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갑자기 총알구멍이 너무 쓰기가 싫어졌다. 케이스픽이라고 그런 거라 생각하고 다운튼 애비 크리스마스 스페셜을 본 김에 시대극을 써보자 싶었다.
2. 굿와이프를 봤다. 굿와이프를 보다보니 법정물에 대한 나의 유구한 애정과 집착이 생각나 예전에 정줄 놓고 휘갈겨두었던 걸 손 좀 봐서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몇몇 분들이 나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이유로 그 괴발개발을 섹시한 스토리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걸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케이스픽인데 어째서 이건 써지는 걸까?! 문제는 케이스픽이 아니었던 걸까?!
3. 케이스픽이 원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헉 설마 내가 드디어 호모질이 신물이 난 것이란 말인가! 엑데퓨의 에릭찰스가 심드렁했던 것도 내가 에릭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호모가 싫어졌기 때문이란 말인가! 하지만 총알구멍 어디에 호모가 있다고?! 착한 아이에게만 보이는 호모도 아니고!
4. 결국 결론은 호모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셜록이 문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건현장과 물증이 있을 때 추리의 주체를 셜록으로 잡으면 셜록의 천재성을 위해서는 사건 현장에서 바로 어느 정도의 진상을 태권도 유단자가 송판을 일격에 격파하듯 일필휘지로 파악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진상을 다 알아버리면 케이스픽을 쓰는 이유가 없어진다. 따라서 현장에 바로 보이는 증거로부터 셜록이 알아낼 수 있는 부분과 알아낼 수 없는 부분을 구분하며 이야기를 진행해야 하는데 이게 그냥 케이스픽보다 두세배는 더 귀찮은 작업이었던 것이다. 결국 셜록과 케이스가 함께 등장하는 모든 시놉시스가 아웃. 나의 OTP은 셜존이라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주구장창 존+셜록 외 기타 인물만 쓰고 있다.
5. 그런데 요새 읽는 영문팬픽에서 씬이 나올라치면 그냥 넘어가는 것으로 보아 호모가 예전만큼 땡기지 않는 것도 사실인듯. 이게 다 3시즌 때문이다.
-1-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는 설립한 지 25년째인 중소로펌으로, 업계에서 전통적으로 명망있는 로펌이라 할 수 없었지만 최근 몇 가지 큰 사건들에서 연달아 승소하며 일반 대중들에게도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 ‘몇 가지 큰 사건들’은 모두 대기업과 정부, 군대 등을 상대로 한 것으로 그 중 실제로 승소판결을 받은 건은 2건에 불과했으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골리앗이 먼저 협상을 제의하여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화해를 이룬 점은 분명 주목받을 만한 일이었다. 실로 회사의 수준과 평가등급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만한 기회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목표는 - 그 목표를 추구한 사람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 좌절됐다. 우선, 창립 파트너인 그렉 레스트레이드가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개인적 불행이 겹친 탓에 그답지 않게도 신경쇠약증세를 보이며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고 둘째로 기명 파트너는 아니나 곧 그 자리에 오를 예정이었던 셜록 홈즈가 자신이 이때까지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에 기여한 모든 공적을 뒤로 하고 다른 로펌으로 이직했다. 갓 로스쿨을 졸업한 몰리 후퍼는 이런 시기에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에 채용되었다.
“몰리 후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근사한 회색 여성정장 차림의 흑인 여성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샐리 도노반, 형사사건팀 팀장이에요. 승선한 것을 환영해요.”
간단한 악수 뒤에 샐리 도노반은 ‘뛰지 않으면서도 남들보다 2배 속도로 움직이기’ 신공을 펼치며 몰리를 끌고 탕비실, 자료실, 회의실, 상담실 등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몰리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고 샐리 또한 그녀가 한번에 기억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존 왓슨은 기명 파트너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기명 파트너가 되리라고 기대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회사 내에서뿐만 아니라 업계 내에서, 심지어 라이벌 회사의 사람들에게도 널리 인정받고 호감과 호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 좋은 변호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입증했으며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를 사회적 평가를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었던 계기가 된 빅 케이스들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존, 잠깐 시간 있어요?”
“샐리, 어서 들어와요.”
“존, 몰리 후퍼를 소개할게요. 이번에 들어온 신입이에요. 몰리, 여기는 존 왓슨, 당신의 멘토이자 직속상관이에요.”
“승선을 축하해요, 몰리 후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미스터 왓슨.”
“John, please. 잠시 앉겠어요?”
“간단하게 하세요, 존. 참, 나중에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마사가 전해달랬어요.”
“알았어요. 이따 봐요, 샐리.”
존의 사무실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전망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존은 몰리에게 자리를 권했고 몰리는 존의 맞은 편에 엉거주춤 앉았다. 존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았고 정장과 구두에 익숙하지 않아 어설퍼보이는 그녀의 몸가짐에 주목했다.
