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엑퍼클은 그래도 최소 세번은 봤던 거 같은데 엑데퓨는 훨씬 매끈하게 잘 뽑힌 영화라고 하면서도 3번씩 볼 마음은 안든다. 매튜 본은 진짜 끝내준다 싶었던 장면과 저게 뭐야 풉하고 뿜기는 장면이 좀 뒤섞여있었는데 반해 싱어는 뿜끼는 장면 하나도 없이 잘 만들었는데 진짜 끝내준다 싶은 장면도 나중에 되돌이켜 볼때나 생각나지, 또 보고 싶어서 못견디겠다 싶은 마음까지는 안드는 듯. 아니면 그냥 내가 늙어서 그럴 수도 쿨럭쿨럭;;
2. 새삼 예고편 재탕했더니 로그 ㅠㅠㅠㅠ 찍어놓고 최종 편집에서 날아간 장면이 엄청난 가보다. 아예 대본 바꾸고 재촬영한 장면도 있네.
3. 에릭색히는 엑스맨 1부터 일관성 있게 저런 색히였다. 엑스맨 1부터 차근차근보면 오히려 엑퍼클이 예외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임. 그때 딱 좀 물렁했고 (아직 매그니토가 되기 전이라) 원래 저런 놈 맞아여.... 겨스님은 1편부터 저 색히가 싸지르고 다니는 똥 치우느라 고생하셨더랬죠. 2편에선 거기에 스트라이커놈까지 끼어서 본의 아니게 인류멸망미수범까지 되고....ㅠㅠ 크흡. 어쩌다보니 의도치 않은 싱어 쉴드.
4. 에릭과 매그니토 모두 탄생의 기원 자체가 결핍과 상실이다. 그는 언제나 부모를 잃었다. 하지만 자기가 사랑했고 또 자기를 사랑해준 사람들 다 냅두고 하필이면 쇼우의 후계자를 자기의 정체성으로 선택하다니. 그건 불운도 뭣도 아니고 그냥 얘가 그런 애여서 그렇다. 매정하고 편협한 견해라는 건 알겠는데 나는 엑스맨 1편에서부터 매그니토의 간지에 우와~하면서도 이 영감탱이의 잔인함과 편협함을 못본척 넘어갈 수 있었던 적이 한번도 없어서. (자기가 언제든지 희생할 작정이면 남을 희생시켜도 되나? 전형적인 독재자 논리. 그럼 네가 먼저 좀 죽어보지 그래?)
5. 엑퍼클에서는 에릭이 찰스에게 의지했던 것만큼 찰스는 에릭에게 '의지'했던 적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엑데퓨에서 그게 아니라고 정면 반박해주니 딱히 반론할 거리는 없음. 그냥 첫사랑이었나보다 한다. 우리가 늘 우리의 애정과 헌신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주는 건 아니지 않는가. 당장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조차도 거기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을 텐데. 물론 찰스가 에릭에게 배반당한 것에 통탄할 만큼 그를 사랑하고 의지했느냐고 물으면 난 할 말 없어지긴 하는데 엑데퓨에선 그렇다고 하시네요..... 암만 봐도 아닌 것 같은디......
6. 엑데퓨는 거대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정말 찰스의 얘기였고 그 사람이 전에 없이 '인간적'으로 묘사된 것도 사실이지만 난 이게 진짜 찰스 자비에라기보다는 자꾸만 찰스를 이해시키기 위해 입혀놓은 당의정 같아서 쩜쩜쩜.... 밴시의 죽음 앞에서도 복수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이 사람은 좀 싫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찰스 자비에란 인물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었던 지라 패스. 에릭놈은 사고치는 스케일이 너무 크고 이제 완전 매그니토가 되어버려서 정나미가 뚝 떨어진 반면 전쟁은 원하지 않지만 트라스크 놈은 죽이고야 말겠다는 레이븐/미스틱이 제일 정상인이라 ㅠㅠ 안쓰러웠음 ㅠㅠ 할 수만 있었다면 친구들이 죽었던 것과 똑같이 죽여주고 싶었을 텐데 ㅠㅠ 아예 몰랐으면 모르되 미래를 알게 된 이상 결과는 정해져있었던 거지만 2차를 찍고 보니 1차가 주로 찰스 위주 감상이었던 것에 비해 미스틱이 눈에 밟히더라.
7. 1차 감상에선 에릭도 레이븐도 서로에게서 찰스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에릭은 확실히 레이븐을 통해서 찰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하고 레이븐에게도 찰스를 미끼로 쓰는 게 보이는반면 레이븐은 꿈쩍도 하지 않아. -_-b 언니 멋져. 엑데퓨까지만 보면 레이븐은 확실히 에릭과도 찰스와도 함께 할 수 없다고 결정짓고 그대로 끝까지 밀고 나갈 것 같은 분위기. '아직도 찰스의 레이븐인가' 운운하며 레이븐을 꼬드기려고 했지만 흔들리기는 커녕 (뭐 찰스 얘기할때 조금 움찔한 것 같긴 해. 어디까지나 조건반사 수준으로 ㅋ) 존나 쿨하게 '당신에겐 충분하다는 게 없지'라고 받아치는 레이븐 짱. 거기에 진정으로 동요하는 에릭이놈 개꼬수웠음. 때리면 때리는 대로 다 맞고 있는 찰스도 짜증나지만 뺨 한대 맞으면 그 사람 사는 동네까지 찾아가 미사일을 쳐박아버리는 에릭 스타일도 레이븐에겐 감당이 안됐을 거임. 이로써 찰스에게 1차 차이고 레이븐에게 2차 차였음. 계속 차여라. 찰스에게 어째서 레이븐이 너에게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는 지 알겠다고 말한 지 반나절도 안지나서 찰스가 보는 앞에서 레이븐을 죽이려고 한 주제에.
8. 겉으로는 가도 가도 수라의 길을 걷고 있는 쪽은 에릭같아 보이지만 진짜 수라의 길을 가는 건 찰스 쪽이지. 이미 인간의 길이 아니야. 프로페서X는 허구헌날 우리가 정말로 인간보다 더 진화한 종족이라면 더 낫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설파하고 다니는 데 난 이것만큼 심각한 기망행위를 본 적 없음. 당신, 유전학자인 주제에. 더 진화됐다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뮤턴트가 인간에 비해 더 나을 것이 없고 그 반대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인간과 뮤턴트는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당신이 오로지 동족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 게다가 '더 나은 존재'임을 보여줘야 한다니,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더 나음'의 기준이라니. 그런 거 충족할 수 있는 존재가 뮤턴트든 아니든 당신말고 또 있을 것 같지 않은데;; 프로페서X는 진짜 종족의 레벨에서 판단할 수 없는 생명체인 게 걍 팩트인 것 같고. 아마 엑데퓨가 이 사람에게 감정이입 비스무리한 거라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엑스맨들이 고생이 많다 ㅠㅠ 진짜 1인 카리스마로 지탱되고 있는 조직은 브라더후드가 아니라 엑스맨인 것 같애. 매그니토는 어디까지나 브라더후드의 '수장'인데 자비에 교수는 말이 교수지, 걍 교주임. 2편의 파이로같은 애들 제외하면 다들 자비에경전무오류설같은 거 진지하게 믿을 거 같음.
9. 소올직히~ 엑퍼클 엔딩에서 너무 말짱했던 터라 엑데퓨 초반의 드라마틱하게 망가진 것도 좀 어라? 싶었지만 전쟁 나고 학생들 징집당하고 밴시 죽는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인간과 그들의 정부를 향해 뿜어냈을 증오와 분노를 모두 절망과 자기혐오로 환원시킨 게 엑데퓨 초반 찰스의 모습이라면 그냥저냥 납득은 간다. 하지만 난 그때조차도 그게 진짜 절망이라기보다는 좀 어리광처럼 보였음. 아니, 어리광은 다른 사람한테 부리는 거지. 일종의 슬럼프? 미래의 프로페서X를 만나자마자 갱생한 게 너무 급작스럽고 설득력 없었다는 의견을 보았는데 반쯤 동의하는 게, 내 눈에는 이 남자가 그렇게 격렬하게 로건에게 당신의 고통과 미래를 원하지 않는다고 절규했던 것치고는 미래의 자신에게서, 그것도 인간의 발명인 센티넬로 인해 뮤턴트 전체가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는 지경에서까지 한번 더 희망할 것을, 한번 더 믿어볼 것을 청하는 자기자신에게 실소 한번 흘리지 않았다는 게 마치 준비된 지도자(...)처럼 보여서. 결국 찰스는 자기가 후회하지 않을 거란 증거가 필요했던 것 뿐인 거 같애. 그렇잖아. 어차피 그것 말고 이 남자가 뭘 하겠어? 어차피 이 남자 선택지엔 희망과 믿음 말고는 다른 게 없어. 다른 걸 할 수가 없는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걸 계속 밀고 나가기엔 회의가 생기니까 약쟁이가 되서 널부러져 있었던 거지. 마치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먹고 살 재주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차라리 밖에 나가서 막노동이나 할까 싶지만 그래봤자 자기 깜냥에 병이나 얻어오지 그걸로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널부러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런 와중에 미래에서 난 아직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어라는 메세지가 온 거란 말이야. 그림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게 되었는지 말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냐. 그냥 살아서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결말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지. 이건 심지어 미래의 자신에게서 온 구원도 아니야. 상황은 최악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네가 계속 하던 대로 했으면 좋겠어라고 미래의 자신이 말했다니까. 이건 구원이라기보다는 컨닝페이퍼에 가깝지.
10. 에릭 이 색히.... 봐줄만한 거라고는 하드웨어 밖에 없는 자식이 어디서 그따위 넝마를 또 주워입고..... 그냥 넝마가 아니라 세심하게 수작업으로 갖다붙인 보호판과 비대칭망토 때문에 더 뿜겨.
바지만 있으면 정말 아무데서나 주워입었구나 하겠는데 뭔가 가공을 했다는 게.... 핸드메이드일거라는 게.... 이 색히 엑퍼클때부터 유니폼은 언제나 수작업 하니ㅠㅠ 행크존잘님은 똑같이 수작업해도 저거보다 훨씬 낫던데 너는 왜 그 꼴이냐. 기왕 쇼우를 계승해서 깽판칠거면 쇼우 옷센스도 같이 물려받았으면 오죽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이번 영화 디자이너 누구야! CG에다 예산 다 썼냐고 저게 뭐냐고 ㅠㅠ 미래쪽 유니폼 대충 다운그레이드해서 입혀도 저것보단 낫겠다며! 저 미묘한 삶은 바닷가재 색은 또 뭐야! 엉엉엉 ㅠㅠㅠ 진짜 엑퍼클 유니폼도 전대물 같다고 비웃는 사람들 있었는데 여기에 비하면 그건 오트쿠틔르 ㅠㅠㅠㅠ 찰스한테 히피풍 꽃무늬 셔츠를 입힌 거야 시대상이 그러하니 그냥 넘어가겠다만 사복만 입으면 간지가 초정리광천수처럼 솟구치는 애한테 연속 두 시리즈 내내 뭐하는 짓이냐고!
