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는 좋았어요. 302가 좋았던 것처럼 좋았습니다. 이상하게 시즌이 전반적으로 평이 좋은 시즌 1과 시즌2는 중간에 낀 에피소드가 제일 별로인데 시즌 전체가 하향세인 시즌 3과 시즌 4에서는 중간 에피소드가 제일 제 취향에 맞네요. 아이러니합니다.
이런 기분을 두고 뭐라 하던가요, 할 말 많지만 하지 않겠다?
'나는 왜 이 작품이 구리다고 생각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장문의 글을 쓰는 것도 애정과 열정이 남아있기 때문에 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배신감과 분노도 다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오랜 명언을 다시금 되새기며 저는 제발 셜록이 4시즌에서 끝나길 바랍니다. 4시즌에서 끝난다고 해도 아무 미련이 남지 않는 엔딩이었어요. 셜록과 존의 관계도 그렇지 않던가요? 셜록은 존이 가족임을 천명했고 둘이 같이 애까지 키우잖아요. 하아.... 다시 한번 할 말 많으나 하지 않겠다.....
3시즌을 보면서 이 거대한 멘붕을 이미 예견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 난장판을 보며 정말 이럴 줄 몰랐냐고 깔깔깔 웃고 싶어요.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예요. 별 거 없으리라고는 생각했었죠. 하지만 유령신부는 꽤 괜찮은 캐릭터 스터디였고 3시즌을 무마할 정도는 아니지만 시리즈가 원래의 궤도로 오를 만큼의 동력은 확보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아주 약간했어요. 하고 말았어요. 하지만 이 정도까지 망쳐놓을 줄은 몰랐어요.
이 시리즈는 주어진 모든 기회를 낭비했어요. 더이상 회생은 없을 거예요. 등장인물들이 몽땅 전기쇼크라도 받아서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리지 않는 이상 말이죠.
1. 톰 히들스턴이 셜록 4에 쉐린포드 홈즈 역으로 합류할지도 모른다는 루머를 접했다. 내 생애 이렇게 무언가가 루머이길 간절히 바래본 적이 없다. 아 시바 몰라 다 망했어
그래도 난 보겠지 어이구 이 호구색히 (2015. 9. 21.)
2. 팬픽션에도 질적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팬픽션은 어디까지나 '팬픽션'이기 때문에 용서되는 부분이 있다. 아마추어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원작이 제공하는 다양한 해석 중 팬픽션은 보통 그 중 한 해석을 선택하고 그와 양립할 수 없는 다른 해석은 배제해버리곤 하는데 이게 아무리 잘된 경우라해도 결국은 해석의 다양성을 줄여버리는 거지 않나. 하지만 이 시리즈 전체를 팬픽션으로 치부한다해도 시즌 1은 정말 괜찮은 팬픽션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 영웅'을 현대로 데려와 고기능 소시오패스로 만들고 얌전한 사이드킥이자 나레이터를 아드레날린 중독자로 만들어서 왜 이 둘이 불멸의 콤비인가를 보여줬지. 원작은 오히려 그냥저냥 시간의 힘으로 뭉개고 지나간 지점이었는데. 시즌 1이 팬픽션으로서 가닿을 수 있는 정점이었고 2시즌이 좀 마음에 안드는 재해석이 있었지만 그래도 셜록 시리즈가 팬픽션이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인 작품으로서 뭘 시도하고자 하는지 보여주려고 애썼다면 시즌 3은 팬픽션 중에서도 가장 재미없는 팬픽션이었다. 원작의 공백 중에 가장 불필요하고 재미없는 부분만 골라서 메꾸고 갔음. 니들이 들을 리는 없겠지만 부디 제작진들에게 부탁하건데 셜록 홈즈의 과거는 컴버배치의 부모까지 데려와 홈즈 패밀리를 보여준 걸로 충분하니까 제발 셜록 홈즈가 약쟁이가 된 이유를 상실의 트라우마에서 찾는 짓만은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음. 사람들이 잘 착각하는 게 결과가 흥미로우면 원인도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하고 온갖 프리퀼들을 만드는데 수수께끼는 수수께끼이기 때문에 흥미롭고 끊임없이 회자되는 것임. 개를 잃었든 형을 잃었든 동생을 잃었든 가정교사를 잃었든 이유를 밝히는 순간 김이 새는 거라니깐!
1. 해를 넘겨 돌아왔습니다. ㅠㅠ 혹여나 기다리신 분이 계시다면 그저 엎드려 사죄드릴 뿐입니다 ㅠㅠ
2. 이 시리즈를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이유는 제가 오래된 원작 팬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ㅋㅋㅋㅋ 아주 괴상한 방법으로 원작의 우수성을 입증해주고 있는 TV시리즈입지요 ㅋㅋㅋㅋ
몰리가 눈을 떴을 때 눈 앞에 보인 것은 옷차림이 바뀐 것만 제외하면 잠들기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존 왓슨이었다. 회색 체크 무늬 자켓에 느슨한 벽돌색 조끼를 입어서 대학교수처럼 보였던 이전의 옷차림과는 달리 칼처럼 재단된 군청색의 쓰리피스 슈트는 사람을 차가워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단독사무실이 없는 신입이라 존의 사무실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정말 여섯시간을 꽉 채운 것을 보고 몰리는 경악했다.
“존, 정말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요, 몰리.”
“하, 하지만....”
“몰리, 정말 괜찮아요. 게다가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 밖에 없어요.”
“기, 기다려요? 무엇을요?”
“죽은 남자의 사진이요.”
분명 존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몰리는 그가 자신의 지나친 ‘휴식’에 대해 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샐리가 나타나 존의 차림새에 휘파람을 불고 몰리의 귀에 ‘그의 전투용 정장’이라고 속삭였을 때도 그 오해는 사라지지 않았다. 공판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몰리는 초조해졌지만 지금의 존 왓슨에겐 평소의 그와는 달리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기운이 맴돌았다. 노트패드에 질문과 예상되는 답변을 이어나가며 어떻게 해야 배심원에게 좀 더 충격적으로, 그러면서도 정확한 정보를 제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습은 진지하다못해 고통스러워보일 지경이었다. 뭔가 도와줄 것이 없느냐는 몰리의 말에 존은 웃으며 말했다.
“몰리, 이건 다시는 오지 않을 당신의 첫 번째 재판이 될 거예요. 편히 앉아서 즐겨요.”
그 자신만만한 표정에 몰리는 존이 의뢰인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확고한 증거를 찾아냈으며 법정에서 승리를 예감하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의 존 왓슨에게는 여섯 시간을 꽉 채워 숙면한 몰리 후퍼는 전혀 신경쓸 만한 것이 못되었다.
공판을 시작하자마자 다시 증인석으로 불러올라온 맥팔레인 부인의 모습은 첫날보다 더 안 좋아보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살인용의자로 몰리고 있는 것도 억울한데 이미 죽은 남편과 조너스 올데커, 그녀의 과거가 배심원과 방청객들 앞에서 모조리 폭로되고 있었다. 30년전, 아니 10년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조너스 올데커가 게이이고 헤테로 가정을 깨뜨리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죽음을 수사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공판정에서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을 망쳐놓고 자신의 이기심과 집착으로 여러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원흉은 조너스 올데커가 아니라 주디 맥팔레인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맥팔레인이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검사는 배심원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다. 검사 토마스 그렉슨은 오래된 대학 등록부와 경범죄 전과를 뒤져가며 존 맥팔레인의 부친 헥터 맥팔레인과 조너스 올데커가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고 같이 퀴어 무브먼트를 지지하는 써클에 가입했으며 공공외설죄로 함께 체포된 적이 있음을 밝혔다. 주디 맥팔레인, 그때는 주디 플라이트였던 그녀가 헥터 맥팔레인을 알게 되기 훨씬 전부터 두 사람은 이미 함께였음을, 그러나 그녀가 존 맥팔레인을 임신하면서 모든 것이 뒤틀려버렸다는 사실도 배심원에게 제시했다. 맥팔레인은 몇 번이나 존을 돌아보며 어머니를 구해달라는 눈길을 보냈으나 존은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디 맥팔레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혼전 임신을 했으며 헥터 맥팔레인은 아이가 아니었다면 결코 자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란 사실도 시인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자신은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아들에게 한 적이 없으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서먹했던 것은 그녀나 아들의 탓이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헥터 맥팔레인은 비록 실수를 했지만 책임을 지려고 했다. 30년 전의 미국은 중산층 출신의 주디 플라이트가 결혼하지 않고 홀몸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나라가 못되었다. 그의 부모는 물론이고 그녀가 자라온 문화적 사회적 환경은 그러한 선택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가족과 지인들이 없는 낯선 곳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을 것이며 그것은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낙태는 처음부터 선택지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헥터 맥팔레인은 일단 그녀와 결혼해서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은 뒤 바로 이혼하여 양육비만 지불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헥터 맥팔레인과 조너스 올데커 중에 타인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향해 직진해온 쪽은 언제나 올데커였다는 것이다. 헥터 맥팔레인은 타인의 영향을 쉽게 받는 사람이었다. 조너스 올데커와 만나기 전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고쳐줄’ 여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결혼하자마자 곧 이혼하겠다는 것이 그저 변명에 불과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진심이었는지는 이제와선 아무도 모른다. 검사의 구타에 가까운 증인신문이 끝난 후, 신기하게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존이 피고인 측 신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디 맥팔레인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있었고 존의 조용하고 침착한 질문에 완전히 방어력을 상실한채 가족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모두가 듣는 앞에서 고백했다. 헥터 맥팔레인은 분명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들은 사랑했다. 부자의 사이가 벌어진 까닭은 첫째, 존 맥팔레인이 자라면서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 사람 사이의 다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고 둘째, 헥터 맥팔레인이 게이이기 이전에 70~80년대의 미국 남성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갇혀있는 평범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존 맥팔레인이 대학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자 부자 사이의 간격은 더욱 벌어졌다. 보통은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고 노력할 모친/아내는 이 경우에는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방기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들을 자기 곁에 더 가까이 두기 위해 두 부자 사이의 적대감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주디 맥팔레인이 가진 것은 그의 이름 뿐이었다. 헥터 맥팔레인의 반려는 죽기 직전까지도 조너스 올데커였다. 그래서 헥터가 간암으로 병원에 실려갈 때도 주디는 아들에게 알리기를 거부했고 간 이식이 필요하니까 아들의 간에 대해 생체검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의료진의 권유를 단칼에 거절했다. 사랑으로 인해 결혼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주디 맥팔레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사랑이 없는 책임감을 견딜 수 없었고 그 시대 평균적인 미국인답게 남편의 성적 지향을 경멸하고 혐오했다. 헥터 맥팔레인은 에이즈가 아니라 평범한 50대 남성답게 간암에 걸렸으나 주디 맥팔레인은 젊고 건강한 아들의 간을 늙고 죽어가는 ‘호모(faggot)’에게 줄 수 없었다. 죽어가는 연인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할 수 밖에 없었던 조너스 올데커가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정말로 헥터와 함께 반평생을 보낸 것은 조너스 올데커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그가 자신에게 보낸 저주의 편지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나노라고 그녀는 울면서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신은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노라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했다. 우선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 너무나 수치스러웠고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을 원망할 것이 두려웠다. 아들은 지금 이날까지 그의 부모가 서로를 증오하고 기피했던 것이 그저 사랑이 식고 마음이 변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버지의 성적 지향이 결부된 문제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항변했다. 존 맥팔레인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심약한 청년답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배심원들 중 몇몇은 피고인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비록 증오범죄로 기소하지는 못했으나 증오범죄에 대한 배심원들의 혐오를 이용하려고 했던 검사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몰리는 존이 왜 이 공판정이 싸구려 소프 오페라의 한 장면으로 변해가는 것을 두 손 놓고 바라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존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맥팔레인 부인을 부축해서 다시 방청석으로 돌아가게 했다. 시끌시끌한 방청객들 때문에 판사는 한숨을 쉬며 재판봉을 내리쳐서 자중할 것을 명했다. 존은 멋쩍은 눈빛 하나 없이 침착하게 일어서서 맥팔레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를 증인으로 요청했다. 검사는 이미 신문을 마친 증인이라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존은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고 마침 해당 형사도 방청석에 앉아있는 만큼 문제될 게 없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판사는 존의 손을 들어주었다. 바라보는 눈빛으로 보아 판사는 법정을 소프 오페라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버린 책임이 존보다는 검사 측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존이 형사를 상대로 모종의 ‘스턴트’를 뽑아내는 것도 곱게 보진 않을 터였다. 판사는 존이 얼마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원의 동정을 사기 위해 검사가 증인을 괴롭히는 것을 묵과한 것을 눈치챈 듯 했다.