“우선, 당신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 있군요. 고마워요, 몰리. 날 승진시켜줘서.”
“예?”
“15년동안 우리 회사에 의료과실소송담당 변호사는 나 혼자였거든요. 몰리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의료과실소송‘팀’이 꾸려졌고 나는 팀장이 됐지요.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어요?”
“.....예.”
“그런데도 우리 회사에 오고 싶어요?”
“물론입니다! 저, 전 언제나 여러분들이 하신 일을 존경해왔어요. 피터슨 vs 노버리 사건 때는 방청도 갔는 걸요. 전 스크랩북도....”
“그 ‘여러분들’이라는 건 정확히는 셜록 홈즈와 나머지를 의미하는 거겠죠?”
“아니예요! ....하지만 제가 그 분을 다른 분들보다 조금 더 존경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면 거짓말이겠죠.”
시무룩해진 몰리를 보는 존의 마음은 복잡하지도 심란하지도 않았다. 그 자신도 그 사실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유감이네요, 몰리. 셜록 홈즈는 빌어먹을 개자식에 전생의 업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고통의 근원같은 작자지만 내 편으로 두었을 땐 그보다 더 든든한 남자가 없었죠. 그 때문에 우리 회사에 지원한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제가 애들러 앤 모리어티에 채용될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혹시 그 회사 이름이 왜 애들러 앤 모리어티가 됐는 줄 알아요? 대부분의 자산은 모리어티측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글쎄요, 알파벳 순서?”
“동전던지기요. 제임스 모리어티가 동전던지기에서 지는 바람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간판에 자기 이름을 두 번째로 올리게 됐죠.”
“....진짜요?”
“당사자한테 들었어요. 자, 그럼 오늘 일정을 시작해볼까요?”
마사 루이즈 허드슨의 전문분야는 건물 및 토지 등 부동산 관련 분쟁으로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가 설립될 당시 대부분의 재정적 자원은 그녀가 축적한 자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재정적 자원이 그녀의 몫이었다면 인적 자원은 레스트레이드의 담당으로, 존 왓슨을 비롯하여 샐리 도노반, 최고이자 최악의 선택이었던 셜록 홈즈까지 모두 그가 끌어들인 인재였다. 그렉 레스트레이드가 공판정이라는 이름의 아레나에서 가장 빛나는 글래디에이터였다면 마사 허드슨은 이 회사가 조직으로서 굴러갈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었다. 소송전문 변호사들 특유의 화려함은 없을지언정 마사 허드슨이야말로 이 회사의 진짜 엔진이었다. 25년 동안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친구인 그렉은 병원에 드러누워있고 회사의 가장 큰 전력이자 귀중한 자산이었던 셜록 홈즈는 제대로 된 사직서나 통보, 인수인계조차 없이 다른 로펌으로 가버린 이 초유의 위기 앞에서도 마사 허드슨은 침착했다. 3명의 어시스턴트에게 동시에 명령을 내리면서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존 왓슨을 향해 ‘유후~’하는 특유의 인사를 건낼 정도로 말이다.
“어서 와, 존. 부탁할게 있어.”
“마사, 안돼요.”
“나야말로 안돼. 지금 샐리가 뭘 하고 있는 줄 알아? 이혼소송을 맡고 있다고. 그 샐리가 말이야. 헬하운드 도노반이 검찰이 아닌 바람난 남편 뒤를 쫓고 있다고. 자네에겐 안된다고 말할 권리가 없어.”
“마이크는 뭐하는데 샐리가 이혼소송을 해요?”
“그렉이 맡았던 일 중 3분의 1을 내가 하고 있어. 내가 하고 있던 세금 문제를 대신 맡아줄 사람이 마이크 밖에 더 있어? 자네 세법 알아?”
“랭데일은?!”
“나와 마찬가지로 그렉이 맡았던 일 중 3분의 1을 하고 있지. 남은 3분의 1은 빵부스러기처럼 이 회사의 모든 변호사들에게 골고루 뿌려질 예정이야. 지금 자네에게 가장 첫 번째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냉큼 받아.”
“저한텐 돌봐야할 뉴비도 있어요!”
“흥, 자네가 그렇게 caretaker여서 셜록이 회사를 나갔나 그래? 입다물고 일이나 해. The people vs. 맥팔레인 사건은 자네가 맡아.”
“형사사건이잖아요!”
“우리 회사가 가지고 있었던 최고의 형사전문변호사랑 자네가 같이 했던 사건이 얼마인데 이거 가지고 징징거리는 거야? 냉큼 나가서 일 안해?!”