11. 미래에서 온 벤츠남 로건은 보면 볼수록 찰스를 위해 준비된 짝(...) 같음. 에릭은 말하자면 찰스의 프로페서X적 기질을 견디지 못하고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다면 로건은 프로페서X부터 만난 거니까. 지금의 찰스를 겨스님의 불완전하고 미숙한 버전으로 생각하면서도 또 그런 부분을 아껴줄 것 같단 말이지. 확실하게 감정소모 없이 보호자 포지션으로 눌러앉아준달까. 어차피 이 남자는 누가 곁에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하고 무슨 짓을 해도 결국 프로페서X가 돼. 찰스가 가지고 있던 약점이나 여린 면 같은 것이 길 가에 허물처럼 버려지는 게 아무리 안타까워도 이건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는 거나 마찬가지인 순리 수준의 일인지라 본인에게 그 안타까움을 되새기게 만드는 것조차도 별 의미가 없음. 그렇다면 처음부터 작정하고 내조자(...)를 구하는 게.....;; 엑스맨 시리즈에서부터 남들 다 파는 로건스콧은 안파고 스콧이 요새 교수님은 나보다 로건을 더 아끼시는 거 같애 라며 진한테 징징거리는 거나 망상했던 전적이 이렇게 꽃을 피우누나. (이때는 커플링보다는 뭔가 대인관계의 역학관계? 구조? 이런 게 더 흥미로웠던 듯. 지금도 좀 그런 게 있음) 하지만 이 다정한 벤츠남은 50년 뒤에나 돌아오고 교수님과 로건이 다시 만날 때 이 남자는 '그럼 당신 코드네임은 뭔데? 바퀴?' 이딴 소리나 하겠지 ㅋㅋㅋ큐ㅠㅠㅠㅠㅠ
12. 행크는 엑스맨의 알프레드인가. 뭐 못하는 게 없다...... 교수님. 행크한테 발모제도 만들어달라고 하세요.
1. 으아 다행이야 ㅠㅠ 통했어 ㅠㅠㅠ 싱어놈이 해냈다 ㅠㅠㅠ 싱어더러 놈놈하는 거 치고는 슈퍼맨 리턴즈도 잘 봤고 엑스맨 3도 그리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만 그래도 이제야 돌아와서 브랫 레트너와 폭스사가 깽판치고 간 엑스맨 3 수습해주는 너란 새끼 엑스맨 감독새끼 ㅠㅠ
2. 매튜 본도 나쁜 감독은 아니다만 이름값과 돈값의 차이가 이리 날 줄이야. 액션과 시나리오의 때깔이 다르네. 아직까지도 엑퍼클 각본을 좀 우습게 보고 있는 1인....
3. 에릭 랜셔 이 놈의 집나간 호로색...... 아 진정진정. 그래 이래야 에릭 랜셔지. 이 색히가 이러는 거 하루 이틀 일인가. 원래 이런 놈이었지. 이따구로 굴지 않으면 매그니토가 아니지. 레이븐이 왜 떠났는지 알겠다. 그걸 그나마 남아있던 여린 마음이라고 표현해도 좋고 인간적인 감정이라고 해도 상관없는데 정말 엑퍼클에서 쇼 죽이면서 다 떨궈냈나보다. 찰스 앞에서는 가끔 부드러운 얼굴을 하긴 해도 그런 걸 두고 우린 옛일을 추억한다고 하지. 로건과는 무려 구하러 와준 사람으로 처음 만났는데도 시종일관 사이가 나쁜데다 나중에는 손속이 잔인할 정도로 거침없어서 그냥 저 둘은 이념이니 진영이니 하기 전에 생겨먹기가 상성이 안맞는 구나 싶었다. 전마누라라도 딴놈이랑 붙어있으니 배알이 꼴리냐 이 싸가지바빔바야
4. 난 찰스가 어느 정도 망가져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직설적이고 극적으로 망가져있어서 재미있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게다가 여전히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자기최면인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있었다. 엑퍼클 마지막 장면도 그렇고 엑데퓨에서도 선생들이랑 학생들이 전쟁에 징집되기 전까지는 꽤 멀쩡하게 살았던 듯 한데? 새삼스레 에릭과 레이븐을 잃었던 것을 타락의 이유로 삼기엔 좀 적당해보이는 핑계를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흥미로운 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찰스 프란시스 이그재비어는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서 계시를 얻는다는 점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자기가 무엇이 될지 항상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패트릭 스튜어트가 연기한 자비에 교수는 세계 기성종교에 등장하는 모든 종류의 선지자와 성인들을 한 몸에 집약시켜놓은 것 같은 포스를 내뿜으며 과거의 자신조차 인도하는데 아 진짜 저런 사람과 저 사람의 인도나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닌 개인 대 개인으로서 관계맺기는 거의 불가능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죽기 직전까지 뻗대고 나돈건가 매그니토옹
5. 그리고 여전히 증오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만큼은 거부하는 찰스 자비에씨. 에릭은 어차피 제멋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고 있고 레이븐은 이미 치떨리게 깨달았는지 오빠를 사랑해도 아직까지는 '집'이라 불릴 만한 유일한 장소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는 듯 한데 그 둘은 그렇다쳐도 엑퍼클에서부터 함께 해왔던 애들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밴시도 실험당해 죽었다고 나오던데 찰스는 그렇게 자기 학생들을 잃고도 상실과 고통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릴 지언정 복수의 의지를 품을 생각만큼은 안했다는 거잖아. 어쩌면 이 사람은 증오의 힘으로 움직이는 걸 거부하는게 아니라 아예 그런 능력 자체가 없는 게 아닌가 싶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의 찰스 자비에였는데 그래봤자 여전히 찰스 자비에라서 저 사람을 개인 대 개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정말 사무치게.... 그래봤자 에릭놈은 전혀 안불쌍하고. 그래서 삐뚤어진 거 같기는 하더라. 어쨌거나 지 성질 다 부리고 사는데 멋모르고 당하는 엑스트라 호모 사피엔스들이 훨씬 불쌍함. 이건 내가 인간이라 하는 소리가 아니여.
6. 레이븐으로 호되게 겪었으니 진 그레이한테는 실패하지 않으려나. 울버린도 엑스맨 3에서 피닉스를 봉인하는 자비에 교수한테 그런 말 했던 것 같은데. 무슨 권리로 남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냐고. 솔직히 3편에서 피닉스가 자비에 교수를 아작내는 꼴을 보면서 저건 자업자득이네 싶었다. 남들 다 욕하는 브랫 레트너의 진짜인듯 가짜인듯 가짜같은 엑스맨 3에 내가 좀 관대한 이유는 남들은 캐릭터에서 벗어났다고 욕하는 몇몇 장면들이 내가 보기에는 그 캐릭터의 핵심을 잡은 장면 같아서다. 솔직히 통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걸로 퉁치기엔 너무 위험해보이자 그냥 정신억압해버리는 자비에 교수나 미스틱이 큐어맞고 인간이 되자마자 그 자리에서 내쳐버리는 매그니토는 엑데퓨 경험이 없다고 친다면 이 두 캐릭터가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에 고스란히 빠져있는 모습 그대로다. 아니다. 매그니토는 엑데퓨가 있건 말건 여전할거다. 영감탱이 내가 보기엔 딱 그런 놈이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껴도 그건 내 동족들에 대한 거라 이거지. 원래 매그니토가 그런 캐릭터 아닌가. 뮤턴트 레이시스트이자 파시스트. 미워하면서 닮아간 전형적인 인물. 그 동기나 심리의 구조가 찰스 자비에의 그것보단 훨씬 '인간적'이고 우리가 이해하기 쉬워서 그렇지 딱 거기까지가 한계인 캐릭터 맞는 거 같은데.
7. 에릭색히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드는 분들 로건찰스의 품으로 오세요~ 늙지 않는 짐승남서방이에요. 이런 설정 일부러 짜면 너무 구라에다 소망충족 판타지라고 욕먹을 거예요 (게다가 정신연령은 연하남. 진성연하남을 원하시면 자매품 행크찰스~) 엑데퓨 이후 바뀐 미래에서 로건이 1973년 이후 역사를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고 말할때 교수님 표정 정말 짠했다. 난 왜 이런 거에 약하지. 내가 가장 약하고 어리석었던 순간 나를 찾아와준 그 남자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교수님.
8. 엑퍼클을 찍을 당시에는 마이클 패스밴더가 한참 핫했고 요즘 대세는 누가 뭐래도 제니퍼 로렌스. 엑퍼클때도 사실 에찰케미에 가려져서 그렇지 스토리로만 보자면 미스틱의 성장기나 마찬가지였다. 엑데퓨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미스틱의 선택이 미래를 바꾼다. 에릭에게 제대로 한방 먹이기까지 한다. 다 같이 따라해봐 에릭 개객히 난 니가 다리도 못쓰는 찰스에게 철골조를 쏟아붓는 짓은 참을 수 있었어 하지만 미스틱을 죽이려했던 건 못참아 나는 엑퍼클의 미스틱이 찰스에게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었던 걸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찰스에게 미스틱은 아무리 소중해도 어디까지나 여동생이었고 (심지어 반쯤은 '딸'이기까지 했다. 어쭈구리 이 남자 봐라?) 행크는 미스틱과는 원하는 것이 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릭은.... 찰스는 미스틱이 에릭을 사랑해서 따라간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에릭이나 미스틱이나 서로에게서 찰스를 보는 거 같다. 미스틱 입장에서는 정확히는 찰스라기보다는 찰스의 역할을 에릭이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에릭은 그런 걸 해줄 색히가 아니었던가보다. 미스틱은 이미 한번 탯줄을 잘라본 경험이 있는 만큼 정말 새끈하게 에릭을 떠난 것 같다. 어찌나 유능한지 ㅠㅠ
9. 에릭이 펜타곤 지하감옥을 막 탈출하고 나서 찰스와 재회하는 순간의 케미스트리와 아이퍽킹은 이것이 그 유명한 '이혼 후 재결합'인가! 하고 설렜으나 아니었어......훌쩍 적어도 내 눈엔 디볼스 후 재결합이라기보다는 그냥 미루고 있던 이혼서류에 싸인하고 법원에 제출한 뒤 마음 정리하고 제 갈길 가는 걸로 보이더라. 암만 봐도 찰스는 마지막에 에릭이 스타디움까지 끌고 와 백악관에서 지랄할때 걍 다 내려놓은 것 같았음. 그래 저 자식은 저런 자식이지. 모든 분노와 원망이 사그라드는게 보이더라. 에릭 이 색히는 감정은 남은 거 같은데 다시 잘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듯. 그런 주제에 행크랑 로건은 보이는 족족 족치고 야이 색히야 로건은 그렇다쳐도 행크까지 ㅠㅠ 목졸렸던 원한이 아직까지 남았냐 ㅠㅠ
10. 근데 기존 엑스맨 시리즈랑 엑퍼클 이후 엑스맨 시리즈의 미스틱 캐릭터가 너무 달라서 이걸 수습할 생각이나 있나모르겠다. 사실 굳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일단 레베카 로미즌의 늘씬하고 날카롭고 분장으로 덮어씌운 상태에서도 조각같은 미모를 자랑했던 미스틱과 제니퍼 로렌스의 미스틱은 다른 사람인 게 맞는 거 같다. 실제로 제니퍼 로렌스의 이목구비는 분장을 해놓으면 좀 파묻히는 편이라고 생각해서 미스틱 파란분장 안하고서 맨얼굴을 드러냈을 때만 아우라가 못한 게 사실이다.
