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를 넘겨 돌아왔습니다. ㅠㅠ 혹여나 기다리신 분이 계시다면 그저 엎드려 사죄드릴 뿐입니다 ㅠㅠ
2. 이 시리즈를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이유는 제가 오래된 원작 팬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ㅋㅋㅋㅋ 아주 괴상한 방법으로 원작의 우수성을 입증해주고 있는 TV시리즈입지요 ㅋㅋㅋㅋ
몰리가 눈을 떴을 때 눈 앞에 보인 것은 옷차림이 바뀐 것만 제외하면 잠들기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존 왓슨이었다. 회색 체크 무늬 자켓에 느슨한 벽돌색 조끼를 입어서 대학교수처럼 보였던 이전의 옷차림과는 달리 칼처럼 재단된 군청색의 쓰리피스 슈트는 사람을 차가워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단독사무실이 없는 신입이라 존의 사무실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정말 여섯시간을 꽉 채운 것을 보고 몰리는 경악했다.
“존, 정말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요, 몰리.”
“하, 하지만....”
“몰리, 정말 괜찮아요. 게다가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 밖에 없어요.”
“기, 기다려요? 무엇을요?”
“죽은 남자의 사진이요.”
분명 존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몰리는 그가 자신의 지나친 ‘휴식’에 대해 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샐리가 나타나 존의 차림새에 휘파람을 불고 몰리의 귀에 ‘그의 전투용 정장’이라고 속삭였을 때도 그 오해는 사라지지 않았다. 공판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몰리는 초조해졌지만 지금의 존 왓슨에겐 평소의 그와는 달리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기운이 맴돌았다. 노트패드에 질문과 예상되는 답변을 이어나가며 어떻게 해야 배심원에게 좀 더 충격적으로, 그러면서도 정확한 정보를 제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습은 진지하다못해 고통스러워보일 지경이었다. 뭔가 도와줄 것이 없느냐는 몰리의 말에 존은 웃으며 말했다.
“몰리, 이건 다시는 오지 않을 당신의 첫 번째 재판이 될 거예요. 편히 앉아서 즐겨요.”
그 자신만만한 표정에 몰리는 존이 의뢰인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확고한 증거를 찾아냈으며 법정에서 승리를 예감하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의 존 왓슨에게는 여섯 시간을 꽉 채워 숙면한 몰리 후퍼는 전혀 신경쓸 만한 것이 못되었다.
공판을 시작하자마자 다시 증인석으로 불러올라온 맥팔레인 부인의 모습은 첫날보다 더 안 좋아보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살인용의자로 몰리고 있는 것도 억울한데 이미 죽은 남편과 조너스 올데커, 그녀의 과거가 배심원과 방청객들 앞에서 모조리 폭로되고 있었다. 30년전, 아니 10년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조너스 올데커가 게이이고 헤테로 가정을 깨뜨리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죽음을 수사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공판정에서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을 망쳐놓고 자신의 이기심과 집착으로 여러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원흉은 조너스 올데커가 아니라 주디 맥팔레인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맥팔레인이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검사는 배심원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다. 검사 토마스 그렉슨은 오래된 대학 등록부와 경범죄 전과를 뒤져가며 존 맥팔레인의 부친 헥터 맥팔레인과 조너스 올데커가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고 같이 퀴어 무브먼트를 지지하는 써클에 가입했으며 공공외설죄로 함께 체포된 적이 있음을 밝혔다. 주디 맥팔레인, 그때는 주디 플라이트였던 그녀가 헥터 맥팔레인을 알게 되기 훨씬 전부터 두 사람은 이미 함께였음을, 그러나 그녀가 존 맥팔레인을 임신하면서 모든 것이 뒤틀려버렸다는 사실도 배심원에게 제시했다. 맥팔레인은 몇 번이나 존을 돌아보며 어머니를 구해달라는 눈길을 보냈으나 존은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디 맥팔레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혼전 임신을 했으며 헥터 맥팔레인은 아이가 아니었다면 결코 자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란 사실도 시인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자신은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아들에게 한 적이 없으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서먹했던 것은 그녀나 아들의 탓이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헥터 맥팔레인은 비록 실수를 했지만 책임을 지려고 했다. 30년 전의 미국은 중산층 출신의 주디 플라이트가 결혼하지 않고 홀몸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나라가 못되었다. 그의 부모는 물론이고 그녀가 자라온 문화적 사회적 환경은 그러한 선택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가족과 지인들이 없는 낯선 곳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을 것이며 그것은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낙태는 처음부터 선택지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헥터 맥팔레인은 일단 그녀와 결혼해서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은 뒤 바로 이혼하여 양육비만 지불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헥터 맥팔레인과 조너스 올데커 중에 타인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향해 직진해온 쪽은 언제나 올데커였다는 것이다. 