담당형사가 증인석으로 올라섰다. 앞서 이미 증언한 바 있기에 선서와 자기의 신원을 밝히는 절차는 넘어갔다. 존은 평범하게 수사과정에 대해서 물었다. 맨 처음 어떻게 존 맥팔레인을 용의선상에 올리게 되었으며 어떻게 이 사건이 단순히 재산을 노린 범죄에서 2대에 걸친 치정과 원한에 의한 범죄로 탈바꿈하게 되었는 지를 물었다. 형사는 가장 기본적인 살해동기인 ‘돈’을 따라갔을 뿐, 처음부터 진지하게 존 맥팔레인을 용의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존과 몰리가 준비해뒀던 변론 내용 그대로였다. 재산을 노린 계획범죄라기엔 너무 허술하고 앞뒤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확신은 형사가 주디 맥팔레인을 찾아갔을 때 찾아왔다. 조너스 올데커가 그녀의 아들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격노하며 그런 작자의 돈 따위는 받고 싶지도 않고 필요도 없다고 하며 끝까지 아들과 자신의 인생에 방해가 되려고 작정한 구더기같은 존재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아버지를 안다고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전혀 만난 적도 없다는 존 맥팔레인의 진술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라 형사는 피해자의 과거를 캐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데커가 말한 대로 그의 부친과의 접점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형사님, 맥팔레인 부인, 혹은 피고인이 피해자인 올데커씨를 살해할 동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만큼 올데커씨에게도 맥팔레인 부인이나 제 의뢰인을 해할 동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그렇겠죠. 죽은 사람은 원한을 가질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입니다.”
“잠깐만 제 가정을 따라와주시겠습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살해당한 사람이 조너스 올데커가 아니라 맥팔레인 부인이나 제 의뢰인이었다면 형사님께서는 조너스 올데커를 용의선상에 올리셨을 까요?”
“.....그렇지는 않았겠지요.”
“어째서요?”
“재판장님, 이의있습니다. 본 사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본 법정이 조금만 더 관대함을 보여주신다면 얼마 있지 않아 관련성이 있음을 입증해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심하세요, 변호인. 변호인은 지금 매우 아슬아슬한 선을 밟고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형사님. 어째서 조너스 올데커는 용의자가 될 수 없습니까?”
형사는 헛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조너스 올데커는 힘없는 노인이니까요.”
“하지만 맥팔레인 부인 역시 힘없는 노인이신데요. 같은 남자라면 몰라도 여자라면 쉽게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가장 먼저 수사선상에 오를 만한 용의자는 아닐 겁니다.”
“Why not?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살해도 불사할 만한 원한이 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우선은 같은 집에 사는 아들이 제 1 용의자가 되겠지요. 일단 제1순위 법정상속자이기도 하고요.”
“‘돈을 따라가라’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사님이 맨 처음 존 맥팔레인씨를 용의선상에 올리신 거지요? 비록 별로 설득력은 없지만 일단은 단서가 이끄는 대로 가봐야 하니까요. 아닙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형사님은 끝까지 돈을 따라가지는 않으셨어요. 더 좋은 동기가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그 동기는 제 의뢰인에게 특화된 동기였습니다. 당신은 돈을 따라가지 않았어요. 따라가다가 중간에 그만 뒀지요.”
“그래서요?”
“그래서, 자기 의뢰인의 무죄를 확신하는 변호인답게 저는 돈을 계속 따라갔습니다. 형사님, 코넬리우스 로저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십니까?”
“....피해자의 사업을 공동경영하고 있던 파트너입니다.”
“오? 알고 계시는 군요. 그럼 피해자의 자산 대부분이 케이먼 제도에서 개설된 코넬리우스 로저의 계좌로 이체되었고 실질적으로 피해자에게 남아있던 재산은 부동산인 자택과 목재야적장 밖에 없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계시겠군요?”
“예.”
“피해자는 두 달 전에 파산신청을 했던데, 채권자들이 코넬리우스 로저에 대해서 알면 길길이 날뛰겠군요. 안 그렇겠습니까?”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게 바로 피해자의 채권자들이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은 이유입니다. 피해자가 죽으면 한 푼도 못 건지니까요.”
“이 코넬리우스 로저라는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경찰에서는 코넬리우스 로저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거군요? 그가 피해자를 죽일 이유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예, 방금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근데 전 계속 따라갔습니다. 형사님, 코넬리우스 로저가 5년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몰리는 물론 배심원들조차도 이게 굉장한 국면전환이 될 것임을 알아차렸으니 검사인 그렉슨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재판장님, 이의있습니다!”
존은 그렉슨이 말을 이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존은 증인인 형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검지손가락을 우아하게 들고는 대꾸했다.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용의자를 제시하는 중입니다, 재판장님.”
“기각합니다. 계속하세요.”
“형사님,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코넬리우스 로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더군요. 그는 케이먼 제도에 그 이름으로 계좌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몰랐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입니다. 피해자가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날 바로 다음날 오전 11시 35분, 오헤어 국제공항에서 코넬리우스 로저라는 이름의 승객이 멕시코로 가는 항공편에 탑승합니다. 그리고 이게 공항 내 감시카메라가 찍은 승객의 사진입니다.”
존은 리모컨을 들어 법정 내에 설치된 평면 스크린을 작동시켰다. 눌러쓴 비니, 검은 선글라스, 덥수룩한 수염을 한 자그마한 몸집의 노인이었다.
“이 자를 알아보시겠습니까?”
형사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증인석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아니요.”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요. 지금 제가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은 실제로 FBI에서 쓰이는 안면인식프로그램입니다. 저는 다만 단 하나의 데이터를 더 추가시켰을 따름이지요.”
존은 다시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고 화면상에 나타나는 얼굴들의 골격과 이목구비 사이의 간격을 측정하는 붉은 선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화면이 멈추고 한 사람의 얼굴 위로 ‘match’라는 검색결과가 큰 대문자로 표시되어 깜박거렸다. 웅성거림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재판장 한 복판에서 존은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씁쓸하게 말했다.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우리나라의 사법제도가 얼마나 피해자에게 무관심한지를 반증해주는 것 같습니다. 재판장님. 이로써 피고인은 재판 무효를 신청하는 바입니다.”
화면에 나타난 얼굴은 조너스 올데커였다.
한동안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할 만한 결말이었다. 존은 법정 경비에게 부탁하여 맥팔레인 모자에게 후문을 안내해달라고 부탁했다. 맥팔레인은 무죄로 풀려났으나 그도 알지 못했던 가족의 어두운 과거가 모조리 파헤쳐졌다. 전략상 검사 그렉슨이 맥팔레인 부인을 증언대에서 난도질하는 것을 방관할 수 밖에 없었던 존은 입맛이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모자는 존과 몰리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고서 물러났다.
“....하다못해 귀뜸이라도 해줄 수 있지 않았나.”
토머스 그렉슨에게는 악몽같은 날일 것이다. 단순히 범인을 못잡은 것이 아니라 일어난 적도 없는 살인사건 때문에 무고한 남자를 기소해서 민감하기 짝이 없는 사생활을 까발렸으니 말이다. 이 나라에서 ‘게이 이슈’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였다. 조너스 올데커는 차명 계좌에 전 재산을 이체한 뒤 스스로를 살인범죄의 피해자인양 꾸며 도피하였는데다가 무고한 사람에게 살인자의 누명을 씌우려고 했다. 살인만한 강력범죄는 아니나 그 수법과 죄질이 악질적인 구석이 있으므로 그 범인을 잡지 못한다는 것은 경찰과 검찰 모두의 수치로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확실히 뻔뻔하다. 몰리는 기분이 나쁜 티를 있는 대로 내며 인상을 팍 썼다. 새내기 변호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맹렬한 감정표현이었지만 뭘 해도 순진한 인턴 내지 수줍은 여학생처럼 보이는 그녀가 인상을 쓴다고 해서 정말로 험악해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어떤 식으로든 존에게 위로가 된 모양이었다. 존은 그의 전 직장동료이기도 했던 토머스 그렉슨에게 웃어보였다. 그 미소는 매우 잔잔하고 온화해보이는 것이었다.
“난 자네가 왜 기소를 서둘렀는지 알아.”
“이봐, 존.”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이 동네엔 하나같이 상어들뿐이니까 말이야. 물 속에 퍼지는 피냄새라도 맡은 거겠지. 자, 이게 네가 얻어갈 교훈이야, 토미. 네 동료들과 상관에게 똑똑히 전해. 셜록 홈즈가 있든 없든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는 아직 안끝났어. 너희들이 날 홈즈의 종자로 보든지 말든지 난 상관 안해. 다만 두 번 다시 이따위로 우리 의뢰인을 괴롭힌다면 네 상관의 주검사장 연임은 영영 물건너갈테니 그리 알아.”