11. 안나 파퀸이랑 협의가 아예 안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엑스맨 1에서는 로그가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였는데 ㅠㅠ 로건이랑 케미도 좋았고. 이런 카메오식 출현 ㅠㅠ 잊지 말고 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냐 싱어ㅠㅠㅠㅠㅠ
12. 케네디 암살 떡밥을 이렇게 정리하다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래 누구나 케네디가 자기 편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긴 하지.
13. 헬파이어클럽 멤버들을 이렇게 처리해버릴 줄은 몰랐다. 아자젤이나 립타이드의 최후에 별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엠마 언니 ㅠㅠㅠㅠ
14. 특별출현 하보크는 귀국해서 집으로 안오고 어디로 갔니 ㅠㅠㅠㅠ
15. 티리온 라니스터 특별출현은 별 감흥 없었고.
16. 스트라이커 대령이 자기 아들 얘기할때마다 가슴이 금즉금즉했던 나 ㅠㅠㅠ
17. 아 맞다! 퀵실버! ㅋㅋㅋㅋㅋㅋㅋ 제일 귀여웠긔 그렇게 활약하고 그대로 사라지다니 슬펐어. 그 와중에 깨알같이 매그니토 아들이란 원설정 냄새는 풍겨주고 갔음. 어벤져스에 나오는 퀵실버랑은 전혀 다른 캐릭터라는데 얼마 안나와서 슬펐음. 하긴 계속 데리고 다녔다간 너무 캐사기캐라 이야기가 안될 지도 모르겠더라.
18. 에릭/찰스보다는 에릭찰스레이븐의 정확하게 화살표가 어디로 꽂히고 있는지 당사자들도 모르는 삼각관계가 재미있어서 본격적으로 호모질은 안할 듯. 이제까지 열심히 팔았던 거 치고는 로건찰스도 영화에 묘사된 것 이상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19. 휴 잭맨이 나온 다른 영화를 몇개 본 적이 없긴 한데 이 사람도 상대역이 남자든 여자든 케미가 잘 사는 타입같다. 케미의 왕 맥어보이랑 한 화면에 잡히니 딱히 성적 긴장감이 아닌데도 화면이 꽉 차는 느낌. 마초마초한 캐릭터인데도 남캐든 여캐든 엑스맨 시리즈 내내 울버린이랑 합이 안맞는 배역을 본 기억이 없다. 심지어 매그니토(올드 영 둘 다)랑도 사이가 나쁘면 나쁜 대로의 케미가 있다. 그에 반해 패스밴더는 캐릭터 소화력과는 별개로 상대배우랑 합이 항상 잘 맞는 거 같지는 않고. 그냥 매그니토 역이 잘하는 듯. 아무튼 이로써 휴 잭맨은 원작 코믹스 영화 시리즈 사상 최다 출현기록을 세웠다.
20. 반드시 전작들을 보고 가야할 영화. 안봐도 재미있어요란 말 별로 안믿는다. 유머는 물론 의미심장한 대사의 대부분을 이해못할 것임. 특히 울버린이 1973년으로 오자마자 힘 뙇 줬는데 아다만티움이 아니라 뼈가 나올때 그 미묘한 표정 내지는 금속탐지기에 걸리지 않을때 뭔가 서운해하는 듯한 표정 ㅋㅋㅋㅋ
21. 원작 코믹스에서는 울버린이 교수님을 '척'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는데 이걸 맨처음 듣고 좋아서 뒤집어졌던 경험이 있다. 자비에 교수가 맥어보이의 얼굴을 하고 나온 이후로 난 계속해서 누군가 교수님 버전이어도 좋고 찰스 버전이어도 좋으니 자비에 교수를 '찰리'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 근데 '척'은 '찰리'보다 더한 애칭으로 여자나 어린애, 특히 남자가 부인이나 애인을 부를때 쓰는 애칭이다. 응용수학 수사극을 표방한 희대의 형제애물 넘버스에서는 형 돈이 동생 찰리를 놀려먹을 때마다 이 애칭을 쓰는데 약올리려고 그렇게 부른다는 걸 알면서도 보는 내내 어찌나 근질근질하던지. 하지만 이 설정을 팬픽션이나 영화에 적용해볼 생각은 못했는데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하다.
22. 근데 말은 이렇게 해도 정작 로건찰스 파지는 않을 걸? 이 커플은 앵스트가 없잖아. 그렇다고 에릭찰스도 안쓸 것 같긴 한게 난 엑퍼클때도 에릭 랜셔라는 캐릭터의 매력과는 상관없이 그 남자의 머릿속이나 심리상태가 궁금하거나 흥미로웠던 적은 한번도 없어서.
23. 그러니까 영화적 완성도나 일반관객으로서 나의 미적 기준을 충족시켜주었다는 점과는 별도로 나의 동인적 리비도에 엑데퓨가 기여한 바는 동면해있던 찰스 자비에란 남자에 대한 나의 호기심과 애정을 다시 일깨워주었다는 것 정도? 대단히 인간적인 감정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데 껍질을 벗기고 보면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맥어보이는 이것과 유사한 캐릭터를 '듄'에서도 연기한 적이 있다. 맥어보이랑 상관없이 내가 이런 느낌이 드는 캐릭터에 졸라 잘 꽂히는 모양. 영화도 별로 잘 만든 영화가 아니고 현빈의 외모도 연기도 별로였지만 '역린'의 정조 캐릭터도 좀 그런 느낌이라 좋았음. 대단히 인간적인 감정을 품고 있고 그것을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출하지만 정작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마음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있는 지를 생각해보면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다는 느낌이랄까.
24. 어쩌면 그건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 특유의 비인간성일 수도 있고. 원래 꿈과 두려움은 진자의 진폭과 같은 것인데 찰스 자비에는 왠지 단 한번도 자기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두려워하거나 망설여본 적이 없을 것 같거든. 근데 이젠 아예 자기의 최종완성형과 만나보기까지 했으니. 행크가 말했던 강물의 표면을 어지럽히기만 할 뿐, 흐름을 바꾸지 못하는 조약돌 비유는 찰스의 미래에 더 잘 들어맞는다. 남자로서의 욕망도 있고 인간으로서의 좌절도 있지만 그 무엇도 그를 프로페서 X로 만드는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무척 재미있게 본 영화였지만 완성도적인 면에서 그다지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쇼우 패거리의 작당으로 쿠바 사태가 일어났다고 진지하게(설령 그것이 장르 내에서만 허용되는 얄팍한 진지함이었다고 해도) 믿기에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우주의 끝처럼 경이롭게 무한하지 않던가. 무엇보다 찰스와 에릭이 한 팀으로 지낸 시기가 너무 짧다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굳이 팬들은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엑스맨 3가 아니라도 엑스맨 1,2에서 보여지는 매그니토와 프로페서X의 관계는 이보다는 더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감정의 지층을 품고 있었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리부트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리부트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극 중에서 찰스와 에릭의 관계가 시작되고 끝나는 모습은 그다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그니토가 아닌 에릭 랜셔라는 캐릭터를 위한 프리퀼이었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 관심과 애정을 홀라당 가져간 건 더없이 완벽한 에릭 랜셔를 구현해내서 (연약함과 강함, 편협함과 애정, 지성과 잔인함이 실로 절묘한 비율로 뒤섞여있었다) 과연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에 빠진 주제에 더없이 근사하기 짝이 없었던) 뮤턴트 우월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 조직의 수장인 매그니토를 표현하는 건 오히려 걱정이 되는 마이클 패스밴더가 아니라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를 연기한 제임스 매커보이였다. 완성도 면에서 훨씬 높다고 평가하고 있는 엑스멘 지난 시리즈들에서 (완성도라기보다는 돈 들인 태가 팍팍 난다고 하는게 더 공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ㅋ) 내가 프로페서X에 대해 애정을 품은 적은 없으므로 이건 순전히 매커보이의 공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는 이 남자가 상대가 에릭이든 레이븐이든 가감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단 한번도 없어보였던 것이다. 진심이기는 했다. 그러나 진실은 아니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고 그 호기심은 곧 애정과 탐구심으로 발전했다. 온화함을 형상화한 것 같은 모습으로 평화를 말하지만 난 이 남자야말로 생애 단 한순간도 평화로웠던 적이 없었을 거라 믿는다. 그가 평화라고 믿는 것은 아마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보다는 구도자들의 평정에 가까울 것이고 그것이 마치 선택 가능한 옵션이나 되는 양 에릭에게 권유했을 때 이 남자는 분명히 오만했다. 더없이 선량하고 상냥하기에 도리어 더 오만한 그가 인간과 뮤턴트 사이의 평화와 공존을 이야기했을때 나는 위대한 거짓말쟁이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는 믿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믿으라고 종용하는 자의 얼굴은 아름다웠으나 신빙성은 없었다. 자기가 다루는 철처럼 완고하고 차가운 에릭은 처음 만난 순간 이후로 찰스 앞에서는 시종일관 녹기 시작하는 비누처럼 물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는 조금도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의 말은 나조차도 설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고 나는 이미 신념이라기보다는 강박이나 운명에 가까운 삶의 방식을 이해한다. 나는 언제나 희망을 믿지 않으면서도 계속 희망할 수 밖에 없는 자들에게 약했다. 보답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자들을 숭고하다고 생각해온 것처럼.
