스 모리어티가 동전던지기에서 지는 바람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간판에 자기 이름을 두 번째로 올리게 됐죠.”
“....진짜요?”
“당사자한테 들었어요. 자, 그럼 오늘 일정을 시작해볼까요?”
마사 루이즈 허드슨의 전문분야는 건물 및 토지 등 부동산 관련 분쟁으로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가 설립될 당시 대부분의 재정적 자원은 그녀가 축적한 자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재정적 자원이 그녀의 몫이었다면 인적 자원은 레스트레이드의 담당으로, 존 왓슨을 비롯하여 샐리 도노반, 최고이자 최악의 선택이었던 셜록 홈즈까지 모두 그가 끌어들인 인재였다. 그렉 레스트레이드가 공판정이라는 이름의 아레나에서 가장 빛나는 글래디에이터였다면 마사 허드슨은 이 회사가 조직으로서 굴러갈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었다. 소송전문 변호사들 특유의 화려함은 없을지언정 마사 허드슨이야말로 이 회사의 진짜 엔진이었다. 25년 동안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친구인 그렉은 병원에 드러누워있고 회사의 가장 큰 전력이자 귀중한 자산이었던 셜록 홈즈는 제대로 된 사직서나 통보, 인수인계조차 없이 다른 로펌으로 가버린 이 초유의 위기 앞에서도 마사 허드슨은 침착했다. 3명의 어시스턴트에게 동시에 명령을 내리면서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존 왓슨을 향해 ‘유후~’하는 특유의 인사를 건낼 정도로 말이다.
“어서 와, 존. 부탁할게 있어.”
“마사, 안돼요.”
“나야말로 안돼. 지금 샐리가 뭘 하고 있는 줄 알아? 이혼소송을 맡고 있다고. 그 샐리가 말이야. 헬하운드 도노반이 검찰이 아닌 바람난 남편 뒤를 쫓고 있다고. 자네에겐 안된다고 말할 권리가 없어.”
“마이크는 뭐하는데 샐리가 이혼소송을 해요?”
“그렉이 맡았던 일 중 3분의 1을 내가 하고 있어. 내가 하고 있던 세금 문제를 대신 맡아줄 사람이 마이크 밖에 더 있어? 자네 세법 알아?”
“랭데일은?!”
“나와 마찬가지로 그렉이 맡았던 일 중 3분의 1을 하고 있지. 남은 3분의 1은 빵부스러기처럼 이 회사의 모든 변호사들에게 골고루 뿌려질 예정이야. 지금 자네에게 가장 첫 번째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냉큼 받아.”
“저한텐 돌봐야할 뉴비도 있어요!”
“흥, 자네가 그렇게 caretaker여서 셜록이 회사를 나갔나 그래? 입다물고 일이나 해. The people vs. 맥팔레인 사건은 자네가 맡아.”
“형사사건이잖아요!”
“우리 회사가 가지고 있었던 최고의 형사전문변호사랑 자네가 같이 했던 사건이 얼마인데 이거 가지고 징징거리는 거야? 냉큼 나가서 일 안해?!”
맥팔레인이 기소된 범죄는 조너스 올데커에 대한 1급 살인이었다. 중범죄이니 만큼 구속영장신청이 받아들여져 현재 맥팔레인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는 절박하고 불안해했으며 특히 자신의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가 셜록 홈즈가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절망했다. 몰리 후퍼는 그런 의뢰인을 정서적으로 안정시키는 존 왓슨의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살인의 동기부터 방법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몰리는 이 남자가 진짜 무죄라면 이렇게까지 운이 없기도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눈 앞의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신뢰가 간다기보다는 너무 심약해보였던 탓이다. 그것도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유산상속을 목적으로 한 계획살인을? 돌아오는 길 내내 몰리는 맥팔레인이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또 했다.
“어떻게 생각해요?”
“예? 뭘요?”
“그가 무죄라고 생각해요?”
“...전 변호사는 그런 거 신경 안쓰는 줄 알았는데요.”
“세상에는 자기 의뢰인이 무죄라고 믿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변호사들이 있으니까. 내가 보기엔 몰리도 그런 타입인 거 같은데.”
“글쎄요, 살인을 저지를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처음에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해요. 어느 바보가 자신이 상속인으로 지정된 바로 다음날 피상속인을 살해하겠어요? 그것도 사고사나 자살로 꾸미지도 않고 살인임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방법으로 말이에요.”