맥팔레인이 기소된 범죄는 조너스 올데커에 대한 1급 살인이었다. 중범죄이니 만큼 구속영장신청이 받아들여져 현재 맥팔레인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는 절박하고 불안해했으며 특히 자신의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가 셜록 홈즈가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절망했다. 몰리 후퍼는 그런 의뢰인을 정서적으로 안정시키는 존 왓슨의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살인의 동기부터 방법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몰리는 이 남자가 진짜 무죄라면 이렇게까지 운이 없기도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눈 앞의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신뢰가 간다기보다는 너무 심약해보였던 탓이다. 그것도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유산상속을 목적으로 한 계획살인을? 돌아오는 길 내내 몰리는 맥팔레인이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또 했다.
“어떻게 생각해요?”
“예? 뭘요?”
“그가 무죄라고 생각해요?”
“...전 변호사는 그런 거 신경 안쓰는 줄 알았는데요.”
“세상에는 자기 의뢰인이 무죄라고 믿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변호사들이 있으니까. 내가 보기엔 몰리도 그런 타입인 거 같은데.”
“글쎄요, 살인을 저지를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처음에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해요. 어느 바보가 자신이 상속인으로 지정된 바로 다음날 피상속인을 살해하겠어요? 그것도 사고사나 자살로 꾸미지도 않고 살인임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방법으로 말이에요.”
“일종의 역발상일 수도 있죠. 진짜 동기는 숨겨져 있는 거고. 명확한 동기를 눈 앞에 펼쳐놓음으로써 검찰로 하여금 그를 계속 쫓도록 만드는 거예요. 진짜 동기를 찾았다고 생각한 검찰은 더 이상 수사를 진행시키는 대신 사건을 서둘러 기소하고 공판정에서 그 동기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변론하여 배심원들의 합리적인 의심을 사서 무죄판결을 받는 거죠. 그 뒤에 진짜 동기가 밝혀진다해도 일사부재리로 그는 영원히 자유죠.”
“하지만 그의 불안증세는 진짜처럼 보이던데요. 눈 밑에 늘어진 다크써클에다 항시 긴장되어있는 어깨와 팔하며... 진범이라도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음, 제가 너무 잘 속아넘어가는 걸까요.”
“몰리, 머리로 생각하려 하지 말아요. 당신 직감이 뭐라고 하나요?”
몰리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 존 맥팔레인씨가 무죄라고 믿어요. 아니, 생각해요. 아니, 그런 것 같아요...”
“좋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정말요?”
“검찰은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어요. 살인의 동기도 있고 증인도 있고 범행도구도 있고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피의자의 피묻은 지문도 있지요. 그에 반해 우리 불쌍한 의뢰인에게는 제대로 된 알리바이조차 없어요. 이 정도면 가히 슬램덩크라고 부를 만 한데, 실제 형사사건에 이런 슬램덩크가 얼마나 되는 줄 알아요?”
“얼마나 되는 데요?”
“없어요.”
“.........”
“게다가 피해자가 마음에 걸려요.”
“피해자가요?”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연고없는 청년에게 자기 전재산을 물려주겠다고 결심했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가장 먼저 할 일이 뭐겠어요? 자기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상담을 하겠죠. 하지만 조너스 올데커는 그냥 맥팔레인에게 찾아가서 다짜고짜 수기로 적은 자기 유언장을 내밀었어요. 그리고 그날 바로 맥팔레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서류들을 보여줬고요. 마지막 살인이란 클라이맥스를 맞이할 때까지 모든 사건의 진행이 피해자의 주도 하에 이뤄지고 있단 말이죠. 난 이게 정말정말 수상해요.”
“....거기까지 생각해놓으시곤 저한테는 직감이 어쩌고 저쩌고 하셨단 말이죠.”
존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직감이 좋은 사람이랑 일하는 게 좋거든요.”
존과 몰리가 회사로 돌아왔을 때, 존의 비서는 그에게 사무실에 그의 영원한 ‘페르소나 논 그라타’가 와있다는 것을 알렸다. 잔머리 하나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헤어, 강한 골격의 아름다운 얼굴, 피처럼 붉은 입술, 크림색 블라우스와 길게 슬릿이 들어간 베르사체 스커트. 루부탕의 스틸레토 힐.
“Good afternoon, 존, 기다리고 있었어요.”
“미스 애들러. 반갑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군요. 몰리, 인사해요. 이쪽은 아이린 애들러, 우리 회사한테 연달아 세 번 진 애들러 앤 모리어티의 기명 파트너이자 동전던지기의 승자, 셜록 홈즈의 새 보스죠. 미스 애들러, 여기는 몰리 후퍼, 신입변호사이자 내 ‘새’ 동료입니다.”
‘동료’라는 말에 시선이 좀 더 오랫동안 머무는 것 같았지만 몰리 후퍼는 아이린 애들러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 순진하고 연약해보였다.
“정확히는 한번 패소에 두 번의 조정합의죠.”
“우리 편에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결정된 조정합의 말씀이군요.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제 초라한 사무실에 발걸음을 한 건가요? 셜록은 이미 그쪽에 있는데.”