이 이야기에 왜 집착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에찰은 에찰인데 배경만 에찰이고 진짜 중요한 얘기는 오리지널 캐릭터들간에서'만' 일어나고 있잖아. 심지어 BL이라고 하기도 힘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얘기. 아마도 에릭, 아니 그보다는 찰스 자비에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 내가 보고 싶은 일면을 보기 위해서는 좀 더 색다른 필터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모양. 그 필터를 내가 만들어내야만 했던 건 원작에 대한 조예가 없는 영화팬의 얄팍한 지식풀 때문 ㅠㅠ 이런 거에 자괴감 느끼면서도 매커보이 얼굴을 하지 않은 찰스 자비에에게는 별 관심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음 ㅠㅠ
엠프렉 주의. 에찰 분량 mg 수준 주의. 오리지널 캐릭터 대주의
한번 결심하자 찰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쳐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평생의 친우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납치당해서 억지로 몸을 개조당하고 약물을 투여받은 뒤 지속적으로 강간당했다. 계절이 한번 바뀔때마다 그는 피를 쏟으며 혼절했고 그때마다 아이는 족족 유산되었다. 처음에는 혐오와 증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로 생살을 찢는 듯한 상실감에 몸을 떨었으나 4번째 태아를 잃은 후에는 모든 것이 무감각해졌다. '죽어버리자' 5번째 아이를 가졌을때 찰스는 결심했다. 어차피 이 아이도 죽을 것이다. 4번의 실패.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더이상은 무리라고 했지만 에릭은 포기하지 않았다. 허약해진 몸과 마음에서 비롯된 절망이 반, 나머지 반은 내가 죽은 후에 그토록 바라는 것을 얻고 흡족해할 너를 용서할 수 없다는 오기, 그 둘의 합으로 찰스는 아이와 함께 죽기를 결심했다. 아이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모체의 안전과 직결되어있는 것이라 에릭은 뮤턴트들로 구성된 의사군단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응급실로 실려가는 그 순간 외에는 찰스가 외부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찰스는 유산의 징조를 기다렸다. 희망과 기대를 버리자 참으로 역설적인 의미의 평화가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평화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5번째 아이는 유산되지 않았다. 그래서 찰스는 결국 9개월을 모두 채웠다. 정상적으로 태어날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던 지라 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를 놓쳤다. 수술실로 실려가는 내내 찰스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단 하나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이 아이를 어떡하지. 이 아이를 어쩌면 좋지.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단 한순간도 원한 적이 없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품에 안아드는 순간,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태어났을때 크게 한번 울고는 품에 안기자마자 색색 소리를 내며 잠이 든 아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찰스는 아이를 넘겨달라는 간호사의 요청에 이상하게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머뭇머뭇 아이를 넘겨주었다. 두번 다시 이 아이를 안아보지 못할 것만 같은 예감. 예감이 현실로 닥쳐온 것은 회복을 위해 병실로 돌아가던 길목에서였다. 분명 수술에 참여하지 않은 의료진임에도 불구하고 두건에 마스크까지 온 몸을 꽁꽁 싸맨 남자간호사 한 사람이 찰스의 이동침대를 밀고 있었다. 묘하게 낯이 익은 눈매다 싶어 바라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에릭이 아닌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친 건 3년만이었다.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자 그 익숙한 눈동자는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애써 명랑하게 윙크를 던졌다. 그제서야 찰스의 뇌리에 한 이름이 번개처럼 꽂혔다. '션...!' 찰스가 절규하고 방황하고 포기했던 그 시간동안 그의 아이들은 끈질기게 그의 흔적을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찰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치도 움직여지지 않았는데 션이 있고 알렉스가 있고 행크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갑작스러운 과부하로 열이 날 만큼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브라더후드의 수장 매그니토가 끌어모은 뮤턴트 의료진인 만큼 예상치 못한 공격능력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서 이쪽은 탈출을 위한 이동수단(비행기)를 운행하고 있을 행크까지 포함해도 겨우 셋. 오랫동안 약물로 정신능력을 억제당했던 찰스는 제 다리로 걷지도 못하는 만큼 짐일 뿐이다. 최적의 탈출 경로를 계산하는 찰스의 머리 한쪽 구석에서 봄날 아지렁이처럼 덧없는 상념하나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아이까지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겠구나...' 찰스의 계산과 션의 임기응변, 알렉스의 과격함과 그보다 한술 더 뜬 행크의 저돌적 추진력으로 찰스는 무사히 에릭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몸 속 장기 중 하나를 떼어놓고 나온 것 같은 상실감을 애써 무시하면서. 도망가는 내내 찰스는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16년 후.
데이빗 랜셔는 반푼이였다. 감히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브라더후드의 멤버들은 물론, 데이빗 자신까지도 그걸 알았다. 지적으로 모자라는 것은 아니다. 모자라기는 커녕 오히려 사고력과 이해력이 무척 높다. 육체적 능력은 매우 뛰어났고 외모는 그냥 평균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서운할 정도로 잘생겼다. 만약 그가 평범한 호모 사피엔스였다면 그가 자신을 반푼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자기 인생에 만족하며 사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격언을 입증하는 증거 정도로 생각하며 아무도 그의 고뇌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뮤턴트였고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뮤턴트 중 한 사람의 독자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는 많았다. 그는 물건을 움직일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의 텔레파시도 가능했다. 뼈가 드러난 상처도 그 자리에서 아물어버릴 만큼 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자가치유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모두 고만고만한 수준일 뿐이었다. 능력의 가짓수가 많다는 것이 오히려 조롱의 빌미가 되었다. 그보다 염동력이 강한 자도, 텔레파시 능력이 강한 자도, 더 강한 자가치유능력을 가진 자도 브라더후드엔 얼마든지 있었다. 인간사회와 마찬가지로 뮤턴트 사회도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개인의 이능이 중요시되는 만큼 계층구조는 더 가시적이고 고정적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데이빗을 괴롭힌 것은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그의 아버지, 매그니토 a.k.a 에릭 랜셔는 결코 그에게 '넌 그대로도 충분해. 누가 뭐라고 하든 넌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하나뿐인 아들이다.'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넌 아직 어려. 앞으로 네가 무엇이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단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들이 하는 말에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라고 말해줄 뿐이었다. 하지만 데이빗은 알고 있었다. 자녀들은 언제나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이 모습이 자신이 가닿을 수 있는 영역의 끝이라는 것을.
거기에 더해 데이빗은 자기 아버지과 그를 정점으로 하는 브라더후드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 시작은 흔한 사춘기적 반항심리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이빗은 내성적인 사람이 으례 그렇듯이 금방 외부자극에 반응하기 보다는 혼자서 오랫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편이었고 따라서 흔한 사춘기적 반항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그의 아이디어는 점점 뿌리를 박고 가지가 자라, 그라는 인격을 이루는 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그 선택지를 만든 사람이 자신의 또 다른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는 찰스 자비에가 자신을 '낳아준' 부친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원래 비밀은 둘이 나누어도 간직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그 많은 의료진들의 입을 일일이 다 막을 수는 없었다. 매그니토는 브라더후드의 수장이었지만 전제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두 번 다시 그의 왕비가 잠든 무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만들지 못하도록 건축가의 손을 잘라버린 무굴 제국의 황제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말에는 혼이 깃든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의의가 있다. 존재한 시간이 길어지면 길수록 말은 나중에는 그것을 발설한 입을 떠나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는다. 벽과 바닥, 지나가는 바람이 그가 자라는 내내 곁에서 속삭인 것처럼 데이빗 랜셔는 아주 어릴적부터 자신이 두 사람의 부친으로부터 태어났으며 그 중 한 사람인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매그니토의 오랜 숙적이자 단 하나뿐인 친구 (지금은 이 이름도 유명무실해진지 오래지만)의 몸을 빌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점이 데이빗 랜셔가 안고 있는 모든 고뇌와 고통이 태어난 자리이기도 하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두 뮤턴트의 아들이건만 정신계로서도, 물리계로서도 아무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극과 극으로 대립하는 두 사상 사이에서 그는 하필이면 도저히 동조할 수 없는 사상을 가진 부친 아래에서 자라났다. 결국 데이빗은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았을뿐 단 한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던 자신의 다른 부친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17살 생일이 막 지났을 때, 그리고 자신의 탄생이 에릭 랜셔의 일방적인 의지의 산물일뿐, 찰스 자비에에게서 진정어린 동의를 받은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도 데이빗은 크게 충격받지는 않았다. 찰스 자비에가 자신의 친부, 그것도 '낳아준' 부친이라는 독보적인 존재임을 알게 됐을때부터 데이빗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정말로 그랬구나 역시 나는 어디에서도 환영받기는 글렀구나 하는 씁쓸한 체념을 다시 확인받고 말았을 뿐이었다. 씁쓸하다는 것은 결국 살만 하다는 뜻이다. 먹고 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데이빗은 이미 '환영받지 못함'에 아주 익숙해진 상태였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에릭은 데이빗을 사랑했지만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들어준 적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에게서 데이빗은 어느 정도의 애정과 관심은 받았지만 환영만큼은 받은 적이 없었다. '사랑받지만 원해진 적은 없는 아이' 그것이 데이빗 랜셔의 정체성이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때까지 30분도 채 남지 않은 어느 서늘한 가을날 저녁, 자비에 영재학교에 한 소년이 찾아왔다. 16~18살쯤 되어보이는 소년은 또래에 비해서 한뼘 이상 키가 컸으며 조금 안쓰러워보일 정도로 말랐고 오랫동안 고생을 한듯 옷차림이 지저분하고 얼굴이 영 까칠했다. 그를 맨처음 발견한 것은 전투능력이 없는 7살짜리 꼬마 뮤턴트였다. 둘은 한참동안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는데 당황해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건 오히려 나이많은 소년쪽이었다.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아이쪽이었다. 'Hi. 내 이름은 조나단이야.' 'I'm....I'm David.' '우리 학교에 들어오려고?' 끄덕끄덕 '서머즈 선생님~!!!' 데이빗이 처음으로 만난 엑스맨 멤버이자 자비에 스쿨의 젊은 교사는 알렉스 서머즈의 동생인 스콧 서머즈였다. 바이저로 눈을 가리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이비리그 교정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소포모어같은 이미지의 젊은 청년이었다. 사실 선생보다는 아직 학생인 것이 더 어울리는 나이이긴 했다. 초라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스콧은 데이빗을 살갑게 맞이해주었다. 어쩌면 초라한 행색이었기 때문에 더 친절했을 것이다. 자비에 교수와 함께 스카웃 해오지 않고 제 발로 찾아오는 아이들의 50% 이상은 사춘기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각성과 그에 따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출한 아이들이었다. 입학원서의 빈 칸을 채우는데 데이빗 다음의 성(family name)을 쓰는 부분에서 한참동안 머뭇거리고 있자 스콧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데이빗, 쓰고 싶지 않다면 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 말에 한참동안 머릿속에서 그럴싸한 가명을 생각하고 있던 데이빗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적어내고 말았다. Cane. 앞으로 그의 이름은 데이빗 케인이 되었다. 그 네개밖에 안되는 알파벳을 꾹꾹 눌러쓰는 것만으로도 해방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년월일을 쓸때는 자신의 진짜 생일보다 하루 앞당겨서 썼다. 전세계에서 그날 태어난 아이가 단 하나뿐일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래야 마음이 편했다. 스콧은 데이빗에게 묵을 방과 갈아입을 트레이닝 복을 마련해주었다. 원래는 두 명이 함께 쓰는 방이었지만 인원이 모자라서 운좋게도 독방을 쓰는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수업 스케쥴표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교과서가 책상 위에 쌓아올려졌다. 유서깊은 맨션은 구조로 보아 기숙사 학교보다는 호텔에 더 잘 어울렸다. 뜨거운 물에 마지막으로 몸을 씻은 것이 3주 전이었음을 생각하며 방에 딸린 샤워실에서 팔자좋게 몸을 씻고 나온 데이빗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 갑갑한 성장환경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젖어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모양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꿈조차 꾸지 않고 잤다. 눈을 뜬 것은 새벽 4시때였다. 초저녁부터 잠들었으니 그 시간에 깬 것이다. 잠들었던 때와는 달리 침대 위에 바로 눕혀진 채 이불까지 덮어져있었다. 데이빗은 어린아이처럼 엎어진채 잠이 들어버린 모습을 다른 사람이 봤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었다. 그 모습을 본 이는 스콧이었다. 스톰, 진, 자비에 교수, 비스트, 알렉스, 션 모두에게 새 학생이 들어왔다고 말해놨는데 정작 저녁시간이 되어도 아이가 내려오질 않아서 찾으러 가보니 그대로 잠들어버린게 아닌가. '엄청 피곤했나보구나...' 그도 그럴 것이 행색부터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가, 히치하이킹을 했다가 결국엔 마구잡이로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는게 너무도 분명했으니까. 뭐, 그때만 해도 스콧뿐만 아니라 자비에 스쿨의 모두가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뮤턴트 어린양이 학교로 온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스콧이 다시 다이닝룸으로 내려와 'Poor Kid. 바로 잠들어버렸어. 식사도 안했는데 저대로 재워도 되나 몰라'라고 이야기했을때 다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긴 했지만 신입생 데이빗 케인에 대한 화제는 채 2분을 넘지 않았다.