만약 존이 이 말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목소리를 깔고 위협적으로 말했다면 별로 무섭지 않았을 거라고 몰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존은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았고 목에 힘을 주지도 않았다. 몰리 후퍼는 존보다 덩치가 2배는 더 큰 토머스 그렉슨의 억지로 빳빳하게 든 목 아래로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렉슨은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존 왓슨은 그렉슨을 대표로 검찰 전체를 상대로 한 선전포고를 날릴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목소리로 몰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첫 승리를 축하해요, 몰리 후퍼.”
몰리 후퍼는 자동적으로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손바닥을 마주하여 붙잡기에는 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있는 존의 손을 몇초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존과 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몰리가 바텐더에게서 술을 받아가지고 탁자로 왔을 때, 존은 부인과 통화 중이었다.
“응, 아이다. 우리가 이겼어. 지금 새로 온 동료에게 축하의 의미로 술 한잔 사는 중이야. 늦을 지도 모르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정한 음색이기는 했지만 신혼부부 사이의 통화라고 하기에는 뭔가 삭막했다. 최소한 함께 산지 10년은 되었거나..... 몰리는 생각했다. ‘룸메이트’ 그러나 확인해볼 수는 없다. 무슨 수로 확인해본단 말인가. 존과 몰리는 친구가 아니다. 아직은 그저 동료일 뿐이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존의 눈은 풀려있었다. ‘지금껏 계속 같은 양을 마셨는데?’ 몰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기 잔을 바라보았다. 그런 몰리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존이 말했다.
“당신은 아주 신기한 재주가 있군요, 미스 몰리 후퍼.”
“예, 예?”
“눈으로 말을 하네요. 셜록이 왜 맨날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 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쳐댔는지 알겠어요. 정말로 생각이 들릴 수도 있군요.”
“저기, 존...”
“당신도 나와 셜록이 서로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아니에요?”
몰리가 당황한 나머지 어버버거리고 있는 사이, 존은 묻지도 않았건만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존은 지금으로부터 1년 4개월 전, 이주민보호센터에서 무료변론할당을 채우기 위해서 받은 의뢰로 인해 아이다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이었는데 그녀의 부친은 악명높은 뒤발리에 독재시절 추방당한 아이티 엘리트들 중 한 명이었다. 부친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두고 아이티 정부의 암살이라고 굳게 믿은 그녀는 도미니카 정부는 자신을 보호해줄 의지도 능력도 없다며 미국 정부에 정치적 이유로 망명을 신청했다. 존은 그녀를 위해 1년간 고군분투했으나 망명신청은 기각되었고 그녀는 본국으로 추방당할 위기에 놓였다. 거기에서 그만 포기해버렸다고 해도 그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기각결정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다가 오히려 존을 위로할 지경이었다. 아이다는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늘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미국으로 밀입국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의지보다는 운이 작용한 결과였지만 존과 함께 한 1년 동안 그녀는 강해졌다. 아이다는 그것이 존 덕분이라고 말했다. 아이다는 존을 보며 진짜 열정과 인내란 어떠한 것인지 배웠다며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자신의 운명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존이 무엇을 보았는지는 몰라도 망명신청이 기각당하고 이민국 요원이 찾아온 날, 존은 그들 앞에서 말했다. ‘우린 결혼할 겁니다.’
“그걸 그 사람들이 믿었어요?”
“당연히 안믿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우린 판사 앞에서 결혼서약과 반지를 나눴고 정식으로 혼인신고도 했는데? 뭐, 아직도 한 달에 한번씩 점검차 이민국 요원이 찾아오기는 해요. 그래봤자 아무 것도 못 건지겠지만. 우린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침대에서 자요. 아이다는 신경쓰지 않아요. 내가 게이라는 걸 아니까.
셜록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죠. 나중에 불같이 화를 냈어요. 그럴 거라 예상했고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 말도 안했던 거라 조금 미안했던 건 사실이에요. 근데 그 자식이 지껄이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보니 너무 열이 받는 겁니다. 아이린 애들러랑 놀아나느라 내가 뭘하는 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건 제 놈이 아니냔 말이지. 아마도 그 자식의 핸들러, 사이드킥, 종자, 펫, 기타등등으로 취급받는 게 슬슬 지겨워졌던 모양이에요. 아니면.... 나는 한때 그 모든 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헌신, 사랑, 충성 그 무엇이라 불러도 좋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젠 잘 모르겠다’가 되어버린 거예요. 나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어졌는데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그 모든 것을 내게 기대하더군요. 내가 셜록의 곁에 있었던 건 그냥 내가 그의 곁에 있고 싶어서였어요. 불세출의 천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받는 게 억울해서도 아니고 그의 천재성을 빌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서도 아니고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구제해주고 싶어서도 아니었지요. 그런데 내가 마음이 변해서,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이 더 이상 하고 싶어지지가 않아서 – 그게 대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 그만두니 모두가 날 비난했어요. 오직 그렉 한 사람만이 그러지 않았죠. 내가 셜록을 놓아버림으로써 발생하게 될 모든 피해를 최전선에서 마주쳐야 하는 사람인데 오직 그만이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이다와의 결혼식에 증인으로 와준 사람도 그 사람이었죠.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만한 셜록은 내가 정말로 자기를 무시하기 시작하자 두 달 동안 그렉을 들들달달 볶아서 신경쇠약을 일으키게 만든 다음, 우리의 숙적 애들러 앤 모리어티로 이직해버렸죠. 만약 이게 복수였다면 나를 내쫓는 것으로 마무리했어야 했어요. 어느 로펌에서 셜록 홈즈를 보유할 수 있는데 존 왓슨을 내보내지 않겠어요? 하지만 아니에요, 그렇게 쉽게는 안 되죠. 셜록 홈즈에게 ‘No’라고 말한 대가가 그리 가벼울 리 없죠. 그 쌍놈의 새끼는 그렉과 마이클, 샐리가 내 결혼식에 참석해서 증인이 되어줬던 걸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오살맞아 뒈질 작자같으니라고.“
몰리는 생각했다. ‘존은 술에 취하면 욕을 하기 시작하는 구나.’
그로부터 35분 후, 몰리는 존의 술버릇이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욕을 하기 시작하는 것에서 그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존은 인사불성이 되어 탁자에 엎어진 채로 잠이 들었다. 작은 체격이라 해도 정신줄을 완전히 놓은 성인남자는 물먹은 솜 푸대처럼 무거웠다. 도심의 거리 한복판에서 정신을 잃은 존 왓슨을 어깨에 짊어진 채 몰리 후퍼는 자신이 배달장소도 모르는 택배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몰리는 전화연결 통화음을 들으면서도 앞으로 자기가 하게 될 말이 자기 머릿속에서 미리 리허설한 것만큼 이상하게 들리지 않기를 기도했다. 신호가 꽤 오래 걸렸기에 몰리는 더욱 긴장했다. 한밤중에 자다가 남편의 휴대폰으로 온 모르는 여자의 전화를 받게 된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 딸깍- 마침내 전화가 연결됐다.
‘존? 많이 늦을 건가요?’
“아 저, 처, 처음 뵙겠습니다. 미세스 왓슨. 전 몰리 후퍼라고 합니다. 전 왓슨씨의....”
‘미스 후퍼! 말씀 많이 들었어요. 재판에 이긴 걸 축하드려요! 무슨 일이시죠?’
몰리의 어깨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몰리는 하마터면 휴대폰에다 대고 한숨을 쉴 뻔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녀는 남편을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굳이 그걸 말리고 집주소를 가르쳐달라고 했던 이유를 몰리도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사실 별로 설명할 것도 없다. 고약한 호기심, 그것 말고 달리 뭐가 있겠는가?
셜록 홈즈가 입사하기 전에도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가 규모에 비해 견실하고 유능한 로펌이었던 것처럼 셜록 홈즈와 만나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전에도 존 왓슨은 훌륭한 변호사였다. 베이커 가에 있는 최첨단 설비가 갖추어진 펜트하우스나 벨그라비아에 있는 최고급 주택가만은 못해도 갈색 사암으로 지어진 연립주택은 제법 고가의 주거지였다. 현관 앞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 3층에 왓슨이라고 적힌 명패 옆 벨을 누르자 누구냐고 묻는 소리도 없이 바로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아이다 왓슨이 이미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존!”
단언컨대, 그 흑인 여성은 지금까지 몰리가 직접 대면해본 여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정말 감사해요, 미스 후퍼. 저 사람이 저정도 마시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네요. 재판에도 이겼다면서....”
신혼부부라기보다는 룸메이트 같다고 생각했던 인상을 날려버리듯 남편을 보살피는 아이다 왓슨의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 없었다. 존은 자기가 게이이며 그린카드를 위한 위장혼인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으니... 몰리 후퍼는 천방지축 뻗어나가는 자신의 와일드한 상상력을 호되게 후려쳤다. 하지만 그녀의 호기심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낯짝이 두꺼웠다. 과연, ‘그’ 셜록 홈즈가 위협을 느낄 만도 하다. 그녀는 멋도 모르는 중산층 출신 자원봉사자들이 아이티 출신의 불법이민자라는 말을 듣고 떠올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영어를 약간 이국적인 액센트와 함께 구사했고 탠디 뉴튼이나 할리 베리를 떠올리게 하는 미모를 가졌다. 셜록 홈즈가 존이 게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도 결혼이라는 법률적 효력을 갖는 관계로 엮이는 걸 원하지 않을 정도의 미인이었던 것이다. 팬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굽는 지라 비록 존이 진짜 ‘썸씽’은 유사언론매체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자기랑 셜록이 아니라 셜록과 아이린 사이에 있다고 말해줬지만 몰리는 존이 술주정하며 토로했던 억울함을 살짝 깎아서 듣기로 했다.
“아니에요, 부인. 오히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뵙게 돼서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껏 말렸어야 했는데... 맹세컨대 진짜 얼마 안마셨거든요. 저와 거의 비슷하게 마셨는데...”
1. 갑자기 총알구멍이 너무 쓰기가 싫어졌다. 케이스픽이라고 그런 거라 생각하고 다운튼 애비 크리스마스 스페셜을 본 김에 시대극을 써보자 싶었다.
2. 굿와이프를 봤다. 굿와이프를 보다보니 법정물에 대한 나의 유구한 애정과 집착이 생각나 예전에 정줄 놓고 휘갈겨두었던 걸 손 좀 봐서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몇몇 분들이 나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이유로 그 괴발개발을 섹시한 스토리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걸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케이스픽인데 어째서 이건 써지는 걸까?! 문제는 케이스픽이 아니었던 걸까?!
3. 케이스픽이 원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헉 설마 내가 드디어 호모질이 신물이 난 것이란 말인가! 엑데퓨의 에릭찰스가 심드렁했던 것도 내가 에릭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호모가 싫어졌기 때문이란 말인가! 하지만 총알구멍 어디에 호모가 있다고?! 착한 아이에게만 보이는 호모도 아니고!