“미스 후퍼, 잠시 자리를 좀 비켜주시겠어요?”
“왜요? 그녀가 들으면 안되는 얘기라도?”
“좀 개인적인 일이기는 하죠.”
“정말 흥미로운 일이겠군요. 이런 걸 혼자 듣다니 미안해서라도 보내면 안될 것 같은데요. 몰리, 여기 앉아요.”
몰리는 냉큼 앉았다.
“....셜록이 쉽지 않을 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댁이 해야 했을 일을 안했던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닐텐데요. 그 역은 더더욱 그렇고.”
“오? 그건 내가 셜록을 스카웃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인가요?”
“정반대네요. 해야 할 일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꼭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당신 둘은 아무 잘 맞는 커플이 될 겁니다. 화환이라도 보낼까요?”
“존.”
여성스럽고 울림이 풍부한 목소리가 단호하게 그의 이름을 말했다. 존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았다.
“우리 회사로 와요. 그렉은 무너졌어요. 벌써 소문이 나고 있어요. 죽을 작정이 아니면 6개월 이내에 업무에 복귀하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의사가 그랬다면서요? 이 업계에서 6개월의 공백은 치명적이에요. 마사 허드슨은 훌륭한 관리자죠. 하지만 이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저 훌륭한 관리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스타가 필요하죠.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스타였어요. 지금 그는 떨어졌고 당신네 회사에서 가장 크고 환하게 빛나던 다른 별은 내 손안에 있죠.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는 지금 판도라의 상자나 마찬가지예요. ‘희망’말고는 남은 게 없어요.”
하지만 그 말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셜록이나 당신같은 사람들에게 나는 꽤 느리고 둔한 인간이죠. 하지만 반복은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학습법이라, 당신과 여러번 마주치다보니 나도 알게 된 게 좀 있어요. 당신은 자기가 불리할 때 가장 당당하게 굴거든. 무슨 일이죠? 알고 보니 셜록은 도저히 목줄이 채워지지 않고 당신은 당신이 생각한 만큼 유능한 핸들러가 아니던가요?”
몰리는 지금 저 표정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만큼만 아이린 애들러에 대해서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존, 애원하게 만들지 말아요. 어쩌면 다음번에는 애원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어요.”
“셜록도 자주 언급했던 건데, 나한테는 약점이 있어요. 여자에 대해서, 특히 아름다운 여성에 대해서는 종종 잘못된 판단을 하죠. 그리고 미스 애들러, 당신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론의 여지없이 내 눈길이 닿아보았던 중에 손꼽히게 아름답죠. 그래서 말인데, 내 사무실에 당신이 찾아와 앉아있는 모습을 보는 건 내 눈과 마음에 꽤 큰 즐거움을 준답니다. 아마 내가 당신네 회사로 가게 되면 그럴 일이 별로 없겠죠? 더 자주 다녀가요. Do please me.”
정적이 흘렀다. 눈싸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뚫어져라 상대를 바라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아이린 애들러였다. 시선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고개만 돌려 존을 바라보며 아이린 애들러는 입에 문 쓴 약을 뱉듯이 말했다.
“정말이지, 당신은 칭찬을 모욕의 수단으로 쓰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요.”
“칭찬 고마워요. 지금 입고 있는 치마가 마음에 드네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당신 허벅지지만.”
만약 사무실 문이 유리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쾅 소리가 나게 닫았을 것이다.
“그녀가 홈즈씨를 데려간 건가요?”
“몰리, 누가 들으면 애들러가 어린애나 금치산자를 유괴해간 줄 알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마치 자기 때문에 셜록 홈즈가 이직한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그 수법에 넘어가지 말아요. 저 여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여서 지금 그 자리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인 인물이니까. 셜록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해요. 어디에 있든 누구랑 있든 마찬가지죠. 만약 내가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의 기명 파트너였다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손이 발이 되도록 셜록 홈즈의 기미를 맞추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다행히도 난 기명 파트너가 아니죠. 자기 흥미를 끌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라도 맡지 않았던 건 여기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딜가나 셜록 홈즈가 셜록 홈즈일 뿐이라면, 그의 급료수표에 서명된 이름이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건 애들러 앤 모리어티건 무슨 상관인가요.”
“.....어째서 말리지 않았어요?”
“무엇을?”
“홈즈씨가 떠나는 걸요.”
존은 허탈한 듯 웃었다.
“난 그를 말릴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어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두 분은 친구였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죠. 근데 내가 결혼을 하자...”
“.....”
“그가 말하길, 내가 자기 마음을 아프게 했다더군요.”
‘이런, 젠장.’ 몰리는 생각했다. ‘여기까지 알 필요는 없었는데.’
-2-
검찰 측에서 넘겨준 검시보고서와 경찰의 수사보고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몰리는 자신의 의뢰인이 무죄임을 넘어서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는 확신이 섰다.