데이빗 케인은 무척 잘생긴 미소년에 훤칠하니 키도 컸지만 이상하게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머리도 똑똑하고 모든 사람과 두루두루 잘 지냈는데 묘하게 존재감이 희미했다. 어쩌면 그게 데이빗이 환경에 적응한 방법인지도 몰랐다. 태어날때부터 눈에 띄면 무조건적으로 공격받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선 그는 매그니토의 외동아들이 아니라 그저 또 하나의 불우한 뮤턴트 키드일뿐이었다. 그의 내성적인 성격, 약간의 소심함과 수줍음은 그의 외향과 조금 어긋나서 갭모에라고 불리는 현상을 유발했다. 선생들은 어쩔 수 없이 영리하고 예의바른 아이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스톰, 진, 스콧, 알렉스, 션, 찰스, 행크 모두가 이 아이를 좋게 생각했다. 그 중 행크의 호의는 조금 특별했다. 행크는 데이빗과 자신이 닮은 점이 무척 많다고 느꼈다. 똑똑하지만 자신감이 부족하고 뮤턴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에 약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 그러했다. 거기에 더해 행크에게는 행크만의 이유가 있었다. 데이빗은 자비에 스쿨 학생들 중 유일하게 첫만남에도 행크를 보며 깜짝 놀라지 않은 학생이었다. 만약 행크가 자신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데이빗이 알았다면 그는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행크는 뮤턴트로서도, 과학자로서도 일류였다. 연구자로서도 전투원으로서도 이만한 전력이 없었다. 데이빗은 똑똑했지만 행크나 찰스같은 천재는 아니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두 가지 행동패턴을 보인다.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공격적이고 방어적으로 굴거나 아니면 다른 장점을 갈고 닦아 자신이 영 쓸모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거나. 데이빗의 친절함이나 선량함, 신중함 같은 특질들은 브라더후드에 있을 때에는 아무런 장점이 못되었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그가 사랑받기는 했지만 그들이 데이빗에게서 바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데이빗의 장점은 단 한번도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자비에 스쿨에선 사정이 달랐다. 데이빗보다 훨씬 실용성이 없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데이빗보다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콘트롤 면에서 미숙한 아이들은 사고나 칠 뿐이었다. 어차피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싸이클롭스나 스톰, 하보크와 같은 파괴력은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지형지물과 현대과학기술의 힘을 빌리면 데이빗의 고만고만한 능력은 얼마든지 치명적인 공격력이 될 수 있었고 그의 민첩한 몸놀림과 빠른 상황판단력은 그가 훌륭한 차기 엑스맨이 될 거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땅 속으로 스며드는 물처럼 데이빗은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자비에 스쿨의 일원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성취감을 맛보면서. 그리고 거기에는 찰스가 있었다. 데이빗은 그의 앞에 설때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찰스는 아이가 부모나 선생에게서 바랄 수 있는 모든 희망을 한 몸에 집약시켜놓은 것 같은 인물이었다. 물론 데이빗에겐 그에게 내가 당신의 아들이오 하고 나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가 얼어붙는 것은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찰스와 데이빗의 첫 만남은 아무것도 특이할 만한 점이 없는 평범한 만남이었다. 적어도 찰스에게는 그랬다. 처음 본 순간 혈연의 연결을 느꼈더라면 훨씬 드라마틱했겠지만 세상에 그런 일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까. 찰스에게 데이빗은 그저 그가 가르치는 많은 학생들 중 한 명이었고 이제는 부모를 떠나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어린 뮤턴트에 불과했다. 그 관계를 바꾼 것은 데이빗이었다. 데이빗은 딱히 붙임성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이 그를 찰스 곁으로 이끌었다. 열망은 너무나 컸지만 그의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때문에 이상하게 데이빗과 자주 마주친다는 것을 찰스가 깨달을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교장 선생님과 어린 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젊었을때보다도 훨씬 괴물같은 능력을 가지게 된 찰스는 내면의 의식이나 기억을 제외하고 표층의 감정만을 싹 훑어내듯 읽어내는 일도 할 수 있었는데 성장호르몬으로 부글부글 끓는 어린 학생들의 마음을 살피기 위해선 적당하게 거리를 두는 법을 알아두는 게 찰스 본인에게도 편했기 때문이었다. 찰스는 그 이유나 동기는 내버려둔채 찰스에게서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데이빗의 열망만을 수박 겉핥듯이 읽어냈다. 그 열망이 그와 그의 부친간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서 파생된 거란 점도 어렴풋이 읽어냈다. 데이빗이 알았더라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찰스는 늘 자기 앞에서 주춤주춤 물러나 숨는 아이들에게 '학생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파렴치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 누누히 말해왔으니까. 하지만 선생이 학생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보았는가. 찰스는 젊었을 적부터 선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인물이었다. 누군가 이런 이율배반을 지적한다면 감정폭발 한번으로 집을 통채로 날려버릴 수 있는 십대 청소년들을 통제하는게 말처럼 쉬운 일인 줄 아느냐고 도리어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찰스에게 데이빗처럼 얌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열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학생은 애정을 주지 않을 래야 않을 수 없는 존재였다.
자기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와 자신이 아들임을 고백할 용기가 없는 아들의 사이는 그래도 꾸준히 친밀해졌다. 엑스맨의 리더로서 대외활동에 바쁜 스콧 대신 교정내에서는 데이빗이 찰스를 보필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데이빗도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 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릭)는 자신을 계속 찾고 있을 것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펜실베니아 주를 히치하이킹과 도보로만 횡단했지만 일반인들 틈새로 숨어든 것도 아니고 역시나 같은 뮤턴트 커뮤니티인 자비에 스쿨로 온 이상 언젠가는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찰스와 함께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역사적, 사회적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시간 모두가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했다. 이 추억만을 안고서 브라더후드로 돌아가 예전같은 삶을 견디라 해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애틋함은 찰스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빗의 부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찰스는 이런 아들을 단지 뮤턴트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의 아비가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자기에게 원래부터 주어져있는 보물은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자신에게도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난 후 단 한번도 그리워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16년이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두번째 만남조차 없이 그저 한번 안아본 것으로 끝난 존재를 계속 그리워하기에는 16년이란 세월은 너무 길었다. 불연듯 자신이 두고 온 아들이 무사히 자랐다면 지금 곁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이 아이와 비슷한 나이대일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해도 그때의 시간은 암흑과 고통 뿐. 찰스는 실체도 불분명한 오래된 그리움 하나때문에 지금의 평온을 잃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 아이를 본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아이를 제대로 사랑해줄 자신이 있기는 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이대로 묻어둔채, 잊고 사는게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이 실로 고요하고 평온하지만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데이빗과 찰스, 둘 만의 시간이 와장창 소리도 요란하게 깨어진 것은 우습게도 브라더후드도 아니고 매그니토도 아닌 한 인간 여성의 등장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멜리사 필리폰드. 그 유명한 갑부 가문 밴더빌트와는 외가쪽으로 연결된 동부 명문가의 딸로 젊었을 적 찰스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적이 있었다. 둘을 묶어준 것은 반골기질이었다. 그러나 찰스는 기껏해야 뒤에서 호박씨나 까는 아이비리그 출신의 천재에 또 남자였고 (사회는 젊은 남성의 일탈에 훨씬 너그럽다) 멜리사는 대놓고 사건사고를 빵빵 터트려주는 히피 처녀였기에 사교계의 시선은 멜리사에게 더 가혹했다. 그리고 그때는 아직 젊다못해 어려서 많이 미숙했던 찰스에게는 그런 멜리사를 보듬어줄 만한 품이 없었다. 멜리사는 멜리사대로 자신을 온전히 열어보여주지 않는 찰스에게 질려버렸고 멜리사가 어떤 점때문에 화를 내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찰스는 변명조차 못하고 그녀를 떠나보냈다. 그런 그녀가 20년? 아니 정확히 22년만에 웨스트체스터 저택 현관문 앞에 나타났다. 아무런 사전연락도 없이. 가장 크게 혼비백산한 이는 행크였다. 스콧은 자신의 바이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이걸 벗고 그냥 선글라스처럼 생긴 보호경을 끼자니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이 이상해보이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한참동안 난리법석을 피운 뒤, 결국 스콧도 행크를 따라 지하의 연구실로 향했고 그 길에 학생 중에서 뮤테이션이 외향에 드러나는 애들까지 모조리 옆구리에 끼고 사라졌다. 문이 열리고 멜리사 필리폰드와 웬 젊은 청년 하나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집주인인 찰스가 손님을 맞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멜."