4. 결국 결론은 호모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셜록이 문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건현장과 물증이 있을 때 추리의 주체를 셜록으로 잡으면 셜록의 천재성을 위해서는 사건 현장에서 바로 어느 정도의 진상을 태권도 유단자가 송판을 일격에 격파하듯 일필휘지로 파악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진상을 다 알아버리면 케이스픽을 쓰는 이유가 없어진다. 따라서 현장에 바로 보이는 증거로부터 셜록이 알아낼 수 있는 부분과 알아낼 수 없는 부분을 구분하며 이야기를 진행해야 하는데 이게 그냥 케이스픽보다 두세배는 더 귀찮은 작업이었던 것이다. 결국 셜록과 케이스가 함께 등장하는 모든 시놉시스가 아웃. 나의 OTP은 셜존이라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주구장창 존+셜록 외 기타 인물만 쓰고 있다.
5. 그런데 요새 읽는 영문팬픽에서 씬이 나올라치면 그냥 넘어가는 것으로 보아 호모가 예전만큼 땡기지 않는 것도 사실인듯. 이게 다 3시즌 때문이다.
-1-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는 설립한 지 25년째인 중소로펌으로, 업계에서 전통적으로 명망있는 로펌이라 할 수 없었지만 최근 몇 가지 큰 사건들에서 연달아 승소하며 일반 대중들에게도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 ‘몇 가지 큰 사건들’은 모두 대기업과 정부, 군대 등을 상대로 한 것으로 그 중 실제로 승소판결을 받은 건은 2건에 불과했으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골리앗이 먼저 협상을 제의하여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화해를 이룬 점은 분명 주목받을 만한 일이었다. 실로 회사의 수준과 평가등급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만한 기회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목표는 - 그 목표를 추구한 사람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 좌절됐다. 우선, 창립 파트너인 그렉 레스트레이드가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개인적 불행이 겹친 탓에 그답지 않게도 신경쇠약증세를 보이며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고 둘째로 기명 파트너는 아니나 곧 그 자리에 오를 예정이었던 셜록 홈즈가 자신이 이때까지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에 기여한 모든 공적을 뒤로 하고 다른 로펌으로 이직했다. 갓 로스쿨을 졸업한 몰리 후퍼는 이런 시기에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에 채용되었다.
“몰리 후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근사한 회색 여성정장 차림의 흑인 여성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샐리 도노반, 형사사건팀 팀장이에요. 승선한 것을 환영해요.”
간단한 악수 뒤에 샐리 도노반은 ‘뛰지 않으면서도 남들보다 2배 속도로 움직이기’ 신공을 펼치며 몰리를 끌고 탕비실, 자료실, 회의실, 상담실 등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몰리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고 샐리 또한 그녀가 한번에 기억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존 왓슨은 기명 파트너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기명 파트너가 되리라고 기대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회사 내에서뿐만 아니라 업계 내에서, 심지어 라이벌 회사의 사람들에게도 널리 인정받고 호감과 호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 좋은 변호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입증했으며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를 사회적 평가를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었던 계기가 된 빅 케이스들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존, 잠깐 시간 있어요?”
“샐리, 어서 들어와요.”
“존, 몰리 후퍼를 소개할게요. 이번에 들어온 신입이에요. 몰리, 여기는 존 왓슨, 당신의 멘토이자 직속상관이에요.”
“승선을 축하해요, 몰리 후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미스터 왓슨.”
“John, please. 잠시 앉겠어요?”
“간단하게 하세요, 존. 참, 나중에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마사가 전해달랬어요.”
“알았어요. 이따 봐요, 샐리.”
존의 사무실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전망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존은 몰리에게 자리를 권했고 몰리는 존의 맞은 편에 엉거주춤 앉았다. 존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았고 정장과 구두에 익숙하지 않아 어설퍼보이는 그녀의 몸가짐에 주목했다.
“우선, 당신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 있군요. 고마워요, 몰리. 날 승진시켜줘서.”
“예?”
“15년동안 우리 회사에 의료과실소송담당 변호사는 나 혼자였거든요. 몰리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의료과실소송‘팀’이 꾸려졌고 나는 팀장이 됐지요.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어요?”
“.....예.”
“그런데도 우리 회사에 오고 싶어요?”
“물론입니다! 저, 전 언제나 여러분들이 하신 일을 존경해왔어요. 피터슨 vs 노버리 사건 때는 방청도 갔는 걸요. 전 스크랩북도....”
“그 ‘여러분들’이라는 건 정확히는 셜록 홈즈와 나머지를 의미하는 거겠죠?”
“아니예요! ....하지만 제가 그 분을 다른 분들보다 조금 더 존경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면 거짓말이겠죠.”
시무룩해진 몰리를 보는 존의 마음은 복잡하지도 심란하지도 않았다. 그 자신도 그 사실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유감이네요, 몰리. 셜록 홈즈는 빌어먹을 개자식에 전생의 업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고통의 근원같은 작자지만 내 편으로 두었을 땐 그보다 더 든든한 남자가 없었죠. 그 때문에 우리 회사에 지원한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제가 애들러 앤 모리어티에 채용될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혹시 그 회사 이름이 왜 애들러 앤 모리어티가 됐는 줄 알아요? 대부분의 자산은 모리어티측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글쎄요, 알파벳 순서?”
“동전던지기요. 제임스 모리어티가 동전던지기에서 지는 바람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간판에 자기 이름을 두 번째로 올리게 됐죠.”
“....진짜요?”
“당사자한테 들었어요. 자, 그럼 오늘 일정을 시작해볼까요?”
마사 루이즈 허드슨의 전문분야는 건물 및 토지 등 부동산 관련 분쟁으로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가 설립될 당시 대부분의 재정적 자원은 그녀가 축적한 자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재정적 자원이 그녀의 몫이었다면 인적 자원은 레스트레이드의 담당으로, 존 왓슨을 비롯하여 샐리 도노반, 최고이자 최악의 선택이었던 셜록 홈즈까지 모두 그가 끌어들인 인재였다. 그렉 레스트레이드가 공판정이라는 이름의 아레나에서 가장 빛나는 글래디에이터였다면 마사 허드슨은 이 회사가 조직으로서 굴러갈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었다. 소송전문 변호사들 특유의 화려함은 없을지언정 마사 허드슨이야말로 이 회사의 진짜 엔진이었다. 25년 동안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친구인 그렉은 병원에 드러누워있고 회사의 가장 큰 전력이자 귀중한 자산이었던 셜록 홈즈는 제대로 된 사직서나 통보, 인수인계조차 없이 다른 로펌으로 가버린 이 초유의 위기 앞에서도 마사 허드슨은 침착했다. 3명의 어시스턴트에게 동시에 명령을 내리면서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존 왓슨을 향해 ‘유후~’하는 특유의 인사를 건낼 정도로 말이다.
“어서 와, 존. 부탁할게 있어.”
“마사, 안돼요.”
“나야말로 안돼. 지금 샐리가 뭘 하고 있는 줄 알아? 이혼소송을 맡고 있다고. 그 샐리가 말이야. 헬하운드 도노반이 검찰이 아닌 바람난 남편 뒤를 쫓고 있다고. 자네에겐 안된다고 말할 권리가 없어.”
“마이크는 뭐하는데 샐리가 이혼소송을 해요?”
“그렉이 맡았던 일 중 3분의 1을 내가 하고 있어. 내가 하고 있던 세금 문제를 대신 맡아줄 사람이 마이크 밖에 더 있어? 자네 세법 알아?”
“랭데일은?!”
“나와 마찬가지로 그렉이 맡았던 일 중 3분의 1을 하고 있지. 남은 3분의 1은 빵부스러기처럼 이 회사의 모든 변호사들에게 골고루 뿌려질 예정이야. 지금 자네에게 가장 첫 번째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냉큼 받아.”
“저한텐 돌봐야할 뉴비도 있어요!”
“흥, 자네가 그렇게 caretaker여서 셜록이 회사를 나갔나 그래? 입다물고 일이나 해. The people vs. 맥팔레인 사건은 자네가 맡아.”
“형사사건이잖아요!”
“우리 회사가 가지고 있었던 최고의 형사전문변호사랑 자네가 같이 했던 사건이 얼마인데 이거 가지고 징징거리는 거야? 냉큼 나가서 일 안해?!”
맥팔레인이 기소된 범죄는 조너스 올데커에 대한 1급 살인이었다. 중범죄이니 만큼 구속영장신청이 받아들여져 현재 맥팔레인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는 절박하고 불안해했으며 특히 자신의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가 셜록 홈즈가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절망했다. 몰리 후퍼는 그런 의뢰인을 정서적으로 안정시키는 존 왓슨의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살인의 동기부터 방법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몰리는 이 남자가 진짜 무죄라면 이렇게까지 운이 없기도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눈 앞의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신뢰가 간다기보다는 너무 심약해보였던 탓이다. 그것도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유산상속을 목적으로 한 계획살인을? 돌아오는 길 내내 몰리는 맥팔레인이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또 했다.
“어떻게 생각해요?”
“예? 뭘요?”
“그가 무죄라고 생각해요?”
“...전 변호사는 그런 거 신경 안쓰는 줄 알았는데요.”
“세상에는 자기 의뢰인이 무죄라고 믿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변호사들이 있으니까. 내가 보기엔 몰리도 그런 타입인 거 같은데.”
“글쎄요, 살인을 저지를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처음에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해요. 어느 바보가 자신이 상속인으로 지정된 바로 다음날 피상속인을 살해하겠어요? 그것도 사고사나 자살로 꾸미지도 않고 살인임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방법으로 말이에요.”
“일종의 역발상일 수도 있죠. 진짜 동기는 숨겨져 있는 거고. 명확한 동기를 눈 앞에 펼쳐놓음으로써 검찰로 하여금 그를 계속 쫓도록 만드는 거예요. 진짜 동기를 찾았다고 생각한 검찰은 더 이상 수사를 진행시키는 대신 사건을 서둘러 기소하고 공판정에서 그 동기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변론하여 배심원들의 합리적인 의심을 사서 무죄판결을 받는 거죠. 그 뒤에 진짜 동기가 밝혀진다해도 일사부재리로 그는 영원히 자유죠.”
“하지만 그의 불안증세는 진짜처럼 보이던데요. 눈 밑에 늘어진 다크써클에다 항시 긴장되어있는 어깨와 팔하며... 진범이라도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음, 제가 너무 잘 속아넘어가는 걸까요.”
“몰리, 머리로 생각하려 하지 말아요. 당신 직감이 뭐라고 하나요?”
몰리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 존 맥팔레인씨가 무죄라고 믿어요. 아니, 생각해요. 아니, 그런 것 같아요...”
“좋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정말요?”