헥터 맥팔레인은 타인의 영향을 쉽게 받는 사람이었다. 조너스 올데커와 만나기 전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고쳐줄’ 여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결혼하자마자 곧 이혼하겠다는 것이 그저 변명에 불과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진심이었는지는 이제와선 아무도 모른다. 검사의 구타에 가까운 증인신문이 끝난 후, 신기하게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존이 피고인 측 신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디 맥팔레인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있었고 존의 조용하고 침착한 질문에 완전히 방어력을 상실한채 가족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모두가 듣는 앞에서 고백했다. 헥터 맥팔레인은 분명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들은 사랑했다. 부자의 사이가 벌어진 까닭은 첫째, 존 맥팔레인이 자라면서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 사람 사이의 다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고 둘째, 헥터 맥팔레인이 게이이기 이전에 70~80년대의 미국 남성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갇혀있는 평범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존 맥팔레인이 대학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자 부자 사이의 간격은 더욱 벌어졌다. 보통은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고 노력할 모친/아내는 이 경우에는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방기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들을 자기 곁에 더 가까이 두기 위해 두 부자 사이의 적대감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주디 맥팔레인이 가진 것은 그의 이름 뿐이었다. 헥터 맥팔레인의 반려는 죽기 직전까지도 조너스 올데커였다. 그래서 헥터가 간암으로 병원에 실려갈 때도 주디는 아들에게 알리기를 거부했고 간 이식이 필요하니까 아들의 간에 대해 생체검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의료진의 권유를 단칼에 거절했다. 사랑으로 인해 결혼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주디 맥팔레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사랑이 없는 책임감을 견딜 수 없었고 그 시대 평균적인 미국인답게 남편의 성적 지향을 경멸하고 혐오했다. 헥터 맥팔레인은 에이즈가 아니라 평범한 50대 남성답게 간암에 걸렸으나 주디 맥팔레인은 젊고 건강한 아들의 간을 늙고 죽어가는 ‘호모(faggot)’에게 줄 수 없었다. 죽어가는 연인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할 수 밖에 없었던 조너스 올데커가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정말로 헥터와 함께 반평생을 보낸 것은 조너스 올데커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그가 자신에게 보낸 저주의 편지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나노라고 그녀는 울면서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신은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노라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했다. 우선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 너무나 수치스러웠고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을 원망할 것이 두려웠다. 아들은 지금 이날까지 그의 부모가 서로를 증오하고 기피했던 것이 그저 사랑이 식고 마음이 변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버지의 성적 지향이 결부된 문제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항변했다. 존 맥팔레인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심약한 청년답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배심원들 중 몇몇은 피고인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비록 증오범죄로 기소하지는 못했으나 증오범죄에 대한 배심원들의 혐오를 이용하려고 했던 검사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몰리는 존이 왜 이 공판정이 싸구려 소프 오페라의 한 장면으로 변해가는 것을 두 손 놓고 바라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존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맥팔레인 부인을 부축해서 다시 방청석으로 돌아가게 했다. 시끌시끌한 방청객들 때문에 판사는 한숨을 쉬며 재판봉을 내리쳐서 자중할 것을 명했다. 존은 멋쩍은 눈빛 하나 없이 침착하게 일어서서 맥팔레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를 증인으로 요청했다. 검사는 이미 신문을 마친 증인이라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존은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고 마침 해당 형사도 방청석에 앉아있는 만큼 문제될 게 없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판사는 존의 손을 들어주었다. 바라보는 눈빛으로 보아 판사는 법정을 소프 오페라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버린 책임이 존보다는 검사 측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존이 형사를 상대로 모종의 ‘스턴트’를 뽑아내는 것도 곱게 보진 않을 터였다. 판사는 존이 얼마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원의 동정을 사기 위해 검사가 증인을 괴롭히는 것을 묵과한 것을 눈치챈 듯 했다.