"찰리."
얼굴의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몸매는 처녀 시절처럼 날씬했다. 이것저것 매달고 꼬아서 늘어뜨렸던 보헤미안 스타일의 금발머리는 깔끔한 업스타일로, 찰스가 '꽃무늬 거적대기'라고 놀려댔던 히피 패션은 부띠끄 샵의 투피스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포옹을 하고 (찰스의 휠체어 때문에 모양이 좀 어색해지긴 했다) 유럽식으로 허공에다 키스를 보냈다.
"네게 소개할 사람이 있어.'
그러더니 아까부터 계속 흥미로운 눈으로 저택 안과 찰스 뒤쪽에서 완전 어색한 포즈로 굳어있는 스톰, 진, 알렉스, 밴시, 데이빗 일행을 훑어보고 있던 젊은 청년의 팔을 끌어당겼다. 스콧보다는 몇살 어렸지만 데이빗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키는 데이빗보다 작았다. 문득 알렉스는 저 기묘할 정도로 새파란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리, 엘리엇 그레이엄 하트넷 필리폰드. 내 아들이야."
찰스는 지나가는 풍문으로도 멜리사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청년의 성이 필리폰드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악수를 청하는 그 손을 마주 잡는 청년의 표정이 참으로 오묘했다. 멜리사가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엘리엇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선수를 쳤다.
"and also your son, sir."
약속이나 한 것처럼 스톰, 진, 밴시가 똑같은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동안 알렉스는 그 눈이 젊은 시절 찰스와 똑 닮아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리고는 자기 이마를 쳤다. 데이빗은 패닉했다.
패닉한 것은 데이빗만이 아니었다. 패닉의 정도만 따지자면 그 누구도 찰스를 따라올 수 없었을 것이다. 아들? 아들이라고?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상념의 종류와 형태를 본인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면서 엘리엇과 멜리사의 얼굴만 번갈아가며 보고 있는 찰스를 앞에 두고서 멜리사가 한숨을 쉬었다.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녀의 아들은 분명 이 순간의 집단패닉을 은근히 즐기고 있을 것이다. 이리저리 휘휘 둘러보던 멜리사가 말을 이었다.
"근데, 생각보다 평범하네? 난 좀 더... 실례, 파격적인 멤버들을 기대했는데."
이미 다 알고 온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계속 할 필요는 없었다. 멜리사는 멤버들 중 특이한 외모를 지닌 사람들을 볼때마다 상당히 놀랐지만 재빨리 사교적인 표정으로 돌아갔다. 지하실에서 줄줄이 비엔나 소세지처럼 나타나는 사람들과 모두 인사를 나눈 뒤에는,
"대체 이 밑에 뭘 만들어놓은 거야, 찰리?"
라고 내려가보려고까지 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부산스러운 멜리사를 예의바르게 저지하며 찰스가 물었다.
"멜, 대체 여긴 왜 온거야?"
"시설 개조는 얼마나 했어? 샤워실은 공용이라도 화장실은 개인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멜!"
"쯧쯧, 교장이 학부모한테 이래도 돼?"
"뭐?"
"너 왜 아까부터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
저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그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장선생님이라는 사실때문에 어린 학생들은 이 부분에서부터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씨, 내가 널 마지막으로 본 게 22년전이거든요? 이제와서 내가 왜 나타났다고 생각해? 양육비라도 청구하려고? 그리고 내 아들녀석이 다짜고짜 초면에 그런 핵폭탄부터 날리고 본 이유가 또 뭘 거 같애? 좋은 머리 뒀다 뭐에 쓰게? 모자걸이?"
그쯤되자 찰스가 머리를 쓰지 않아도 모두가 알게 되었다.
뮤턴트 신입생이다. 그것도 찰스 자비에의 아들.
가만 뜯어보면 엘리엇의 얼굴은 찰스의 얼굴에 약간의 변형만을 가한 복제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너무 색이 찬란하여 사람의 것인지 의심스러워질 때가 있는 그 눈이 그랬다. 하지만 찰스를 오랫동안 알아왔으면서 엘리엇을 처음 본 사람들은 도무지 이 부자가 닮았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어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색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다해도 엘리엇의 눈빛은 사람을 긴장시켰다. 찰스의 눈을 두고서는 이렇게나 강렬한 이질감을 느낀 이가 없었다. 엘리엇의 눈은 그의 아버지처럼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온도가 없는 광물의 아름다움이었다. 엘리엇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나 쉽게 웃는 청년의 미소를 달리 무엇이라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엘리엇은 반사작용처럼 맥락도 이유도 없이 웃었다. 보석은 딱히 차갑지는 않다. 차가운 곳에 둔다면 차가워지고 오래 쥐고 있다면 사람의 손에서 체온이 옮아가 따뜻해질 것이다. 그런 눈을 하고서 그렇게나 쉽게 웃는데 아무도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모두가 이 특이한 청년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찰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해주기 전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일단 아들임을 알고 나니 그와 찰스의 유사점이 속속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찰스에 대한 지극한 애정 덕분이었다. 모두가 엘리엇에게서 그들이 사랑하고 존경해마지 않는 '교수님'과의 유사성을 찾으러 혈안이 되었고 일단 찾기 시작하자,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밴시나 하보크, 비스트와 같은 오래된 멤버들에게는.... 그들은 자신만만함과 풍부한 유머감각으로 무장한채 사람들이 자기를 대할때 어쩔 수 없이 생성되어버리는 어색한 분위기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이 청년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약했기에 빼앗겼고 결국 다시 찾지 못한 '찰스 자비에'를 보았다. 그날 저들 곁으로 돌아와준 것은 그들의 멘토 '프로페서 X'였지, 그들의 친구이자 동료 뮤턴트였던 찰스는 아니었던 것이다.
엘리엇의 자신만만함은 사실 조금은 오만함에 가까웠다. 오만함과 자신감 중 무엇이 더 단단하여 깨지지 않는데 유리한지는 알 수 없다. 엘리엇은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백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복한 가문의 상속자였다. 어머니쪽의 혈연만으로도 이미 그러했다. 이제 찰스 자비에가 그를 정식으로 인지하기까지 한다면.... 이쯤되면 정식 혼인관계 없이 태어난 사생아라해도 상관없다. 도덕과 윤리가 뭐라고 떠들던 간에, 그는 자본과 사유재산제도가 존재하는 한 현대사회가 인정하는 진정한 특권계급이었다.
거기에 더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무관심한 모친과 계부 아래에서 자란 찰스와는 달리 엘리엇은 어머니 멜리사가 몇번이고 애인을 갈아치우는 와중에도 꿋꿋이 그녀가 가장 사랑한 남자의 왕좌를 지켰다. 그리고 어린 찰스가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동기들 틈에서 사회적 고립을 감수해가며 유전학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증명하는 내내 엘리엇은 유럽을 일주하는 어머니 곁에서 가정교사를 통해 학업을 마쳤다. 어떤 의미에서 엘리엇은 중류계급이 '귀족'에 대해 상상하는 모든 관념을 스펙트럼의 끝에서 끝까지 모두 충족시키고 있었다. 단점에 있어서도 그러했고 장점에 있어서는 거의 '이상의 구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계급적 이질성을 예의바르고 친근한 태도 이면에 감추고 있었던 찰스와는 달리 엘리엇은 펼친 지도처럼 자신을 사람들 앞에 늘어놓았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10분도 채 지나기 전에 상대방은 엘리엇 필리폰드라는 '인간'의 특징에 대해서 다 알게 되었다. 그는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으며 감정표현이 풍부했지만 정작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잘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비밀도 가식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심성없이 계급적 분노를 일으키는 언행을 흘리고 다니는 듯 보여도 정말로 진지한 공분의 대상이 될 만한 말과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패스트푸드 점에서 만든 치즈버거 같은 음식은 못먹겠다고 퇴짜를 놓으면서도 인종차별에 관해서는 조금의 흠도 남기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그런 문제가 화제로 떠오를때 그가 사용하는 어휘들은 외교관의 것인양 우회적이고 그 누구의 신경도 건드리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들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을 만난지 10분도 채 안된 사람 앞에서 전시하듯 늘어놓으면서도 그 당시에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못느끼게 만드는 것이 실로 경이스러울 지경이었다.
찰스는 이 아들을 한없이 낯설어했다. 아마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만났다해도 찰스에게는 부담스러운 타입이었을 것이다.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자유의지'라는 것을 정말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허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찰스에게는 그런 청소년같은 미숙함? 혹은 이상주의가 남아있었다. 엘리엇처럼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든 기준에 (진짜야 어쨌든) 자신을 철저하게 맞추고 또 그 과정을 전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물은 찰스에게 있어서 늘 경외와 혐오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곤 했다. 무엇보다 그런 철저한 사회화가 그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에 손톱만큼의 존중이나 동조도 없는 인물에 의해 완성되고 있을 때는 더더욱.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수는 있어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조금도 없고 그런 노력은 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찰스에게, 자신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이면서도 사회와 조금의 마찰도 일으키지 않고 살아온 엘리엇은 정말 낯선 존재였다. 뮤턴트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리해서 본다면 찰스와 문제를 일으킨 건 엘리엇 필리폰트의 뮤턴트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면모였던 것이다.