“일종의 역발상일 수도 있죠. 진짜 동기는 숨겨져 있는 거고. 명확한 동기를 눈 앞에 펼쳐놓음으로써 검찰로 하여금 그를 계속 쫓도록 만드는 거예요. 진짜 동기를 찾았다고 생각한 검찰은 더 이상 수사를 진행시키는 대신 사건을 서둘러 기소하고 공판정에서 그 동기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변론하여 배심원들의 합리적인 의심을 사서 무죄판결을 받는 거죠. 그 뒤에 진짜 동기가 밝혀진다해도 일사부재리로 그는 영원히 자유죠.”
“하지만 그의 불안증세는 진짜처럼 보이던데요. 눈 밑에 늘어진 다크써클에다 항시 긴장되어있는 어깨와 팔하며... 진범이라도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음, 제가 너무 잘 속아넘어가는 걸까요.”
“몰리, 머리로 생각하려 하지 말아요. 당신 직감이 뭐라고 하나요?”
몰리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 존 맥팔레인씨가 무죄라고 믿어요. 아니, 생각해요. 아니, 그런 것 같아요...”
“좋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정말요?”
“검찰은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어요. 살인의 동기도 있고 증인도 있고 범행도구도 있고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피의자의 피묻은 지문도 있지요. 그에 반해 우리 불쌍한 의뢰인에게는 제대로 된 알리바이조차 없어요. 이 정도면 가히 슬램덩크라고 부를 만 한데, 실제 형사사건에 이런 슬램덩크가 얼마나 되는 줄 알아요?”
“얼마나 되는 데요?”
“없어요.”
“.........”
“게다가 피해자가 마음에 걸려요.”
“피해자가요?”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연고없는 청년에게 자기 전재산을 물려주겠다고 결심했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가장 먼저 할 일이 뭐겠어요? 자기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상담을 하겠죠. 하지만 조너스 올데커는 그냥 맥팔레인에게 찾아가서 다짜고짜 수기로 적은 자기 유언장을 내밀었어요. 그리고 그날 바로 맥팔레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서류들을 보여줬고요. 마지막 살인이란 클라이맥스를 맞이할 때까지 모든 사건의 진행이 피해자의 주도 하에 이뤄지고 있단 말이죠. 난 이게 정말정말 수상해요.”
“....거기까지 생각해놓으시곤 저한테는 직감이 어쩌고 저쩌고 하셨단 말이죠.”
존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직감이 좋은 사람이랑 일하는 게 좋거든요.”
존과 몰리가 회사로 돌아왔을 때, 존의 비서는 그에게 사무실에 그의 영원한 ‘페르소나 논 그라타’가 와있다는 것을 알렸다. 잔머리 하나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헤어, 강한 골격의 아름다운 얼굴, 피처럼 붉은 입술, 크림색 블라우스와 길게 슬릿이 들어간 베르사체 스커트. 루부탕의 스틸레토 힐.
“Good afternoon, 존, 기다리고 있었어요.”
“미스 애들러. 반갑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군요. 몰리, 인사해요. 이쪽은 아이린 애들러, 우리 회사한테 연달아 세 번 진 애들러 앤 모리어티의 기명 파트너이자 동전던지기의 승자, 셜록 홈즈의 새 보스죠. 미스 애들러, 여기는 몰리 후퍼, 신입변호사이자 내 ‘새’ 동료입니다.”
‘동료’라는 말에 시선이 좀 더 오랫동안 머무는 것 같았지만 몰리 후퍼는 아이린 애들러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 순진하고 연약해보였다.
“정확히는 한번 패소에 두 번의 조정합의죠.”
“우리 편에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결정된 조정합의 말씀이군요.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제 초라한 사무실에 발걸음을 한 건가요? 셜록은 이미 그쪽에 있는데.”
“미스 후퍼, 잠시 자리를 좀 비켜주시겠어요?”
“왜요? 그녀가 들으면 안되는 얘기라도?”
“좀 개인적인 일이기는 하죠.”
“정말 흥미로운 일이겠군요. 이런 걸 혼자 듣다니 미안해서라도 보내면 안될 것 같은데요. 몰리, 여기 앉아요.”