담당형사가 증인석으로 올라섰다. 앞서 이미 증언한 바 있기에 선서와 자기의 신원을 밝히는 절차는 넘어갔다. 존은 평범하게 수사과정에 대해서 물었다. 맨 처음 어떻게 존 맥팔레인을 용의선상에 올리게 되었으며 어떻게 이 사건이 단순히 재산을 노린 범죄에서 2대에 걸친 치정과 원한에 의한 범죄로 탈바꿈하게 되었는 지를 물었다. 형사는 가장 기본적인 살해동기인 ‘돈’을 따라갔을 뿐, 처음부터 진지하게 존 맥팔레인을 용의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존과 몰리가 준비해뒀던 변론 내용 그대로였다. 재산을 노린 계획범죄라기엔 너무 허술하고 앞뒤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확신은 형사가 주디 맥팔레인을 찾아갔을 때 찾아왔다. 조너스 올데커가 그녀의 아들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격노하며 그런 작자의 돈 따위는 받고 싶지도 않고 필요도 없다고 하며 끝까지 아들과 자신의 인생에 방해가 되려고 작정한 구더기같은 존재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아버지를 안다고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전혀 만난 적도 없다는 존 맥팔레인의 진술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라 형사는 피해자의 과거를 캐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데커가 말한 대로 그의 부친과의 접점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형사님, 맥팔레인 부인, 혹은 피고인이 피해자인 올데커씨를 살해할 동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만큼 올데커씨에게도 맥팔레인 부인이나 제 의뢰인을 해할 동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그렇겠죠. 죽은 사람은 원한을 가질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입니다.”
“잠깐만 제 가정을 따라와주시겠습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살해당한 사람이 조너스 올데커가 아니라 맥팔레인 부인이나 제 의뢰인이었다면 형사님께서는 조너스 올데커를 용의선상에 올리셨을 까요?”
“.....그렇지는 않았겠지요.”
“어째서요?”
“재판장님, 이의있습니다. 본 사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본 법정이 조금만 더 관대함을 보여주신다면 얼마 있지 않아 관련성이 있음을 입증해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심하세요, 변호인. 변호인은 지금 매우 아슬아슬한 선을 밟고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형사님. 어째서 조너스 올데커는 용의자가 될 수 없습니까?”
형사는 헛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조너스 올데커는 힘없는 노인이니까요.”
“하지만 맥팔레인 부인 역시 힘없는 노인이신데요. 같은 남자라면 몰라도 여자라면 쉽게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가장 먼저 수사선상에 오를 만한 용의자는 아닐 겁니다.”
“Why not?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살해도 불사할 만한 원한이 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우선은 같은 집에 사는 아들이 제 1 용의자가 되겠지요. 일단 제1순위 법정상속자이기도 하고요.”
“‘돈을 따라가라’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사님이 맨 처음 존 맥팔레인씨를 용의선상에 올리신 거지요? 비록 별로 설득력은 없지만 일단은 단서가 이끄는 대로 가봐야 하니까요. 아닙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형사님은 끝까지 돈을 따라가지는 않으셨어요. 더 좋은 동기가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그 동기는 제 의뢰인에게 특화된 동기였습니다. 당신은 돈을 따라가지 않았어요. 따라가다가 중간에 그만 뒀지요.”
“그래서요?”
“그래서, 자기 의뢰인의 무죄를 확신하는 변호인답게 저는 돈을 계속 따라갔습니다. 형사님, 코넬리우스 로저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십니까?”
“....피해자의 사업을 공동경영하고 있던 파트너입니다.”