“이건 말도 안돼요!”
“불행히도 대배심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피해자 시신이 이빨은 다 뽑히고 손가락은 잘리고 뼛속까지 바삭바삭하게 탄 채로 발견되었는데 어쩌다보니 그 옆에 피해자 소유의 지팡이와 반지, 맞춤복의 단추가 놓여져있길래 가정부가 신원을 확인해주었다고요? 피해자의 신원을 은닉하기 위해 그 고생을 하고 불까지 질렀는데 정작 시신은 저택 뒤의 목재야적장에다 버려요? 상속재산을 노린거면 피해자 신원은 왜 감추려고 하고 실종으로 사망을 인정받을 거면 시신을 최소한 한술 더 떠서 유산을 노리고 살해했는데 정작 피해자의 재산을 살펴보니 대부분은 이미 옛날에 현금화되어서 소위 공동경영자라는 코넬리우스 로저의 계좌로 이전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계좌는 케이먼 섬에서 개설되었네요. 피고인에게 돌아오는 건 기껏해야 낡아빠진 저택과 목재야적장 뿐인데 그 중 목재야적장은 재미있게도 시신이 발견된 장소로 시신과 함께 전소된 곳이기도 하죠. 존 맥팔레인은 회계사예요! 그 사람이 돈 때문에 피상속인을 죽이기도 마음 먹었다면 최소한 범행 전에 자기 몫으로 떨어질 돈이 어느 정도일지 계산은 해보지 않았을 까요? 무엇보다 최소한 자기가 상속인으로 지정된 바로 그날, 그것도 처음으로 피해자의 저택을 방문한 바로 그 날 범행을 저질렀다고요? 검찰은 정말 진지하게 아무런 전과도 없고 폭력적인 습성도 없는 사람이 아무런 재정적 문제에 처해있는 것도 아닌데 기껏해야 65만 달러 짜리 부동산을 상속받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고 믿는 건가요? 그것도 이 불경기에?!”
“논쟁적이긴 하지만 말이 안되는 건 아니죠. 범행 자체는 우발적일 수도 있는 거고.”
“oh, come on! 상속재산을 노린 계획범죄인 동시에 우발적 범행일 수는 없어요! 제정신이 박힌 배심원이라면 아무도 피고인이 진범이라고는 믿지 않을 걸요!”
“하지만 배심원은 특정인에게 책임을 지우기를 좋아하죠. 살인 사건 같은 경우엔 자기 눈 앞에 있는 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하구요. 단순히 말이 안된다는 것만으로는 무죄판결을 받는데 충분하지 못해요. 우린 시나리오를 완성해야 해요.”
“좋아요. 그럼 우리 전략은 뭐예요?”
“우선은,”
존은 보고 있던 서류를 덮었다.
“중국 음식이요.”
어느 새내기 변호사가 그렇지 않겠느냐만은 몰리 후퍼는 자기 의뢰인이 무죄라고 생각하자 마치 불도저같은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존은 자신이 피고인측 변호인에게 요구되는 능수능란함으로 엔터테인먼트를 기대하는 배심원들의 은밀한 욕망은 충족시켜주고 딱 봐도 순진한 열정으로 가득한 몰리와 존 맥팔레인의 심약하고 무해해보이는 인상으로 배심원의 양심을 자극시킨 뒤 ‘합리적 의심’이란 카드를 깃발처럼 흔들면 무죄판결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검찰에서 제시한 유죄협상을 거절했다.
그리고 제1차 공판이 끝났다. 제3자의 눈에 분명 한 팀인 것처럼 보이는 두 변호사가 넋을 빼고 법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은 꽤 한심해보였을 것이다.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존.”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다구요.”
“검찰 측에서 치사하게 나온 거잖아요.”
“그래도 난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하지만 의심을 품기엔 난 너무 오만했죠. 아마도 셜록과 함께 붙어다니면서 검찰을 얼간이로 취급하는데 익숙해져있었나봐요. 한심하죠. 다른 사람의 능력으로 위세를 부리다가 망하는 꼴이라니.”
검찰은 처음부터 살해동기를 금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검찰이 보기에 이것은 치정사건이었다. 다만 치정과 살인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찰은 피고인의 모친인 주디스 맥팔레인을 적대적 증인으로 신청하여 피고인의 아버지인 헥터 맥팔레인과 그녀, 조너스 올데커가 얽혀있는 케케묵은 과거의 앙금을 들추어냈다. 원래 어머니란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터라 증인으로서의 신빙성이 가장 떨어진다. 존은 피고인의 어머니를 불러내어 자기 아들이 얼마나 정직하고 선량하며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아이인지를 증언하게 하는 신파극으로 배심원들을 지겹게 만들 생각이 없었기에 피고인의 성격에 대해 증언해줄 사람도, 피고인이 재정적으로 살인을 무릅쓸 만큼 곤란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언해줄 사람도 모두 피고인의 직장동료 중에서 골랐다. 다행히고 존 맥팔레인은 그 흔한 카드빚 하나 없었고 상사와 동료를 가리지 않고 평판도 좋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검찰의 공격 앞에서 무용했다.