“검찰은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어요. 살인의 동기도 있고 증인도 있고 범행도구도 있고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피의자의 피묻은 지문도 있지요. 그에 반해 우리 불쌍한 의뢰인에게는 제대로 된 알리바이조차 없어요. 이 정도면 가히 슬램덩크라고 부를 만 한데, 실제 형사사건에 이런 슬램덩크가 얼마나 되는 줄 알아요?”
“얼마나 되는 데요?”
“없어요.”
“.........”
“게다가 피해자가 마음에 걸려요.”
“피해자가요?”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연고없는 청년에게 자기 전재산을 물려주겠다고 결심했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가장 먼저 할 일이 뭐겠어요? 자기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상담을 하겠죠. 하지만 조너스 올데커는 그냥 맥팔레인에게 찾아가서 다짜고짜 수기로 적은 자기 유언장을 내밀었어요. 그리고 그날 바로 맥팔레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서류들을 보여줬고요. 마지막 살인이란 클라이맥스를 맞이할 때까지 모든 사건의 진행이 피해자의 주도 하에 이뤄지고 있단 말이죠. 난 이게 정말정말 수상해요.”
“....거기까지 생각해놓으시곤 저한테는 직감이 어쩌고 저쩌고 하셨단 말이죠.”
존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직감이 좋은 사람이랑 일하는 게 좋거든요.”
존과 몰리가 회사로 돌아왔을 때, 존의 비서는 그에게 사무실에 그의 영원한 ‘페르소나 논 그라타’가 와있다는 것을 알렸다. 잔머리 하나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헤어, 강한 골격의 아름다운 얼굴, 피처럼 붉은 입술, 크림색 블라우스와 길게 슬릿이 들어간 베르사체 스커트. 루부탕의 스틸레토 힐.
“Good afternoon, 존, 기다리고 있었어요.”
“미스 애들러. 반갑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군요. 몰리, 인사해요. 이쪽은 아이린 애들러, 우리 회사한테 연달아 세 번 진 애들러 앤 모리어티의 기명 파트너이자 동전던지기의 승자, 셜록 홈즈의 새 보스죠. 미스 애들러, 여기는 몰리 후퍼, 신입변호사이자 내 ‘새’ 동료입니다.”
‘동료’라는 말에 시선이 좀 더 오랫동안 머무는 것 같았지만 몰리 후퍼는 아이린 애들러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 순진하고 연약해보였다.
“정확히는 한번 패소에 두 번의 조정합의죠.”
“우리 편에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결정된 조정합의 말씀이군요.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제 초라한 사무실에 발걸음을 한 건가요? 셜록은 이미 그쪽에 있는데.”
“미스 후퍼, 잠시 자리를 좀 비켜주시겠어요?”
“왜요? 그녀가 들으면 안되는 얘기라도?”
“좀 개인적인 일이기는 하죠.”
“정말 흥미로운 일이겠군요. 이런 걸 혼자 듣다니 미안해서라도 보내면 안될 것 같은데요. 몰리, 여기 앉아요.”
몰리는 냉큼 앉았다.
“....셜록이 쉽지 않을 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댁이 해야 했을 일을 안했던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닐텐데요. 그 역은 더더욱 그렇고.”
“오? 그건 내가 셜록을 스카웃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인가요?”
“정반대네요. 해야 할 일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꼭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당신 둘은 아무 잘 맞는 커플이 될 겁니다. 화환이라도 보낼까요?”
“존.”
여성스럽고 울림이 풍부한 목소리가 단호하게 그의 이름을 말했다. 존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았다.
“우리 회사로 와요. 그렉은 무너졌어요. 벌써 소문이 나고 있어요. 죽을 작정이 아니면 6개월 이내에 업무에 복귀하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의사가 그랬다면서요? 이 업계에서 6개월의 공백은 치명적이에요. 마사 허드슨은 훌륭한 관리자죠. 하지만 이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저 훌륭한 관리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스타가 필요하죠.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스타였어요. 지금 그는 떨어졌고 당신네 회사에서 가장 크고 환하게 빛나던 다른 별은 내 손안에 있죠.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는 지금 판도라의 상자나 마찬가지예요. ‘희망’말고는 남은 게 없어요.”
하지만 그 말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셜록이나 당신같은 사람들에게 나는 꽤 느리고 둔한 인간이죠. 하지만 반복은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학습법이라, 당신과 여러번 마주치다보니 나도 알게 된 게 좀 있어요. 당신은 자기가 불리할 때 가장 당당하게 굴거든. 무슨 일이죠? 알고 보니 셜록은 도저히 목줄이 채워지지 않고 당신은 당신이 생각한 만큼 유능한 핸들러가 아니던가요?”
몰리는 지금 저 표정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만큼만 아이린 애들러에 대해서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존, 애원하게 만들지 말아요. 어쩌면 다음번에는 애원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어요.”
“셜록도 자주 언급했던 건데, 나한테는 약점이 있어요. 여자에 대해서, 특히 아름다운 여성에 대해서는 종종 잘못된 판단을 하죠. 그리고 미스 애들러, 당신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론의 여지없이 내 눈길이 닿아보았던 중에 손꼽히게 아름답죠. 그래서 말인데, 내 사무실에 당신이 찾아와 앉아있는 모습을 보는 건 내 눈과 마음에 꽤 큰 즐거움을 준답니다. 아마 내가 당신네 회사로 가게 되면 그럴 일이 별로 없겠죠? 더 자주 다녀가요. Do please me.”
정적이 흘렀다. 눈싸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뚫어져라 상대를 바라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아이린 애들러였다. 시선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고개만 돌려 존을 바라보며 아이린 애들러는 입에 문 쓴 약을 뱉듯이 말했다.
“정말이지, 당신은 칭찬을 모욕의 수단으로 쓰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요.”
“칭찬 고마워요. 지금 입고 있는 치마가 마음에 드네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당신 허벅지지만.”
만약 사무실 문이 유리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쾅 소리가 나게 닫았을 것이다.
“그녀가 홈즈씨를 데려간 건가요?”
“몰리, 누가 들으면 애들러가 어린애나 금치산자를 유괴해간 줄 알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마치 자기 때문에 셜록 홈즈가 이직한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그 수법에 넘어가지 말아요. 저 여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여서 지금 그 자리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인 인물이니까. 셜록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해요. 어디에 있든 누구랑 있든 마찬가지죠. 만약 내가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의 기명 파트너였다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손이 발이 되도록 셜록 홈즈의 기미를 맞추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다행히도 난 기명 파트너가 아니죠. 자기 흥미를 끌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라도 맡지 않았던 건 여기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딜가나 셜록 홈즈가 셜록 홈즈일 뿐이라면, 그의 급료수표에 서명된 이름이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건 애들러 앤 모리어티건 무슨 상관인가요.”
“.....어째서 말리지 않았어요?”
“무엇을?”
“홈즈씨가 떠나는 걸요.”
존은 허탈한 듯 웃었다.
“난 그를 말릴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어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두 분은 친구였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죠. 근데 내가 결혼을 하자...”
“.....”
“그가 말하길, 내가 자기 마음을 아프게 했다더군요.”
‘이런, 젠장.’ 몰리는 생각했다. ‘여기까지 알 필요는 없었는데.’
-2-
검찰 측에서 넘겨준 검시보고서와 경찰의 수사보고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몰리는 자신의 의뢰인이 무죄임을 넘어서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는 확신이 섰다.
“이건 말도 안돼요!”
“불행히도 대배심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피해자 시신이 이빨은 다 뽑히고 손가락은 잘리고 뼛속까지 바삭바삭하게 탄 채로 발견되었는데 어쩌다보니 그 옆에 피해자 소유의 지팡이와 반지, 맞춤복의 단추가 놓여져있길래 가정부가 신원을 확인해주었다고요? 피해자의 신원을 은닉하기 위해 그 고생을 하고 불까지 질렀는데 정작 시신은 저택 뒤의 목재야적장에다 버려요? 상속재산을 노린거면 피해자 신원은 왜 감추려고 하고 실종으로 사망을 인정받을 거면 시신을 최소한 한술 더 떠서 유산을 노리고 살해했는데 정작 피해자의 재산을 살펴보니 대부분은 이미 옛날에 현금화되어서 소위 공동경영자라는 코넬리우스 로저의 계좌로 이전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계좌는 케이먼 섬에서 개설되었네요. 피고인에게 돌아오는 건 기껏해야 낡아빠진 저택과 목재야적장 뿐인데 그 중 목재야적장은 재미있게도 시신이 발견된 장소로 시신과 함께 전소된 곳이기도 하죠. 존 맥팔레인은 회계사예요! 그 사람이 돈 때문에 피상속인을 죽이기도 마음 먹었다면 최소한 범행 전에 자기 몫으로 떨어질 돈이 어느 정도일지 계산은 해보지 않았을 까요? 무엇보다 최소한 자기가 상속인으로 지정된 바로 그날, 그것도 처음으로 피해자의 저택을 방문한 바로 그 날 범행을 저질렀다고요? 검찰은 정말 진지하게 아무런 전과도 없고 폭력적인 습성도 없는 사람이 아무런 재정적 문제에 처해있는 것도 아닌데 기껏해야 65만 달러 짜리 부동산을 상속받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고 믿는 건가요? 그것도 이 불경기에?!”
“논쟁적이긴 하지만 말이 안되는 건 아니죠. 범행 자체는 우발적일 수도 있는 거고.”
“oh, come on! 상속재산을 노린 계획범죄인 동시에 우발적 범행일 수는 없어요! 제정신이 박힌 배심원이라면 아무도 피고인이 진범이라고는 믿지 않을 걸요!”
“하지만 배심원은 특정인에게 책임을 지우기를 좋아하죠. 살인 사건 같은 경우엔 자기 눈 앞에 있는 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하구요. 단순히 말이 안된다는 것만으로는 무죄판결을 받는데 충분하지 못해요. 우린 시나리오를 완성해야 해요.”
“좋아요. 그럼 우리 전략은 뭐예요?”
“우선은,”
존은 보고 있던 서류를 덮었다.
“중국 음식이요.”
어느 새내기 변호사가 그렇지 않겠느냐만은 몰리 후퍼는 자기 의뢰인이 무죄라고 생각하자 마치 불도저같은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존은 자신이 피고인측 변호인에게 요구되는 능수능란함으로 엔터테인먼트를 기대하는 배심원들의 은밀한 욕망은 충족시켜주고 딱 봐도 순진한 열정으로 가득한 몰리와 존 맥팔레인의 심약하고 무해해보이는 인상으로 배심원의 양심을 자극시킨 뒤 ‘합리적 의심’이란 카드를 깃발처럼 흔들면 무죄판결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검찰에서 제시한 유죄협상을 거절했다.
그리고 제1차 공판이 끝났다. 제3자의 눈에 분명 한 팀인 것처럼 보이는 두 변호사가 넋을 빼고 법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은 꽤 한심해보였을 것이다.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존.”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다구요.”
“검찰 측에서 치사하게 나온 거잖아요.”