“오? 알고 계시는 군요. 그럼 피해자의 자산 대부분이 케이먼 제도에서 개설된 코넬리우스 로저의 계좌로 이체되었고 실질적으로 피해자에게 남아있던 재산은 부동산인 자택과 목재야적장 밖에 없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계시겠군요?”
“예.”
“피해자는 두 달 전에 파산신청을 했던데, 채권자들이 코넬리우스 로저에 대해서 알면 길길이 날뛰겠군요. 안 그렇겠습니까?”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게 바로 피해자의 채권자들이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은 이유입니다. 피해자가 죽으면 한 푼도 못 건지니까요.”
“이 코넬리우스 로저라는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경찰에서는 코넬리우스 로저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거군요? 그가 피해자를 죽일 이유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예, 방금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근데 전 계속 따라갔습니다. 형사님, 코넬리우스 로저가 5년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몰리는 물론 배심원들조차도 이게 굉장한 국면전환이 될 것임을 알아차렸으니 검사인 그렉슨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재판장님, 이의있습니다!”
존은 그렉슨이 말을 이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존은 증인인 형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검지손가락을 우아하게 들고는 대꾸했다.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용의자를 제시하는 중입니다, 재판장님.”
“기각합니다. 계속하세요.”
“형사님,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코넬리우스 로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더군요. 그는 케이먼 제도에 그 이름으로 계좌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몰랐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입니다. 피해자가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날 바로 다음날 오전 11시 35분, 오헤어 국제공항에서 코넬리우스 로저라는 이름의 승객이 멕시코로 가는 항공편에 탑승합니다. 그리고 이게 공항 내 감시카메라가 찍은 승객의 사진입니다.”
존은 리모컨을 들어 법정 내에 설치된 평면 스크린을 작동시켰다. 눌러쓴 비니, 검은 선글라스, 덥수룩한 수염을 한 자그마한 몸집의 노인이었다.
“이 자를 알아보시겠습니까?”
형사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증인석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아니요.”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요. 지금 제가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은 실제로 FBI에서 쓰이는 안면인식프로그램입니다. 저는 다만 단 하나의 데이터를 더 추가시켰을 따름이지요.”
존은 다시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고 화면상에 나타나는 얼굴들의 골격과 이목구비 사이의 간격을 측정하는 붉은 선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화면이 멈추고 한 사람의 얼굴 위로 ‘match’라는 검색결과가 큰 대문자로 표시되어 깜박거렸다. 웅성거림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재판장 한 복판에서 존은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씁쓸하게 말했다.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우리나라의 사법제도가 얼마나 피해자에게 무관심한지를 반증해주는 것 같습니다. 재판장님. 이로써 피고인은 재판 무효를 신청하는 바입니다.”
화면에 나타난 얼굴은 조너스 올데커였다.
한동안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할 만한 결말이었다. 존은 법정 경비에게 부탁하여 맥팔레인 모자에게 후문을 안내해달라고 부탁했다. 맥팔레인은 무죄로 풀려났으나 그도 알지 못했던 가족의 어두운 과거가 모조리 파헤쳐졌다. 전략상 검사 그렉슨이 맥팔레인 부인을 증언대에서 난도질하는 것을 방관할 수 밖에 없었던 존은 입맛이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모자는 존과 몰리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고서 물러났다.
“....하다못해 귀뜸이라도 해줄 수 있지 않았나.”
토머스 그렉슨에게는 악몽같은 날일 것이다. 단순히 범인을 못잡은 것이 아니라 일어난 적도 없는 살인사건 때문에 무고한 남자를 기소해서 민감하기 짝이 없는 사생활을 까발렸으니 말이다. 이 나라에서 ‘게이 이슈’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였다. 조너스 올데커는 차명 계좌에 전 재산을 이체한 뒤 스스로를 살인범죄의 피해자인양 꾸며 도피하였는데다가 무고한 사람에게 살인자의 누명을 씌우려고 했다. 살인만한 강력범죄는 아니나 그 수법과 죄질이 악질적인 구석이 있으므로 그 범인을 잡지 못한다는 것은 경찰과 검찰 모두의 수치로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확실히 뻔뻔하다. 몰리는 기분이 나쁜 티를 있는 대로 내며 인상을 팍 썼다. 새내기 변호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맹렬한 감정표현이었지만 뭘 해도 순진한 인턴 내지 수줍은 여학생처럼 보이는 그녀가 인상을 쓴다고 해서 정말로 험악해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어떤 식으로든 존에게 위로가 된 모양이었다. 존은 그의 전 직장동료이기도 했던 토머스 그렉슨에게 웃어보였다. 그 미소는 매우 잔잔하고 온화해보이는 것이었다.