“맥팔레인 부인, 부군이신 헥터 맥팔레인씨는 5년전 간암으로 세인즈 버로우즈 병원에서 사망하셨습니다. 맞습니까?”
“이의있습니다. 본 사건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지요?”
“피고인의 동기과 직결됩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시면 곧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서두르세요, 미스터 그렉슨.”
몰리는 이의를 제기 후 다시 자리에 앉는 존의 앞에 놓인 노란 노트패드에다 커다랗게 물음표를 그렸다. 존은 그 밑에다가 me too라고 적었다.
“고(故) 헥터 맥팔레인씨가 세인즈 버로우즈 병원 중환자실에서 임종할 당시 그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은 증인이 아니었죠?”
“이의있습니다, 재판장님.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관련성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곧 드러날 겁니다.”
“그렉슨씨, 좀 더 서두르세요. 증인은 질문에 대답해주십시요.”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입니다.”
“3일 동안이나요? 사실 증인은 고인의 하나뿐인 아들인 피고인에게도 부친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연락하지 않았죠. 그가 CPA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죠.”
“이의있습니다, 재판장님. 지금 증언하는 사람이 증인입니까, 그렉슨 씨입니까?”
“그럼 고쳐서 질문하겠습니다. 증인이 피고인에게 아버지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맥팔레인씨가 피해자인 조너스 올데커와 불륜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입니까?”
온 재판장이 술렁거렸다.
“이의있습니다! 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증인은 아닙니다! 그렉슨씨는 지금 증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재판장님! 이건 직접적으로 피고인의 살해동기와 관련된 사항입니다! 맥팔레인 부인은 분명히 피해자인 조너스 올데커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고 그녀의 아들에게는 막강한 정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비록 피고인이 피해자에 대해 품은 원한이 직접적인 것은 아니라고는 하나....”
“Give me a break! 전도유망한 장래를 가진 32살의 전문직 청년이 홀어머니에게 정신적으로 억압당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이곳은 메사추세츠의 법정이지 히치콕 영화가 아닙니다!”
“Well, he still lives with his mother!”
“Are you serious?! 정말 이렇게 나오기냐? 그럼 28살까지 삼촌이랑 같이 산 넌 뭔데? 게이 근친상간자?”
“재판장님!”
“미스터 왓슨! 미스터 그렉슨! 여긴 법정이고 두 사람은 검사와 변호인이요! 직분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세요!”
백짓장보다도 하얗게 질린 존 맥팔레인과 명백하게 동요한 배심원을 번갈아보며 어쩔 줄 몰라하던 몰리는 연달아 내리쳐지는 재판봉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뭔가 사인을 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존을 발견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건 거의 조건반사 수준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한 5초 정도의 시간을 허비했다.
“재판장님. May I approach?”
“부디, Ms. hooper. 환영합니다.”
판사석 앞으로 세 명의 카운슬러가 옹기종기 모였다. 몰리는 중간에 가끔 더듬기도 하고 목소리를 떨기도 했으나 말이 길어질수록 침착함이 돌아왔고 12년간 District attorney직을 수행하고 있는 토마스 그렉슨에 맞서 팽팽하게 싸웠다.
“하지만 재판장님. 저희는 모든 증거자료를 피고인 측에 제출했습니다. 맥팔레인 부인을 조사한 형사의 수사보고서는 물론 맥팔레인 부인의 이름도 증인신청목록에도 올라와있구요. 피고인 측의 부주의와 무능력함을 저희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재판장님, 검찰의 행위는 전형적인 ‘매복’입니다. 공소장에 기재된 범행동기는 명백하게 상속재산에 대한 것이었고 저희 의뢰인인 맥팔레인씨가 첫 번째로 수사선상에 오른 것도 바로 그 동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동기의 설득력이 약해지자 경찰은 다른 용의자를 고려해보는 대신 저희 의뢰인에게 들어맞는 동기를 찾아낸 것입니다.‘
“신참 변호인이라 미스 후퍼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범행동기는 공소사실이 아니라 단순한 공격방어방법에 불과합니다.”
“미스터 그렉슨, 좀 더 열심히 공부하셨어야죠. (You should‘ve researched harder.)”
흐뭇한 시선으로 몰리를 바라보고 있던 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몰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The People vs Osmand. 범행동기는 공소사실을 특정함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소장에 기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기재한 이상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선례가 있습니다.”