“그래도 난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하지만 의심을 품기엔 난 너무 오만했죠. 아마도 셜록과 함께 붙어다니면서 검찰을 얼간이로 취급하는데 익숙해져있었나봐요. 한심하죠. 다른 사람의 능력으로 위세를 부리다가 망하는 꼴이라니.”
검찰은 처음부터 살해동기를 금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검찰이 보기에 이것은 치정사건이었다. 다만 치정과 살인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찰은 피고인의 모친인 주디스 맥팔레인을 적대적 증인으로 신청하여 피고인의 아버지인 헥터 맥팔레인과 그녀, 조너스 올데커가 얽혀있는 케케묵은 과거의 앙금을 들추어냈다. 원래 어머니란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터라 증인으로서의 신빙성이 가장 떨어진다. 존은 피고인의 어머니를 불러내어 자기 아들이 얼마나 정직하고 선량하며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아이인지를 증언하게 하는 신파극으로 배심원들을 지겹게 만들 생각이 없었기에 피고인의 성격에 대해 증언해줄 사람도, 피고인이 재정적으로 살인을 무릅쓸 만큼 곤란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언해줄 사람도 모두 피고인의 직장동료 중에서 골랐다. 다행히고 존 맥팔레인은 그 흔한 카드빚 하나 없었고 상사와 동료를 가리지 않고 평판도 좋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검찰의 공격 앞에서 무용했다.
몰리는 이의를 제기 후 다시 자리에 앉는 존의 앞에 놓인 노란 노트패드에다 커다랗게 물음표를 그렸다. 존은 그 밑에다가 me too라고 적었다.
“고(故) 헥터 맥팔레인씨가 세인즈 버로우즈 병원 중환자실에서 임종할 당시 그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은 증인이 아니었죠?”
“이의있습니다, 재판장님.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관련성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곧 드러날 겁니다.”
“그렉슨씨, 좀 더 서두르세요. 증인은 질문에 대답해주십시요.”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입니다.”
“3일 동안이나요? 사실 증인은 고인의 하나뿐인 아들인 피고인에게도 부친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연락하지 않았죠. 그가 CPA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죠.”
“이의있습니다, 재판장님. 지금 증언하는 사람이 증인입니까, 그렉슨 씨입니까?”
“그럼 고쳐서 질문하겠습니다. 증인이 피고인에게 아버지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맥팔레인씨가 피해자인 조너스 올데커와 불륜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입니까?”
온 재판장이 술렁거렸다.
“이의있습니다! 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증인은 아닙니다! 그렉슨씨는 지금 증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재판장님! 이건 직접적으로 피고인의 살해동기와 관련된 사항입니다! 맥팔레인 부인은 분명히 피해자인 조너스 올데커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고 그녀의 아들에게는 막강한 정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비록 피고인이 피해자에 대해 품은 원한이 직접적인 것은 아니라고는 하나....”
“Give me a break! 전도유망한 장래를 가진 32살의 전문직 청년이 홀어머니에게 정신적으로 억압당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이곳은 메사추세츠의 법정이지 히치콕 영화가 아닙니다!”
“Well, he still lives with his mother!”
“Are you serious?! 정말 이렇게 나오기냐? 그럼 28살까지 삼촌이랑 같이 산 넌 뭔데? 게이 근친상간자?”
“재판장님!”
“미스터 왓슨! 미스터 그렉슨! 여긴 법정이고 두 사람은 검사와 변호인이요! 직분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세요!”
백짓장보다도 하얗게 질린 존 맥팔레인과 명백하게 동요한 배심원을 번갈아보며 어쩔 줄 몰라하던 몰리는 연달아 내리쳐지는 재판봉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뭔가 사인을 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존을 발견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건 거의 조건반사 수준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한 5초 정도의 시간을 허비했다.
“재판장님. May I approach?”
“부디, Ms. hooper. 환영합니다.”
판사석 앞으로 세 명의 카운슬러가 옹기종기 모였다. 몰리는 중간에 가끔 더듬기도 하고 목소리를 떨기도 했으나 말이 길어질수록 침착함이 돌아왔고 12년간 District attorney직을 수행하고 있는 토마스 그렉슨에 맞서 팽팽하게 싸웠다.
“하지만 재판장님. 저희는 모든 증거자료를 피고인 측에 제출했습니다. 맥팔레인 부인을 조사한 형사의 수사보고서는 물론 맥팔레인 부인의 이름도 증인신청목록에도 올라와있구요. 피고인 측의 부주의와 무능력함을 저희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재판장님, 검찰의 행위는 전형적인 ‘매복’입니다. 공소장에 기재된 범행동기는 명백하게 상속재산에 대한 것이었고 저희 의뢰인인 맥팔레인씨가 첫 번째로 수사선상에 오른 것도 바로 그 동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동기의 설득력이 약해지자 경찰은 다른 용의자를 고려해보는 대신 저희 의뢰인에게 들어맞는 동기를 찾아낸 것입니다.‘
“신참 변호인이라 미스 후퍼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범행동기는 공소사실이 아니라 단순한 공격방어방법에 불과합니다.”
“미스터 그렉슨, 좀 더 열심히 공부하셨어야죠. (You should‘ve researched harder.)”
흐뭇한 시선으로 몰리를 바라보고 있던 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몰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The People vs Osmand. 범행동기는 공소사실을 특정함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소장에 기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기재한 이상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선례가 있습니다.”
“재판장님! Osmand 케이스는 저희 사건과는 많은 점에서 사실관계가 다릅니다! 그 법리를 이 케이스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미스 후퍼, 솔직히 본 법관도 그렉슨씨의 견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렉슨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존을 돌아보고 몰리는 즉각 풀이 죽었지만 존은 그 뒤의 말을 기다릴 정도로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사건이 항소법원에서 뒤집히는 것도 싫으니까 이번에는 변호인측의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변호인 측에 48시간을 주겠습니다. 변경된 범행동기에 맞는 변론을 준비해오세요. 휴정합니다.”
28시간이 지난 후, 몰리와 존의 두뇌는 작동하기를 멈췄다. 한 사람은 컨퍼런스 룸 책상 위에 엎어져있고 다른 사람은 비교적 점잖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두 사람 모두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음은 명백했다. 수사보고서와 로펌에서 고용한 조사관의 보고서를 거꾸로 외울 수도 있을 만큼 읽어댔지만 답이 없었다. 신입이라고 눈치를 보는 몰리를 좀 씻고 잠깐 잠이라도 자라고 내보낸 것은 존이었다.
“저기, 존.”
“음?”
“부인께 연락하지 않으셔도 되나요?”
누적된 피로와 수면부족으로 혈색이 살짝 빠져나간 얼굴이었지만 미소는 진심어린 것이었다.
“아까 문자를 보냈어요. 아이다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거예요.”
몰리는 가까스로 아이다가 부인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도 몰리의 집은 회사에서 가까운 편이었고 택시를 타자 15분만에 도착했다. 1주일 동안 청소는커녕 빨래조차 손을 못대고 있는 집은 독신자용 주거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파트라기보다는 토굴 같아 보였다. 몰리는 살인을 해도 심신상실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몽롱한 정신으로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던진 후 곧장 샤워실로 들어갔다. 열심히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뒤 수증기로 뿌옇게 흐려진 거울을 닦기 위해서 손을 들었다. 왜 그 순간 동작을 멈추고 거울 위에 놓인 자기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느냐고 하면, 그냥 두뇌활동이 극도로 저하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상태에서 거울을 짚은 자신의 손모양과 더불어 수사보고서에 첨부된 존 맥팔레인의 피묻은 엄지지문이 나란히 떠오른 것은 - 아마도 셜록 홈즈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표현이겠지만 - ‘계시’였다. 몰리는 젖은 머리를 채 말리지도 못한 채 간신히 메이크업 파우치만을 챙겨들고 로펌으로 되돌아갔다.
몰리가 다시 컨퍼런스 룸에 나타났을 때, 존은 샐리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며 사건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샐리의 견해는 회의적인 것이었는지 가만히 듣고만 있는 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원래도 그리 밝지는 않았던 존의 표정은 적어도 2시간은 지나야 돌아올거라고 생각했던 몰리가 45분만에 나타나자 더 구겨졌다. 다른 대형로펌과 달리 허드슨 앤 레스트레이드는 민주적이고 경쟁보다는 협력을 중시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선배이자 멘토의 눈치는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의 몰리에게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소위 말해 지금 그녀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존, 존, 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일이어야 할 거예요. 지금 당신 모양새는 약간 신선한 좀비 수준이니까요.”
“존! 그 지문이요! 그 엄지손가락 지문!”
몰리는 컨퍼런스 룸에 가져다두었던 화이트보드 위를 자꾸만 손을 두드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손으로 두드린다기보다는 손바닥을 찍는 동작에 가까웠다.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그렇게 날 수가 없다고요!”
그러나 존의 미심쩍은 듯한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셜록의 기행에 익숙해져있는 존의 반응이 그 정도였던 만큼 샐리의 반응은 더 극적이었다.
“몰리,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are you on something?”
셜록 홈즈의 팬으로서 그와 관련된 기사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었던 몰리 후퍼는 존의 의심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몰리는 너무나 답답했고 자신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지 못하는 존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셜록 홈즈의 말이라면 금방 알아차려 줬을까?’ 아니, 셜록 홈즈라면 진작 알아차렸을 지도 모른다. 몰리 후퍼는 누적된 피로와 수면부족으로 인해 현저하게 기능이 저하된 전두엽으로 인해 언어구사력과 자제력이 상당히 낮아져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화이트보드 위에 어지럽게 쓰여진 타임라인과 떠오르는데로 적어놓은 브레인스토밍의 결과를 자기 손바닥으로 북북 지워버렸다. 그리고 존이 채 입을 벌리고 항의하기도 전에 경찰조서 사본 뒤의 여백에다 자기 손을 꾹 눌러 자국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피해자의 집에서 발견된 피묻는 존 맥팔레인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찍은 사진이 나와있는 페이지를 찾아 바로 그 옆에 가져다두었다.
“아시겠어요?!”