“난 자네가 왜 기소를 서둘렀는지 알아.”
“이봐, 존.”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이 동네엔 하나같이 상어들뿐이니까 말이야. 물 속에 퍼지는 피냄새라도 맡은 거겠지. 자, 이게 네가 얻어갈 교훈이야, 토미. 네 동료들과 상관에게 똑똑히 전해. 셜록 홈즈가 있든 없든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는 아직 안끝났어. 너희들이 날 홈즈의 종자로 보든지 말든지 난 상관 안해. 다만 두 번 다시 이따위로 우리 의뢰인을 괴롭힌다면 네 상관의 주검사장 연임은 영영 물건너갈테니 그리 알아.”
만약 존이 이 말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목소리를 깔고 위협적으로 말했다면 별로 무섭지 않았을 거라고 몰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존은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았고 목에 힘을 주지도 않았다. 몰리 후퍼는 존보다 덩치가 2배는 더 큰 토머스 그렉슨의 억지로 빳빳하게 든 목 아래로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렉슨은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존 왓슨은 그렉슨을 대표로 검찰 전체를 상대로 한 선전포고를 날릴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목소리로 몰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첫 승리를 축하해요, 몰리 후퍼.”
몰리 후퍼는 자동적으로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손바닥을 마주하여 붙잡기에는 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있는 존의 손을 몇초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존과 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몰리가 바텐더에게서 술을 받아가지고 탁자로 왔을 때, 존은 부인과 통화 중이었다.
“응, 아이다. 우리가 이겼어. 지금 새로 온 동료에게 축하의 의미로 술 한잔 사는 중이야. 늦을 지도 모르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정한 음색이기는 했지만 신혼부부 사이의 통화라고 하기에는 뭔가 삭막했다. 최소한 함께 산지 10년은 되었거나..... 몰리는 생각했다. ‘룸메이트’ 그러나 확인해볼 수는 없다. 무슨 수로 확인해본단 말인가. 존과 몰리는 친구가 아니다. 아직은 그저 동료일 뿐이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존의 눈은 풀려있었다. ‘지금껏 계속 같은 양을 마셨는데?’ 몰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기 잔을 바라보았다. 그런 몰리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존이 말했다.
“당신은 아주 신기한 재주가 있군요, 미스 몰리 후퍼.”
“예, 예?”
“눈으로 말을 하네요. 셜록이 왜 맨날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 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쳐댔는지 알겠어요. 정말로 생각이 들릴 수도 있군요.”
“저기, 존...”
“당신도 나와 셜록이 서로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아니에요?”
몰리가 당황한 나머지 어버버거리고 있는 사이, 존은 묻지도 않았건만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존은 지금으로부터 1년 4개월 전, 이주민보호센터에서 무료변론할당을 채우기 위해서 받은 의뢰로 인해 아이다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이었는데 그녀의 부친은 악명높은 뒤발리에 독재시절 추방당한 아이티 엘리트들 중 한 명이었다. 부친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두고 아이티 정부의 암살이라고 굳게 믿은 그녀는 도미니카 정부는 자신을 보호해줄 의지도 능력도 없다며 미국 정부에 정치적 이유로 망명을 신청했다. 존은 그녀를 위해 1년간 고군분투했으나 망명신청은 기각되었고 그녀는 본국으로 추방당할 위기에 놓였다. 거기에서 그만 포기해버렸다고 해도 그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기각결정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다가 오히려 존을 위로할 지경이었다. 아이다는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늘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미국으로 밀입국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의지보다는 운이 작용한 결과였지만 존과 함께 한 1년 동안 그녀는 강해졌다. 아이다는 그것이 존 덕분이라고 말했다. 아이다는 존을 보며 진짜 열정과 인내란 어떠한 것인지 배웠다며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자신의 운명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존이 무엇을 보았는지는 몰라도 망명신청이 기각당하고 이민국 요원이 찾아온 날, 존은 그들 앞에서 말했다. ‘우린 결혼할 겁니다.’