“재판장님! Osmand 케이스는 저희 사건과는 많은 점에서 사실관계가 다릅니다! 그 법리를 이 케이스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미스 후퍼, 솔직히 본 법관도 그렉슨씨의 견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렉슨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존을 돌아보고 몰리는 즉각 풀이 죽었지만 존은 그 뒤의 말을 기다릴 정도로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사건이 항소법원에서 뒤집히는 것도 싫으니까 이번에는 변호인측의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변호인 측에 48시간을 주겠습니다. 변경된 범행동기에 맞는 변론을 준비해오세요. 휴정합니다.”
28시간이 지난 후, 몰리와 존의 두뇌는 작동하기를 멈췄다. 한 사람은 컨퍼런스 룸 책상 위에 엎어져있고 다른 사람은 비교적 점잖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두 사람 모두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음은 명백했다. 수사보고서와 로펌에서 고용한 조사관의 보고서를 거꾸로 외울 수도 있을 만큼 읽어댔지만 답이 없었다. 신입이라고 눈치를 보는 몰리를 좀 씻고 잠깐 잠이라도 자라고 내보낸 것은 존이었다.
“저기, 존.”
“음?”
“부인께 연락하지 않으셔도 되나요?”
누적된 피로와 수면부족으로 혈색이 살짝 빠져나간 얼굴이었지만 미소는 진심어린 것이었다.
“아까 문자를 보냈어요. 아이다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거예요.”
몰리는 가까스로 아이다가 부인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도 몰리의 집은 회사에서 가까운 편이었고 택시를 타자 15분만에 도착했다. 1주일 동안 청소는커녕 빨래조차 손을 못대고 있는 집은 독신자용 주거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파트라기보다는 토굴 같아 보였다. 몰리는 살인을 해도 심신상실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몽롱한 정신으로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던진 후 곧장 샤워실로 들어갔다. 열심히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뒤 수증기로 뿌옇게 흐려진 거울을 닦기 위해서 손을 들었다. 왜 그 순간 동작을 멈추고 거울 위에 놓인 자기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느냐고 하면, 그냥 두뇌활동이 극도로 저하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상태에서 거울을 짚은 자신의 손모양과 더불어 수사보고서에 첨부된 존 맥팔레인의 피묻은 엄지지문이 나란히 떠오른 것은 - 아마도 셜록 홈즈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표현이겠지만 - ‘계시’였다. 몰리는 젖은 머리를 채 말리지도 못한 채 간신히 메이크업 파우치만을 챙겨들고 로펌으로 되돌아갔다.
몰리가 다시 컨퍼런스 룸에 나타났을 때, 존은 샐리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며 사건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샐리의 견해는 회의적인 것이었는지 가만히 듣고만 있는 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원래도 그리 밝지는 않았던 존의 표정은 적어도 2시간은 지나야 돌아올거라고 생각했던 몰리가 45분만에 나타나자 더 구겨졌다. 다른 대형로펌과 달리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는 민주적이고 경쟁보다는 협력을 중시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선배이자 멘토의 눈치는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의 몰리에게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소위 말해 지금 그녀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존, 존, 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일이어야 할 거예요. 지금 당신 모양새는 약간 신선한 좀비 수준이니까요.”
“존! 그 지문이요! 그 엄지손가락 지문!”
몰리는 컨퍼런스 룸에 가져다두었던 화이트보드 위를 자꾸만 손을 두드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손으로 두드린다기보다는 손바닥을 찍는 동작에 가까웠다.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그렇게 날 수가 없다고요!”
그러나 존의 미심쩍은 듯한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셜록의 기행에 익숙해져있는 존의 반응이 그 정도였던 만큼 샐리의 반응은 더 극적이었다.
“몰리,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are you on something?”
셜록 홈즈의 팬으로서 그와 관련된 기사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었던 몰리 후퍼는 존의 의심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몰리는 너무나 답답했고 자신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지 못하는 존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셜록 홈즈의 말이라면 금방 알아차려 줬을까?’ 아니, 셜록 홈즈라면 진작 알아차렸을 지도 모른다. 몰리 후퍼는 누적된 피로와 수면부족으로 인해 현저하게 기능이 저하된 전두엽으로 인해 언어구사력과 자제력이 상당히 낮아져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화이트보드 위에 어지럽게 쓰여진 타임라인과 떠오르는데로 적어놓은 브레인스토밍의 결과를 자기 손바닥으로 북북 지워버렸다. 그리고 존이 채 입을 벌리고 항의하기도 전에 경찰조서 사본 뒤의 여백에다 자기 손을 꾹 눌러 자국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피해자의 집에서 발견된 피묻는 존 맥팔레인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찍은 사진이 나와있는 페이지를 찾아 바로 그 옆에 가져다두었다.
“아시겠어요?!”