존 맥팔레인의 지문은 벽면에서 발견되었다. 지문에 묻은 피는 당연히 피해자의 것이었다. 사실 법의학에 대해 아무런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해도 그 지문은 좀 생뚱맞은 구석이 있었다. 우선, 그 지문이 묻은 곳 외의 실내 다른 어느 장소에서도 피해자의 혈액이 발견되지 않았다. 혈액과 지문과 같은 물적 증거의 신빙성을 따지고 드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인 일이다. 하지만 지문 자체가 누군가 조작한 증거라면? 뭔가 둥글고 긴 물체를 잡거나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가 아니라면 엄지손가락의 지문은 선명하게 찍히기가 힘들다. 특히 벽면에 엄지손가락 지문을 선명하게 남기기 위해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눌러야지, 얼떨결에 벽을 짚다가 남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벽을 짚을 때 사람은 반사적으로 손바닥이나 손등을 쓰기 마련이고 손바닥을 사용할 때는 엄지손가락은 모로 눕게 되어 정작 엄지의 옆면이 남을 뿐, 정확하게 지문이 벽면과 접촉하지는 않는다. 즉, 지문의 일부분이 아닌 전부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존 맥팔레인의 엄지손가락 지문은 조작된 증거였다. 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린 것은 존 뿐만 아니었다. 샐리도 알았다. 몰리를 바라보는 샐리의 시선은 아까보다는 훨씬 온화해져있었으나 그녀의 바디랭귀지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이 정도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할 만은 해. 하지만 유죄심증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야. 이 증거가 조작된 것이라면 누가 왜 피고인을 모함하려고 했는지 그 동기와 범행수법에 대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제시해야만 해. 일단 피고인을 해하기 위해서 피해자를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피해자에게 원한이 있는 자가 피해자를 살해하고 그 죄를 피고인에게 뒤집어씌웠다는 게 그나마 설득력 있는 가설일텐데, 그럼 그 자는 어떻게 피해자의 자택에 침입해서 피해자를 살해하고 피고인의 지문을 입수해서 벽에다 남겨놓은 거지?”
결정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일로 너무 호들갑을 떨어나 싶은 마음에 급속도로 민망해진 몰 리가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어쩔 줄을 몰라하건 말건 존은 뚫어져라 몰리의 손바닥이 찍힌 자국과 맥팔레인의 지문 사진만을 쳐다보았다. 셜록 홈즈의 천재성과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고 관찰력과 창의성에 있어서는 몰리보다도 낮은 수준이었지만 존에게는 한 인간으로서, 변호사로서, 또 셜록 홈즈의 파트너로서 축적해온 인간의 본성과 행동양식, 범죄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가 있었다.
“몰리.”
“예?”
“앞으로 최소 여섯시간은 푹 자는 거예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저, 정말요?”
“존,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좀 말해주고 가는 게 어때요?”
“그럼, 샐리. 나는 이만 실례.”
화색이 도는 몰리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샐리를 뒤로 하고 트렌치 코트를 휘날리며 컨퍼런스 룸을 나선 존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가며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샐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부부는 닮아간다더니.”
“안녕, 히긴스. 오랜만이야. 잘 지냈는지? 이봐, 아직도 내 의뢰를 받아주는 지 궁금해서 말이야.”
- 전 프리랜서예요. 시간당 300달러만 지불해주시면 아무런 질문도 조건도 없습니다.
“400으로 하지. 이번 건 좀 리스크가 크거든.”
- 뭔데요?
“연방 쪽 데이터베이스를 살짝 털어줘야겠어. 출입국관리국 기록. 영상으로. 얼굴인식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을 만한 해상도여야 해.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이메일로 보내주지.”
- 음, 그 정도라면 500은 받아야겠는데요.
“450.”
- 네, 뭐, 그걸로 하죠.
“.....왜 이렇게 잘해줘?”
- 아니, 이 양반이 양보해줘도 지랄....
“자네, 셜록이 날 찼다고 생각하는 거지?”
- 남의 아랫도리 사정에는 관심 없네요.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먼저 결혼한 건 왓슨씨잖아요.
“그래, 그런데 왜 나한테 잘해주.... 아항, 벽장에 숨어있는 40대 유부남 게이보다야 다이나마이트한 바디의 고져스한 30대 초반 바이섹슈얼 도미니트릭스가 더 낫다 이거지? 알았어, 알았어. 다시 400이야.”
- 왓슨씨!
“그리고 정오까지 부탁해~”
- 엑?! 겨우 4시간 남았잖아요! 값도 깎으면서!
“이왕 인심쓰는 김에 통 크게 쓰라구. 잘 부탁해.”
히긴스가 뭐라고 왁왁 대는 것은 무시한 채 존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다음으로 전화를 건 곳은 같은 로펌의 동료이기도 한 랭데일 파이크였다.
“랭더일, 존이야. 부탁이 하나 있어서 말인데, 전에 자네에게 신세진 연방요원이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코넬리우스 로저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봐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1. 이 얘기는 다운튼애비 등 뭔가 19~20세기 초에 관련된 영상물을 볼때마다 되살아나는 듯.
2. 덕분에 비둘기 날개와 순수의 시대를 재탕했습니다. 점점 고증은 안드로메다로... 심지어 순수의 시대는 동시대도 아냐....
마틴 코스텔로는 중키에 폭이 좁고 마른 얼굴, 매부리코에 사람을 찌를 듯한 날카로운 눈빛을 한 남자였다. 끼고 있는 외알 안경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양 잘 어울렸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변호사답게 샌들은 친누이가 한눈에 납득해버릴 만큼 닮은 외모라면 고(故) 제임스 왓슨 경의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자신도 존 왓슨의 진위를 판단하기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마틴 코스텔로는 왓슨 가와 아무런 왕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생전의 제임스 왓슨을 만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는 해리엇 왓슨과 존 왓슨을 보았을 때는 아무런 소개없이 만나도 둘이 친남매간임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틴 코스텔로는 이미 샌들이 준 정보에 따라 존 왓슨에 대한 대략의 공식기록들을 찾아본 상태였다. 일단 그의 이름이 존 왓슨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았다. 다만 이 왓슨이 죽은 제임스 왓슨의 쌍둥이 형제인 그 존 왓슨인가 하는 점만이 남아있었다. 그의 근무기록에는 ‘hamish’라는 중간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 왓슨은 무척이나 흔한 이름이었다.
해리엇 왓슨은 흠잡을 때 없는 상복 드레스 차림이었으나 존 왓슨은 팔에 상장을 두르고 있을 뿐, 검은 색이 아닌 군청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1시간이 조금 못되는 면담 후에 코스텔로는 자신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했음을 인정했다. 그는 이 ‘존 왓슨’이라는 사람에게 매우 큰 호감을 품게 되었다. 그는 간결하고 명확하게 말했으며 시종일관 당당하고 침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품은 호의와는 별개로 마틴 코스텔로는 그가 진짜 존 해미쉬 왓슨이라는 확신은 얻지 못한 채로 면담을 끝내야만 했다. 이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 마틴 코스텔로는 명확한 근거는 얻지 못했으나 사기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애매한 말을 남기고 더 조사해볼 것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샌들을 당황했고 해리엇은 짜증을 냈지만 그 무엇도 그녀로 하여금 지금 이 자리에서 존의 작위계승을 확실히 매듭짓겠다는 결심을 흔들어놓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샌들은 해리엇과 왓슨 가를 염려하는 만큼 장차 왓슨 준남작이 될 남자에게 미운털이 박히기는 싫었던 고로 상당히 미적거리면서도 결국은 긍정의 대답을 내놓고야 말았다. 해리엇은 런던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시원하게 해결된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신경질을 부리며 상당히 무례한 태도로 샌들과 헤어졌고 존은 누이의 태도에 대해 샌들에게 대신 사과해야 했다. 타인의 이목에 둔감한 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은 늘 제임스의 몫이었고 제임스와 왕래했던 샌들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제임스가 했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존의 모습은 어딘가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샌들 또한 제임스의 시신을 보거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마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검은 레이스 장갑을 낀 해리엇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해리엇이 떨리는 손으로 핸드백에서 은제 플라스크를 꺼내 뚜껑을 열자 좁은 마차 안에 위스키 냄새가 퍼졌다. 존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해리는 약을 마시듯 위스키를 마셨다.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처럼 떨리던 손의 움직임이 조금 잦아들었다. 존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반쯤 벌렸으나 그대로 다물었다.
“나는 바로 집으로 가겠어. 너도 동행하겠어?”
해리엇의 물음에 존은 고개를 저었다.
“성 바톨로뮤 병원에 다녀올게.”
“.......제임스 일로 가는 구나.”
“제임스가 평소에 내 이야기를 했을까?”
“스템포드씨를 찾아가.”
“스템포드?”
“마이클 스템포드. 제임스의 의대 동창이자 성 바톨로뮤 병원의 외과 과장이야. 제임스의 지인 중에 스템포드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에게만 이야기해두면 나머지 연락은 알아서 해줄 거야. ...마이클은 그런 사람이니까.”
존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의 부고를 받아들이는 마이클 스템포드의 태도는 존으로 하여금 앞으로 그가 겪어야 할 사태에 대한 전주와도 같았다. 그는 친우를 잃은 상실감과 자기 눈 앞에 앉아있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입으로는 애도를 표한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존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외모가 사람의 성품을 반영한다는 믿음은 깨기 어려운 것이라 존은 마이클 스템포드가 크리테리온 바로 들어와 자신을 바라본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이 제임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당신이 바로 존이군요.’ 라고 말하는 것에 상당히 놀랐다. 살집이 두툼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은 친절함이나 다정함이라면 몰라도 예리함이나 영민함과는 별 관련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임스의 죽음을 전하는 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팔에 둘러진 상장을 알아차린 순간 하얗게 질리던 얼굴. 판단이 빠른 남자였다. 새삼 가슴을 치는 상실감과는 별개로 존은 잔을 들어 옅게 웃고만 입을 가려야했다. 제임스는 언제나 머리 좋은 사람들에게 약했다. 아니, 사람뿐만이 아니지. 제임스는 말이나 개조차도 영리한 것을 좋아했다. 품종이나 혈통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물론 왓슨 가의 마구간은 더 이상 마구간이라기보다는 목장에 가까웠고 그렇기에 가끔은 투자의 목적으로 말을 사들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한 금전적인 목적과는 별개로 제임스는 언제나 똑똑한 생물에게 끌렸다. 심지어 그 똑똑함이 충성심이나 애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때조차도.
“닥터 스템포드, 시신의 상태 때문에 장례식을 황급히 치른 터라... 런던에서 따로 추도식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헌데 동생의 유품 중에 아무리 뒤져도 제임스가 알고 지내던 분들의 연락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그와 관련해서....”
스템포드는 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그의 말을 멈추었다.
“부디, 마이클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점은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빠지는 사람 없이 연락을 넣겠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아이도 당신을 마이클이라고 불렀을 텐데요.”
물기로 인해 끝이 부서지기 시작하는 음성에도 불구하고 스템포드는 존의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웃음으로 대답했다.
“저도 당신을 제임스라고 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냥 존이라고 불러주세요.”
스템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만남이 제임스가 살아있었을 때 이루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까요. 제임스는 당신을 무척이나 그리워했었답니다.”