“그걸 그 사람들이 믿었어요?”
“당연히 안믿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우린 판사 앞에서 결혼서약과 반지를 나눴고 정식으로 혼인신고도 했는데? 뭐, 아직도 한 달에 한번씩 점검차 이민국 요원이 찾아오기는 해요. 그래봤자 아무 것도 못 건지겠지만. 우린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침대에서 자요. 아이다는 신경쓰지 않아요. 내가 게이라는 걸 아니까.
셜록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죠. 나중에 불같이 화를 냈어요. 그럴 거라 예상했고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 말도 안했던 거라 조금 미안했던 건 사실이에요. 근데 그 자식이 지껄이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보니 너무 열이 받는 겁니다. 아이린 애들러랑 놀아나느라 내가 뭘하는 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건 제 놈이 아니냔 말이지. 아마도 그 자식의 핸들러, 사이드킥, 종자, 펫, 기타등등으로 취급받는 게 슬슬 지겨워졌던 모양이에요. 아니면.... 나는 한때 그 모든 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헌신, 사랑, 충성 그 무엇이라 불러도 좋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젠 잘 모르겠다’가 되어버린 거예요. 나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어졌는데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그 모든 것을 내게 기대하더군요. 내가 셜록의 곁에 있었던 건 그냥 내가 그의 곁에 있고 싶어서였어요. 불세출의 천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받는 게 억울해서도 아니고 그의 천재성을 빌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서도 아니고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구제해주고 싶어서도 아니었지요. 그런데 내가 마음이 변해서,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이 더 이상 하고 싶어지지가 않아서 – 그게 대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 그만두니 모두가 날 비난했어요. 오직 그렉 한 사람만이 그러지 않았죠. 내가 셜록을 놓아버림으로써 발생하게 될 모든 피해를 최전선에서 마주쳐야 하는 사람인데 오직 그만이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이다와의 결혼식에 증인으로 와준 사람도 그 사람이었죠.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만한 셜록은 내가 정말로 자기를 무시하기 시작하자 두 달 동안 그렉을 들들달달 볶아서 신경쇠약을 일으키게 만든 다음, 우리의 숙적 애들러 앤 모리어티로 이직해버렸죠. 만약 이게 복수였다면 나를 내쫓는 것으로 마무리했어야 했어요. 어느 로펌에서 셜록 홈즈를 보유할 수 있는데 존 왓슨을 내보내지 않겠어요? 하지만 아니에요, 그렇게 쉽게는 안 되죠. 셜록 홈즈에게 ‘No’라고 말한 대가가 그리 가벼울 리 없죠. 그 쌍놈의 새끼는 그렉과 마이클, 샐리가 내 결혼식에 참석해서 증인이 되어줬던 걸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오살맞아 뒈질 작자같으니라고.“
몰리는 생각했다. ‘존은 술에 취하면 욕을 하기 시작하는 구나.’
그로부터 35분 후, 몰리는 존의 술버릇이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욕을 하기 시작하는 것에서 그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존은 인사불성이 되어 탁자에 엎어진 채로 잠이 들었다. 작은 체격이라 해도 정신줄을 완전히 놓은 성인남자는 물먹은 솜 푸대처럼 무거웠다. 도심의 거리 한복판에서 정신을 잃은 존 왓슨을 어깨에 짊어진 채 몰리 후퍼는 자신이 배달장소도 모르는 택배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몰리는 전화연결 통화음을 들으면서도 앞으로 자기가 하게 될 말이 자기 머릿속에서 미리 리허설한 것만큼 이상하게 들리지 않기를 기도했다. 신호가 꽤 오래 걸렸기에 몰리는 더욱 긴장했다. 한밤중에 자다가 남편의 휴대폰으로 온 모르는 여자의 전화를 받게 된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 딸깍- 마침내 전화가 연결됐다.