존 맥팔레인의 지문은 벽면에서 발견되었다. 지문에 묻은 피는 당연히 피해자의 것이었다. 사실 법의학에 대해 아무런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해도 그 지문은 좀 생뚱맞은 구석이 있었다. 우선, 그 지문이 묻은 곳 외의 실내 다른 어느 장소에서도 피해자의 혈액이 발견되지 않았다. 혈액과 지문과 같은 물적 증거의 신빙성을 따지고 드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인 일이다. 하지만 지문 자체가 누군가 조작한 증거라면? 뭔가 둥글고 긴 물체를 잡거나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가 아니라면 엄지손가락의 지문은 선명하게 찍히기가 힘들다. 특히 벽면에 엄지손가락 지문을 선명하게 남기기 위해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눌러야지, 얼떨결에 벽을 짚다가 남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벽을 짚을 때 사람은 반사적으로 손바닥이나 손등을 쓰기 마련이고 손바닥을 사용할 때는 엄지손가락은 모로 눕게 되어 정작 엄지의 옆면이 남을 뿐, 정확하게 지문이 벽면과 접촉하지는 않는다. 즉, 지문의 일부분이 아닌 전부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존 맥팔레인의 엄지손가락 지문은 조작된 증거였다. 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린 것은 존 뿐만 아니었다. 샐리도 알았다. 몰리를 바라보는 샐리의 시선은 아까보다는 훨씬 온화해져있었으나 그녀의 바디랭귀지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이 정도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할 만은 해. 하지만 유죄심증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야. 이 증거가 조작된 것이라면 누가 왜 피고인을 모함하려고 했는지 그 동기와 범행수법에 대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제시해야만 해. 일단 피고인을 해하기 위해서 피해자를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피해자에게 원한이 있는 자가 피해자를 살해하고 그 죄를 피고인에게 뒤집어씌웠다는 게 그나마 설득력 있는 가설일텐데, 그럼 그 자는 어떻게 피해자의 자택에 침입해서 피해자를 살해하고 피고인의 지문을 입수해서 벽에다 남겨놓은 거지?”
결정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일로 너무 호들갑을 떨어나 싶은 마음에 급속도로 민망해진 몰 리가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어쩔 줄을 몰라하건 말건 존은 뚫어져라 몰리의 손바닥이 찍힌 자국과 맥팔레인의 지문 사진만을 쳐다보았다. 셜록 홈즈의 천재성과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고 관찰력과 창의성에 있어서는 몰리보다도 낮은 수준이었지만 존에게는 한 인간으로서, 변호사로서, 또 셜록 홈즈의 파트너로서 축적해온 인간의 본성과 행동양식, 범죄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가 있었다.
“몰리.”
“예?”
“앞으로 최소 여섯시간은 푹 자는 거예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저, 정말요?”
“존,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좀 말해주고 가는 게 어때요?”
“그럼, 샐리. 나는 이만 실례.”
화색이 도는 몰리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샐리를 뒤로 하고 트렌치 코트를 휘날리며 컨퍼런스 룸을 나선 존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가며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샐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부부는 닮아간다더니.”
“안녕, 히긴스. 오랜만이야. 잘 지냈는지? 이봐, 아직도 내 의뢰를 받아주는 지 궁금해서 말이야.”
- 전 프리랜서예요. 시간당 300달러만 지불해주시면 아무런 질문도 조건도 없습니다.
“400으로 하지. 이번 건 좀 리스크가 크거든.”
- 뭔데요?
“연방 쪽 데이터베이스를 살짝 털어줘야겠어. 출입국관리국 기록. 영상으로. 얼굴인식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을 만한 해상도여야 해.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이메일로 보내주지.”
- 음, 그 정도라면 500은 받아야겠는데요.
“450.”
- 네, 뭐, 그걸로 하죠.
“.....왜 이렇게 잘해줘?”
- 아니, 이 양반이 양보해줘도 지랄....
“자네, 셜록이 날 찼다고 생각하는 거지?”
- 남의 아랫도리 사정에는 관심 없네요.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먼저 결혼한 건 왓슨씨잖아요.
“그래, 그런데 왜 나한테 잘해주.... 아항, 벽장에 숨어있는 40대 유부남 게이보다야 다이나마이트한 바디의 고져스한 30대 초반 바이섹슈얼 도미니트릭스가 더 낫다 이거지? 알았어, 알았어. 다시 400이야.”
- 왓슨씨!
“그리고 정오까지 부탁해~”
- 엑?! 겨우 4시간 남았잖아요! 값도 깎으면서!
“이왕 인심쓰는 김에 통 크게 쓰라구. 잘 부탁해.”
히긴스가 뭐라고 왁왁 대는 것은 무시한 채 존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다음으로 전화를 건 곳은 같은 로펌의 동료이기도 한 랭데일 파이크였다.
“랭더일, 존이야. 부탁이 하나 있어서 말인데, 전에 자네에게 신세진 연방요원이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코넬리우스 로저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봐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