대부분이 중산층 이하의 출신으로, 부모나 가족으로 대표되는 사회와 격렬한 갈등을 겪고 난 뒤 자비에 스쿨에 오게 된 뮤턴트 학생들은 의외로 찰스만큼 엘리엇에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좋다 싫다라는 감정이 들지도 않을 만큼 이질적이었다. 이미 이질성으로 인해 사회에서 차별받아온 뮤턴트 아이들에게도 이런 정도라니, 찰스는 대체 자기 아들이 그동안 인간들 틈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멜리사는 태연하게 '아, 우리 아들이 좀 특이하긴 하지. 괴짜야. 당연하지, 네 아들인걸. 널 닮았겠지.'라고 말해서 찰스를 멘붕하게 만들었다. 멜리사의 이런 되도 않은 대범함은 그녀의 마음의 넓이를 말해준다기보다는 생각의 얄팍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찰스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엘리엇의 반응에 대해 말하보자면.... 그는 자신의 친부가 보이는 반응을 재미있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낯설어하고 어려워하는 찰스의 반응을 순수하게 재미있어했다. 데이빗은 도저히 그 신경줄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찰스가 자신에게 저런 반응을 보인다면.... 데이빗은 자신이라면 자살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린애는 어쩔 수 없는 어린애라서 자기가 '아버지'의 애정을 더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자 데이빗은 저절로 엘리엇에게 친절해졌다. 육체적으로야 데이빗이 조숙했지만 (키도 더 컸다. 심지어 에릭의 아들이 아니랄까봐 그의 얼굴만 보고서 데이빗을 17세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엘리엇은 20대 초반의 청년이고 데이빗은 십대후반의 소년이다. 데이빗의 서툰 친절함을 엘리엇이 맨처음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엘리엇은 그것이 자기에게 필요한지 안한지와 상관없이 공짜로 굴러떨어진 혜택을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데이빗의 우월감과 불안감이 미묘한 비율로 뒤섞인 친절함을 상냥하게 받아들였고 마음껏 향유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이빗은 실수를 했다. 평생 자아도취와는 인연이 없었던 데이빗이었지만 찰스를 닮아 선이 가늘고 부드럽고 몸집도 작은 이부(?)이복형제를 과소평가한데는 분명 육체적 우월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는 17세의 소년이었고 엘리엣에 대해서 말하자면.... 글쎄, 찰스 자비에 본인이 자신의 혈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 간에 그는 분명 찰스 자비에의 아들이었다.
데이빗이 엘리엇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는 데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엘리엇이 계획적으로 데이빗을 구워삶은 것이었는 지는 역시나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엘리엇은 이 덩치 크고 생김새만 근사했지, 순진해빠지고 마음 여린 이부이복(?)형제를 씹지도 않고 집어삼켰다. 과정만 살펴보자면 그것은 도시출신의 부유한 바람둥이가 순진한 시골처녀를 꼬여내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엘리엇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찰스의 아들이었다. 학교의 뮤턴트들은 그것으로 그의 모든 정체성이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는 그의 부친과 똑같이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텔레파스였다. (그에 더해 약간의 염동력도 쓸 수 있다고 테스트 결과에는 나왔지만 발현된 적이 없었고 그 수치도 텔레파시 능력에 비하면 별 의미가 없어서 행크를 비롯한 선생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분명 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돌이켜생각해보면 그 중 본인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 식이었다. 그러던 엘리엇이 어느 날 저녁, 데이빗에게 지나가는 듯 자기 외조부에 대해 언급했다.
"내 이름은 그 분의 돌아가신 형님에게서 따온 것이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프랑스 어딘가에서 전사하셨다는 군."
그러면서 그의 어머니가 아이를 지우지 않고 1970년대의 미국 상류사회에서 미혼모가 되기로 결심했을때 배가 부른 몸으로 외조부와 얼마나 격렬하게 언성을 높이며 싸웠는지를 말해주며 쿡쿡 웃었다.
"걱정하지 마, 데이빗.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것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니까."
"......엘리엇."
"그렇게 난리난리를 치던 할아버님도 결국엔 날 인정해주셨어."
그러고는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기다림은 내게 있어서 별로 힘든 일이 아니야."
엘리엇이 자비에 스쿨에서 받는 호감은 같은 뮤턴트에 대한 동지의식이라기보다는 매우 희귀한, 이국적인 품종의 동물을 보며 신기해하는 마음과 더 유사한 것이었지만 시작이야 어쨌든 관계는 절대 시작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찰스의 직계제자라고 할 수 있는 스콧과 진들은 여전히 엘리엇을 조금 데먼데먼하게 대했지만 어린 아이들은 엘리엇을 무척 좋아했다. 그들은 아직 엘리엇이라는 사람의 복잡성을 알아차리고 그 이면의 것을 상상할 만큼 사려깊지 못했다. 그는 쉽게 웃었고 늘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상표가 달려있지 않은 옷(모두 맞춤복이라는 뜻이다)을 입고서도 스스럼없이 아이들과 잔디밭과 진흙탕 위를 뒹굴었다. 어른이었지만 선생님들과 달리 잔소리가 많지 않았고 늘 등뒤로 몰래 달콤한 것을 주었다. 오히려 데이빗이 그러지 말라고 말릴 정도였으니 꽤나 무책임한 어른인 셈이었다.
데이빗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 수록 엘리엇 필리폰드라는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절대로 녹지 않을 얼음덩어리같은 것을 느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의 한결같은 상냥함과 온화함에 질질 끌려가듯 매료되었다. 엘리엇은 데이빗에게 여러가지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직접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데이빗 스스로 그에 대해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엘리엇은 찰스만큼이나 머리가 좋았다. 그는 6개 국어를 말할 줄 알았는데 그 중에는 스위스 바깥에서는 아무도 쓰지 않는 스위스 방언식 프랑스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에서 거주하던 당시 파리 1대학과 4대학을 오가며 2년만에 역사학과 문학, 미술사와 철학의 학사 학위를 모두 취득했다. 그런데 그 짓을 한번 하고 났더니 모든 흥미가 식어버렸다. 지도교수마다 박사과정까지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엘리엇은 애시당초 학문에 흥미가 있어서 대학에 간 것이 아니었다. 찰스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 어마어마한 학위들이 절로 굴러떨어지지는 않는다. 찰스에게는 학문적인 열정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그걸 위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따위는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결의도 있었다. 바로 그 부분이 엘리엇에게는 완전히 결여되어있었다. 엘리엇에게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의가 없었다. 하긴, 그쯤 모든 것을 타고 났다면 없을 만도 했다. 그런 엘리엇에게 딱 하나 남은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뮤턴트 능력이었다.
텔레파시만큼 사람을 성격파탄자로 만들기 딱 좋은 뮤턴트 능력이 따로 있을까. 하지만 진심이 어떠하든 간에 엘리엇의 사교기술은 완벽했다. 그의 정신에는 그 어떠한 흠결이나 불균형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텔레파시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찰스는 엘리엇이 안타깝지만 미스 그레이로는 부족하니 아버지께 직접 지도를 받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을때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찰스는 자기가 자기 친혈육을 전혀 믿을 수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숨과 함께 인정했다. 일단 자기와 똑닮은 얼굴에서 가실 날이 없는 부드러운 미소와 정말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잘도 나오는 '아버지(father)'소리가 거북하기 그지 없었다. 무엇보다 찰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척 잘 어울리기는 한다만 캐쥬얼한 면바지나 스웨터까지는 그렇다쳐도 정장 안에 입는 셔츠와 넥타이의 색이 파스텔톤이 아니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총천연색 뿐인 것은 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그의 머리카락은 찰스가 아닌 모친 멜리사를 닮아서 상아처럼 색이 옅은 금발이었다. 옷차림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타고난 머리색까지. 아무리 미래를 준비하는 뮤턴트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그 시대의 인간이다. 찰스 자비에도 어쩔 수 없는 20세기 초반의 미국 남자였다.
아버지와 아들로서는 멜리사가 없는 자리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찰스-엘리엇 부자에게는 제3자의 개입없이 단 둘이서만 같은 공간에 있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그런데 그걸 아버지와 아들로서가 아닌, 선생과 제자로 시작했으니 보편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 부자도 참 답이 없을 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답이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무리 여유롭게 웃고 있어도 엘리엇은 다른 텔레파스에 의해 자기 정신이 침범당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낯선 느낌에 엘리엇은 전심전력으로 방어를 했고 어지간하면 말로 하고 물러났을 찰스도 그 거센 저항에 당황하기도 하고 오기가 샘솟기도 하여 전력투구를 해버렸다. 이건 있던 답도 개박살냈을 시작이었다. 옆에서 보면 연령차를 제외하면 같은 틀 안에서 빚어져 나온 것처럼 닮은 두 남자가 자리에 앉은 채로 10여분 동안 서로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둘의 정신세계는 제 1,2차 세계대전을 합친 것만큼의 격전을 치루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혈연으로 이어진 희대의 두 텔레파스는 그 격전지를 만들기 위해 몇 십, 몇백겹의 표층세계를 만들어내어 자신의 진짜 기억과 인격을 보호해야 했다. 그 충돌의 격렬함과는 정 반대로 실로 텔레파스의 충돌 역사상 이처럼 우아하고 예의바른 퇴각이 있었을까 싶은 태도로 뒤로 물러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꼭 닮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무승부를 인정했다. 이곳은 찰스의 집무실이었기 때문에 일어서는 것은 엘리엇이었다. 그는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곧 호흡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흐트러진 금발을 슥슥 쓸어넘기는 손가락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찰스는 전혀 아버지답지 않은 감상을 품었다. 그는 승리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승리감은 길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나간 직후, 곧 닫히는 문틈 사이로 엘리엇이 말했다.
"다음번엔 체스로 해볼까요? 규칙이 있는 편이 낫겠군요."
지금의 찰스에게는 그립기에 더 싫고 아픈 기억 밖에 안되는 것을 끄집어내며 엘리엇은 뻔뻔하게 말했다. 신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늘 띠고 있던 미소가 없다는 것이 겨우 찰스를 위로했다.
"아버지의 능력을 모두 발휘해서 게임에 임해보신 적은 없잖습니까. 체조선수에게 한쪽 팔을 묶고서 균형을 잡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죠."
".....굳이 체스일 필요는 없잖니."
"'한계에 도전하라'"
"......."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찰스의 머릿속에서는 엘리엇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점점 잊혀져가고 있었다.
체스말이 오고 갈때마다 진정한 공격은 언어의 형태를 하고서 이루어졌다.
"Tell me about your sister."
"...네가 알만한 일은 없구나."
"말씀하기 싫으신 건가요, 제게 알려주기가 싫으신 건가요?"
엘리엇에게는 찰스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하는 별개의 뮤턴트능력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둘 다인 것 같구나. 무엇보다 네가 나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전 당신에 대해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
"......."
그 대답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양 단호했다.
"어머니는 늘 제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하셨죠. 아마 당신에 대해 알고 계셨던 모든 걸 제게 말씀해주셨을 겁니다. 저도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알고 계셨던 모든 것을 알고 있고요.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저는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만물에게 다 웃어줄 것 같았던 가식적인 미소가 지워진 얼굴은 의외로 얼음처럼 쨍한 박력이 있었다. 다시 그 위로 가면처럼 미소가 덧씌워졌을때 찰스는 그가 마음을 읽지 못하는, 세상에 단 둘 뿐인 사람 중 하나가 방금 제앞에서 진심을 보인 것임을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그 직접적인 적의가 찰스의 곤두선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그 애의 이름은 레이븐이란다. 난 그녀를 이 저택 부엌에서 처음 만났지."