‘존? 많이 늦을 건가요?’
“아 저, 처, 처음 뵙겠습니다. 미세스 왓슨. 전 몰리 후퍼라고 합니다. 전 왓슨씨의....”
‘미스 후퍼! 말씀 많이 들었어요. 재판에 이긴 걸 축하드려요! 무슨 일이시죠?’
몰리의 어깨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몰리는 하마터면 휴대폰에다 대고 한숨을 쉴 뻔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녀는 남편을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굳이 그걸 말리고 집주소를 가르쳐달라고 했던 이유를 몰리도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사실 별로 설명할 것도 없다. 고약한 호기심, 그것 말고 달리 뭐가 있겠는가?
셜록 홈즈가 입사하기 전에도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가 규모에 비해 견실하고 유능한 로펌이었던 것처럼 셜록 홈즈와 만나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전에도 존 왓슨은 훌륭한 변호사였다. 베이커 가에 있는 최첨단 설비가 갖추어진 펜트하우스나 벨그라비아에 있는 최고급 주택가만은 못해도 갈색 사암으로 지어진 연립주택은 제법 고가의 주거지였다. 현관 앞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 3층에 왓슨이라고 적힌 명패 옆 벨을 누르자 누구냐고 묻는 소리도 없이 바로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아이다 왓슨이 이미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존!”
단언컨대, 그 흑인 여성은 지금까지 몰리가 직접 대면해본 여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정말 감사해요, 미스 후퍼. 저 사람이 저정도 마시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네요. 재판에도 이겼다면서....”
신혼부부라기보다는 룸메이트 같다고 생각했던 인상을 날려버리듯 남편을 보살피는 아이다 왓슨의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 없었다. 존은 자기가 게이이며 그린카드를 위한 위장혼인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으니... 몰리 후퍼는 천방지축 뻗어나가는 자신의 와일드한 상상력을 호되게 후려쳤다. 하지만 그녀의 호기심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낯짝이 두꺼웠다. 과연, ‘그’ 셜록 홈즈가 위협을 느낄 만도 하다. 그녀는 멋도 모르는 중산층 출신 자원봉사자들이 아이티 출신의 불법이민자라는 말을 듣고 떠올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영어를 약간 이국적인 액센트와 함께 구사했고 탠디 뉴튼이나 할리 베리를 떠올리게 하는 미모를 가졌다. 셜록 홈즈가 존이 게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도 결혼이라는 법률적 효력을 갖는 관계로 엮이는 걸 원하지 않을 정도의 미인이었던 것이다. 팬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굽는 지라 비록 존이 진짜 ‘썸씽’은 유사언론매체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자기랑 셜록이 아니라 셜록과 아이린 사이에 있다고 말해줬지만 몰리는 존이 술주정하며 토로했던 억울함을 살짝 깎아서 듣기로 했다.
“아니에요, 부인. 오히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뵙게 돼서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껏 말렸어야 했는데... 맹세컨대 진짜 얼마 안마셨거든요. 저와 거의 비슷하게 마셨는데...”
몰리의 말에 아이다가 웃었다. 잔잔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여성스러움과 다정함으로 가득찬 미소라서 몰리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이지, 존이 잘못했구만!’
“크게 불편하지 않다면 너무 늦은 시간이니 주무시고 가세요. 이 밤중에 미스 후퍼 혼자 가게 둔다면 내일 아침 존이 무척 화낼 거예요.”
“아, 아뇨, 그건 너무.....”
“부탁이에요. 그리고 부디, 아이다라고 부르세요.”
그저 우아하게 권유하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거절의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저도 몰리라고 불러주세요.”
“반가워요, 몰리. 좀 예상에서 벗어난 첫만남이긴 하지만 그래도 반가움이 덜해지지는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