몰리는 냉큼 앉았다.
“....셜록이 쉽지 않을 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댁이 해야 했을 일을 안했던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닐텐데요. 그 역은 더더욱 그렇고.”
“오? 그건 내가 셜록을 스카웃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인가요?”
“정반대네요. 해야 할 일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꼭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당신 둘은 아무 잘 맞는 커플이 될 겁니다. 화환이라도 보낼까요?”
“존.”
여성스럽고 울림이 풍부한 목소리가 단호하게 그의 이름을 말했다. 존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았다.
“우리 회사로 와요. 그렉은 무너졌어요. 벌써 소문이 나고 있어요. 죽을 작정이 아니면 6개월 이내에 업무에 복귀하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의사가 그랬다면서요? 이 업계에서 6개월의 공백은 치명적이에요. 마사 허드슨은 훌륭한 관리자죠. 하지만 이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저 훌륭한 관리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스타가 필요하죠.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스타였어요. 지금 그는 떨어졌고 당신네 회사에서 가장 크고 환하게 빛나던 다른 별은 내 손안에 있죠.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는 지금 판도라의 상자나 마찬가지예요. ‘희망’말고는 남은 게 없어요.”
하지만 그 말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셜록이나 당신같은 사람들에게 나는 꽤 느리고 둔한 인간이죠. 하지만 반복은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학습법이라, 당신과 여러번 마주치다보니 나도 알게 된 게 좀 있어요. 당신은 자기가 불리할 때 가장 당당하게 굴거든. 무슨 일이죠? 알고 보니 셜록은 도저히 목줄이 채워지지 않고 당신은 당신이 생각한 만큼 유능한 핸들러가 아니던가요?”
몰리는 지금 저 표정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만큼만 아이린 애들러에 대해서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존, 애원하게 만들지 말아요. 어쩌면 다음번에는 애원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어요.”
“셜록도 자주 언급했던 건데, 나한테는 약점이 있어요. 여자에 대해서, 특히 아름다운 여성에 대해서는 종종 잘못된 판단을 하죠. 그리고 미스 애들러, 당신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론의 여지없이 내 눈길이 닿아보았던 중에 손꼽히게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죠. 그래서 말인데, 내 사무실에 당신이 찾아와 앉아있는 모습을 보는 건 내 눈과 마음에 꽤 큰 즐거움을 준답니다. 아마 내가 당신네 회사로 가게 되면 그럴 일이 별로 없겠죠? 더 자주 다녀가요. Do please me.”
정적이 흘렀다. 눈싸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뚫어져라 상대를 바라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아이린 애들러였다. 시선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고개만 돌려 존을 바라보며 아이린 애들러는 입에 문 쓴 약을 뱉듯이 말했다.
“정말이지, 당신은 칭찬을 모욕의 수단으로 쓰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요.”
“칭찬 고마워요. 지금 입고 있는 치마가 마음에 드네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당신 허벅지지만.”
만약 사무실 문이 유리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쾅 소리가 나게 닫았을 것이다.
“그녀가 홈즈씨를 데려간 건가요?”
“몰리, 누가 들으면 애들러가 어린애나 금치산자를 유괴해간 줄 알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마치 자기 때문에 셜록 홈즈가 이직한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그 수법에 넘어가지 말아요. 저 여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여서 지금 그 자리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인 인물이니까. 셜록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해요. 어디에 있든 누구랑 있든 마찬가지죠. 만약 내가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의 기명 파트너였다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손이 발이 되도록 셜록 홈즈의 기미를 맞추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다행히도 난 기명 파트너가 아니죠. 자기 흥미를 끌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라도 맡지 않았던 건 여기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딜가나 셜록 홈즈가 셜록 홈즈일 뿐이라면, 그의 급료수표에 서명된 이름이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건 애들러 앤 모리어티건 무슨 상관인가요.”
“.....어째서 말리지 않았어요?”
“무엇을?”
“홈즈씨가 떠나는 걸요.”
존은 허탈한 듯 웃었다.
“난 그를 말릴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어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두 분은 친구였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죠. 근데 내가 결혼을 하자...”
“.....”
“그가 말하길, 내가 자기 마음을 아프게 했다더군요.”
‘이런, 젠장.’ 몰리는 생각했다. ‘여기까지 알 필요는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