엘리엇은 그 후 체스를 두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데이빗이 보기에 엘리엇은 감정기복이 꽤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걸 너무나 깔끔하게 갈무리해냈다. '저러면 보통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을까?' 데이빗은 자신의 본성에 대해 하나 깨달았다. 자신은 오지랖이 쩔었다.
엘리엇은 찰스는 자주 만났다. 그 만남은 철저하게 사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어디까지나 '특별수업'이었다. 엘리엇은 옛날 에릭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찰스와 체스를 두었고 알렉스와 션, 그리고 행크는 그 구도를 가벼이 보아 넘기지 못했다. 엘리엇은 자비에 스쿨 내 어느 누구에게도 찰스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다. 엘리엇은 마치 일부러 찰스를 상처입히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메스처럼 혀를 휘둘러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란 사람의 내면을 해부하고자 달려들었다. 스콧도 알렉스도 모두 학교일로 바쁜 가운데 데이빗만이 가끔 이 두 부자의 충돌을 목격했다. 데이빗은 찰스가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엘리엇은 부친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선민의식과 그 선민의식 아래에서 썩어들어가고 있는 깊은 자기혐오를 대놓고 비웃었다. 그러면 찰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가만히 있는 사람은 아주 많은 것을 비웃을 수 있게 된다며 점잖게 받아쳤다. 말투는 점잖기 그지 없었는데... 데이빗은 찰스의 저런 말을 면전에서 듣게 된다면 자기는 그 자리에서 저체온증으로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엘리엇도 만만치는 않았다. 자기혐오는 커녕 스스로를 의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던 이 엘리트 도련님은 자신의 모든 내적 갈등을 친아버지를 만날때까지 유예해온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말로도 싸웠고 체스로도 싸웠고 텔레파시 능력을 가지고도 싸웠다. 엘리엇은 찰스가 그의 어머니에게, 또 양부에게 가졌던 감정에 대해서 알고 싶다며 찰스의 머릿속을 뒤적거렸다. 찰스의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요령이 는 엘리엇은 결국 찰스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강탈하는데 성공했다. 찰스는 유치할 정도로 집요하게 역습하여 똑같은 나이 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빼내갔다. 정작 그렇게 빼내간 기억이 한때 멜리사가 사귀었던 이탈리아 출신의 백작나부랭이가 엘리엇을 성추행하려다가 실패했을 때의 것임을 깨닫고는 얼음처럼 굳어버렸지만. 엘리엇은 그저 아버지의 입을 순식간에 다물게 만들었다는데 의기양양해 했다. 찰스는 자기가 그런 분노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우습게도 엘리엇은 그 분노에 조금 감동했다. 점잖은 체 분노도 고뇌도 절망도 증오도 모두 6피트 땅 아래 감추고 성인군자인양 휠체어에 앉아있는 프로페서X보다는 이 사람이 훨씬 자기와 닮았다. 이쯤이면 자신의 기원일만 하다. 엘리엇은 찰스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
찰스 또한 엘리엇을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둘은 꼬일대로 꼬인 인간형이라는 점에서는 실로 흡사했다. 아무리 그 겉표면이 단단하고 흠하나 없이 매끄러워보여도 찰스 자비에란 인간은 직설적인 표리일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엘리엇은 에릭과 레이븐이 떠나며 찰스가 느꼈던 상실감과 원망을, 그 어떤 언어적/비언어적 표현도 필요없이 완전히 이해했다. 텔레파스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가지는 수준의, 매우 심층적인듯 보여도 결국엔 어쩔 수 없이 피상적일 수 밖에 없는 수준의 이해였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엘리엇은 세상 모든 일을 그 수준으로 이해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그 이상의 이해를 가져줄 만한 사람도 찰스의 인생에는 없었다. 그 얄팍한 이해와 공감을, 찰스는 감사하게 생각했다.
찰스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그의 아이를 낳아준 여성도 아니고 그의 아이도 아니었다. 아이러닉하게도 그 점은 엘리엇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곁에서 그의 수업을 통해 나날이 강력한 텔레파스로 성장해나가면서도 엘리엇에게 찰스가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매우 적었다. 평범한 아들이라면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 냉철하게 분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범한 아버지라면 자신의 아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며 기대려하지는 못할 것이다. 둘은 부자지간이기 전에 같은 텔레파스였고 다만 표출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무척이나 비슷한 유형의 내면을 가진 인간이었다. 절대로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그 점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이 부자 사이에 평화가 왔다.
이제 찰스의 휠체어는 데이빗이 아닌 엘리엇의 몫이 되었다. 데이빗은 찰스에게 학생이었지만 엘리엇은 아들, 아니 그 이상을 넘어선 존재였다. 그는 찰스 자비에가 될 수 있었으나 되지 못한, 혹은 되지 않은 무언가였다. 그 둘이 가질 수 있는 관계 중 가장 긍정적인 것은 친우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부정적인 관계를 상상해본다면... 그런 것은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적이 없었기에 그걸 부를 수 있는 이름도 없다. 그 애매모호한 관계의 핵심에 한 가지 사실만이 메카의 검은 암석처럼 버티고 있었다. 둘은 동류였다. 뮤턴트라는 카테고리 내에서도 텔레파스, 그 텔레파스라는 집단 내에서도 다시 한번 동일집단으로 묶일 수 있는 두 개인. 텔레파스에게는 텔레파스들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고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에에게는 자비에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연옥이 따로 있을 것인가. 찰스는 몇 주전까지는 세상에 엘리엇이라는 존재가 있었는지도 몰랐지만 자신과 그의 생물학적 아들이 그 연옥을 공유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을 두고 자비에의 지옥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찰스와 엘리엇의 지옥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찰스는 엘리엇에 대해 평범한 아버지라면 마땅히 느낄만한 보호욕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아들은 이미 거의 대부분이 완성되어서, 완벽하게 셋팅까지 마친 다이아몬드의 형태로 그에게 왔고 그가 할 수 있는 건은 그 광택이 먼지와 같은 이물질에 흐려지지 않게 열심히 닦아주는 정도였다. 사자새끼는 형제와 서로의 귀를 물어뜯고 손톱이 드러난 주먹을 주고 받으며 논다. 찰스가 자신의 텔레파시 능력을 그런 유희의 수단으로 시험했었다면 설령 그 상대방이 텔레파스라해도 정신적 과부하로 인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엇은 세상에서 찰스가 전심전력으로 공격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받아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엘리엇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빗은 홀로 남았다. 진짜 아들이 나타나자, 학생의 탈을 쓰고 정서적 만족감이나 느끼고 있던 유사아들은 설 곳이 없었다.
절망하거나 분노하여 사고를 치기에는 데이빗의 성품이 너무 견실했다. 데이빗은 자괴감과 질투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했지만 엘리엇에게도 찰스에게도 자비에 스쿨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괴로움을 드러내지 못했다. 우선은 그렇게까지 절절한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데이빗은 '그저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면 누구라도 상관없는 건가?'라고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엘리엇과 함께 하는 테니스 게임에 늦지 않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곤 했다. 또래의 청년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엘리엇은 굳이 나이차가 제법 나는 데이빗을 옆에 끼고 다녔다. 제3자가 보기에도 엘리엇이 데이빗을 특별하게 대하고 있음은 명백했다. 데이빗은 엘리엇의 성품을 미루어보아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만으로 '진심어린 우정'과 같은 달콤한 관계를 기대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향해 드러내는 친밀감에는 다른 사람을 대할때와는 명확하게 구별되는 밀도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기뻐하고 집착했다.
집착. 그의 아비에게로 가면 이만큼 두려운 말이 없건만 데이빗의 그것에는 어쩐지 순진함과 성실함마저 묻어났다. 새삼 찰스에 대한 애정과 숭배가 엘리엇에게로 방향을 전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나 강렬한 개성을 가진 사람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바로 곁에서,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타인으로 삼고 있으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모든 에너지가 그쪽으로 빨려들어간다. 마치 블랙홀처럼. 데이빗이 그의 형제에게 근친상간적인 애정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런 불건전한 감정을 품기엔 데이빗은 지나칠 정도로 견실한 청년이었다. 청년기의 찰스는 데이빗보다 훨씬 불건전한 인간이었으니 어쩌면 이런 성품은 지금에 와서는 믿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의 다른쪽 부친에게 받은 것이리라. 하지만 데이빗이 알고 있는 그의 부친의 모습은 하나뿐이었고 그가 지금의 모습이 되기 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 모습을 무엇보다도 간절하게 잊고 싶어했다. 데이빗은 그저 타인과 (그것이 친구이든 형제이든 급우이든 동료이든)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본 적이 처음이었다. 정말로 아직 20년을 채우지 못한 청소년의 삶에 있어 최초였다. 그 강렬함이란. 감정의 종류와 방향을 묻지 않고 오로지 강도로만 판단하자면 첫사랑과 같을 지경이었다. 그 극도로 순수하기에 오히려 불안정한 에너지. 그리고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기에 일상생활에서의 눈치는 둔한 찰스와는 달리 해답지를 바로 밑에 두고 문제를 푸는 것을 즐기는 학생처럼 사람들의 표정과 제스쳐를 유심히 관찰하여 살아온 엘리엇은 자신을 향한 그 열애와도 같은 에너지를 금방 캐치해냈다. 지금껏 엘리엇은 연애관계에 있어서는 가벼운 사람이었지만 결코 나쁜 남자계열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쁜 남자쪽이 진짜 본성이었다. 엘리엇은 우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뜨겁고 조밀하며 한 사람의 생을 결정지을 만큼 묵직한 데이빗의 애정을 받는 것을 즐겼다. 어째서인지는 본인도 잘 몰랐다. 하지만 자기가 데이빗을 꽤 좋아하는 것은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고 데이빗과 같은 사람에게서 이렇게나 진지한 애정을 받는다는 것도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엘리엇은 그의 사전에 '부담스러워하다'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녹인 납처럼 뜨겁고 무거우며 불안정한 마음의 반의 반도 돌려주지 못하고 돌려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것을 손바닥으로 받고는 즐거워했다. 그러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무정한 태도가 데이빗의 마음에 더 불을 지폈다. 데이빗은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확신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마음이 이미 거기에 가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데이빗은 엘리엇이란 별의 위성이 되어갔다. 하지만, 결국 지금의 지구를 만든 것은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