마이클 스템포드를 통해 지인들에게 직접 연락이 이루어진 후에 존은 모닝포스트지에 부고 기사를 내줄 것을 요청했다. 추도식 장소는 핌리코의 자택이었다. 이제와서 교회를 예약하기에는 시일이 너무 촉박했고 왓슨 가는 풍족하지 않았다. 추도식을 위해 두 명의 풋맨을 더 고용하고 꽃집에 하얀 백합을 주문하는 것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제임스는 크게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미혼의 남성이 파티를 주최할 일도 없는지라 존은 제식용 식기가 모자랄 것을 걱정했다. 그 문제는 다행히도 월터 숙부가 런던에 오면서 해결되었다. 외숙과 만나기 전까지 존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차역 플랫폼에서 막 기차에서 내리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새삼 죄책감이 그를 감쌌다. 그는 실제로 두꺼운 이불에 꽁꽁 싸매인 사람처럼 어색한 몸짓으로 월터 숙부에게 다가갔다.
“숙부님.”
아마 제임스가 살아있기만 했어도 존은 숙부에게 몇 대 얻어맞을 각오를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월터 숙부는 여동생과 처남에 이어 조카마저 두 번째로 잃게 된 후 그저 노인이 되었다. 그는 존을 보고 안도한 것인지 실망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겉으로는 괜찮아보이는 구나.”
“실제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러면 됐다.”
라고만 말했다.
레이디 에버다인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월터 숙부는 런던 하우스에서 종종 파티를 열기도 했었다. 따라서 제식용 식기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존이 아직도 제임스의 추도사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추도식 3일전에야 꽃집에서 보유하고 있는 백합이 주문한 수량에 못미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는 것이었다. 해리엇이 술에 취해 자기 방에 널브러져있는 동안 존은 런던에 있는 모든 꽃가게를 수소문했으나 안타깝게도 백합은 공급물량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존은 부족분은 흰 국화로 메꿀 수 있었다. 따라서 정작 추도식이 시작하고 추도사를 할때쯤엔 존은 더 이상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제임스는 다정다감한 성품과는 별개로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그 점에 대해서는 존보다 제임스를 훨씬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스템포드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상류사회에서는 본인의 성향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딸려오는 인간관계가 있다. 존은 제임스의 은사와 동기동창, 대학 졸업 후 교류한 동료의사들,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학계 인사들과 모두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존은 마이클 스템포드의 반응은 매우 양호한 수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제임스가 기숙학교까지 다녔더라면 어떠했을지 존은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존은 인사를 나눈 사람들을 모두 기억하기 위해 애썼고 그들의 연락처와 명함을 확보해두었다. 사정상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카드와 함께 화환이나 꽃바구니 등을 보내왔는데 모두 하얀 꽃에 검은 비단리본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집사 버나드는 여전히 텐비쳐스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에 화환만 보내준 사람들의 이름을 꼼꼼히 적어서 (연락처가 적힌 수첩은 끝내 찾지 못했다) 정리하는 것은 터너 부인의 몫이 되었다. 인생의 절반을 중산층, 가끔은 노동계급에도 해당할 만한 스타일로 살아온 존이 저도 모르게 스스로 수첩과 펜을 집어들려는 것을 말린 이는 스템포드였다.
스템포드 자신은 조금 부유한 중산층 출신에 지나지 않았으나 제임스와의 오랜 교제로 상류층 사람들이 생활양식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개업의라는 진짜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흠잡을 데 없는 출신과 배경에도 불구하고 제임스는 언제나 상류사회에서 겉돌고 있었다. 그가 이튼이나 윈체스터와 같은 퍼블릭 스쿨을 다니지 않았다는 점도 한 몫했다. 같은 의사라해도 환자를 직접 진료하지 않고 연구에 전념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제임스는 신경병리학과 관련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했으면서도 환자를 직접 진료했다.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만 환자로 받았던 것도 아니다. 런던에 머물렀을 때에는 이스트엔드 지역으로 왕진 나가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선사업을 위한 재단이나 사회정화단체 같은 곳에 소속되어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얻는 것도 나무랄 데 없는 진로였겠지만 제임스는 그런 것도 원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속해있는 사회로부터는 괴짜로 취급되었고 그가 속하고자 했던 사회는 결코 그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친절함과 선량함에 감동하면서도 그가 준남작이라는 사실 하나로 그의 선행은 그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풀어주는 자비일 뿐이었다. 스템포드는 그저 마주치는 사람들과 진심어린 우정을 나누고 싶었을 뿐인 순진한 남자가 계급사회라는 거대한 맷돌 사이에 끼어 으스러지는 모습을 코 앞에서 바라보았다. 제임스를 상위계급으로 올라서기 위한 사다리로 이용한다는 악담까지 감수해가며 그의 곁에 남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스템포드는 씁쓸하게 떠올렸다. 그로서는 충분하지 않았다. 충분했을 지도 모르는 남자가 있다. 확언할 수 없는 까닭은 그 희박한 가능성 때문이다. 스템포드는 표백한 윌로우 나무 바구니에 한가득 담긴 하얀 카네이션 부케 앞에서 멈춰섰다. 동봉된 카드 뒷면에 양각인쇄되어 있는 문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벼락출세한 졸부 따위가 흉내란 흉내는 다 내고 보는 군요.”
안면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상대도 대화를 이어나가기를 바란 것은 아닌 듯 그저 한토막의 악담을 집어던지듯 내려놓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카드에 적힌 내용은 이러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
추도식 준비기간 내내 그러했던 것처럼 해리엇은 식 초반에 잠시 얼굴을 비추고는 모든 일을 존에게 맡겨버린 채 2층 침실에 틀어박혀있었다. 해리엇이 쓰는 침실은 생전의 루이자 왓슨이 사용했던 방이었다. 노크 후 아무런 대답이 없는 데도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서는 건 아무리 친남매간이라도 장성한 이후에는 해서는 안될 일이었지만 존은 상관하지 않았다. 모친의 죽음 이후로 단 한번도 리모델링을 하지 않아 때가 묻은 크림색 몰딩까지 그대로였지만 낡은 텐비쳐스가 그리움과 편안함의 원천이었던 것과 달리 이 방은 그저 쇠락의 징후일 뿐이었다. 해리엇은 검은 베일과 구두만을 벗은 채 드레스 차림 그대로 침대에 모로 누워있었다. 존이 서있는 곳에는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존은 그녀가 잠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침대 위로 올라가 뒤에서 누이를 끌어안는 것도 그닥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다. 만약 존이 제임스와 해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제임스가 해왔던 것 만큼만이라도 상류사회와 연결되어 있었다면 존은 물론 자유분방하기로 악명높은 해리엇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둘은 이제 세상에서 단 둘 뿐인 왓슨이었고 쇠퇴해가는 가문의 마지막 자손들이었다. 해리엇은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해리엇보다 선택지가 조금 넓을 뿐인 존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추도식을 준비하며 존은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존이나 해리엇이 매우 부유한 배우자를 맞이하는 것 외에는 왓슨 가의 부흥은 이루어질 길이 없었다. 가문은 가라앉고 있는 배였다. 그 배가 한때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웠으며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항해을 계속해왔다는 사실은 그 배가 가라앉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아직 손님들이 남아있잖아.”
“응. 하지만 일단 인사는 모두 나누었고 상주가 바로 곁에 있으면 오히려 불편하겠지.”
존의 말에 담긴 다소 냉소적인 속뜻에 해리엇의 몸이 긴장했다. 해리엇 답지 않았다. 그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시니시즘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존은 잠시 기다렸다. 누이가 먼저 말을 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내심 좋게 기다려도 해리엇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리.”
“....응.”
“홈즈가 누구야?”
해리엇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제임스가 죽고 존이 돌아온 후로 계속 이 질문을 두려워해왔을 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침묵을 지켰다. 지금이든 나중이든 언젠가는 이 질문에 대답을 줘야만 한다. 하지만 그 필연성 앞에서 해리엇은 잘못을 들키는 것이 무서워 그저 도망치는 아이처럼 두려워할 뿐이었다.
“존, 카시우스를 기억해?”
“카시우스? 아, 그 망할 놈(that little bugger).”
그 ‘망할 놈’이란 제임스가 총애해마지 않았던 서러브레드 종마로 그 혈통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싼 가격에 나와서 제임스가 몇날 며칠을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생일선물로 받아낸 녀석이었다. 그 수상할 정도로 저렴한 가격의 비밀은 곧 밝혀졌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 말이 사람을 죽이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명의 조련사가 그의 희생자로 한 사람은 유명을 달리했고 다른 한 사람은 매우 큰 부상을 당해 두 번 다시 말을 탈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이 말을 안락사시키는 대신 싼값에 팔아치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근사한 외향. 제임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도 그 겉모습이었다. 양말을 신은 것처럼 하얀 발목과 갈기를 제외하면 온 몸이 다른 색이 전혀 섞이지 않은 짙은 갈색이었다. 뿐만 아니라 몸의 비율만 보아도 이 녀석이 최고의 혈통을 지닌 서러브레드임은 명백했다. 두 번째로는 녀석이 사람을 죽이는 방식과도 연관되어 있었는데, 녀석은 결코 부케팔로스처럼 거칠게 날뛰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손도 못 대게 하는 타입의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말이었으면 사람을 다치게 할 지언정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카시우스는 (로마식 이름이라는 데서 제임스가 작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수말치고는 얌전하게 발을 모으고 서있는 모습이 새침해보일 정도였다. 올라탄 기수로서는 살짝 몸을 기울기만 해도 마음이라도 읽은 듯 원하는 방향으로 달려주는 것에 마치 기름 위에 뜬 듯 노를 젓지 않아도 알아서 미끄러지는 보트에 탄 기분이 들고 만다. 그렇게 입안에 든 혀처럼 굴다가 어느 순간 지나치게 낮은 나뭇가지 밑으로 달리거나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 기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제임스의 승마솜씨가 영국 귀족보다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에게 어울리는 수준이 아니었다면 존은 일찌감치 자신의 일란성 쌍둥이 형제를 잃었을 것이다. 부모님에게는 철저하게 입을 다물었다. 찰스 왓슨에겐 말은 어디까지나 투자의 대상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해리엇과 존이 아무리 귀가 닳도록 제임스를 설득해도 그는 카시우스를 아꼈다. 소위 세간의 표현으로 입에 버터를 물어도 녹지 않을 만큼 새침한 인상의 서러브레드 종마를 존은 진심으로 가증스럽게 여기고 치를 떨었으나 제임스는 그 말에게 카시우스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도 (시저를 암살한 그 카시우스다)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심지어 애꿎은 사람이 피해를 입을 까봐 마구간지기에게 맡기지도 못하면서, 그 말을 탈 때마다 질주의 기쁨에 온전히 몸을 맡기지도 못하면서 제임스는 언제나 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말 주제에 사람을 죽일 만큼 영리한 걸.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아?’
어렸던 존은 형제의 그런 기이한 집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제임스 본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제임스는 특이함이나 천재성에 이끌리기 쉬운 성향이었던 것 같아. 심지어 그 천재성이 사악함과 연결되어 있을 때조차도 말이야.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그를 만나게 되겠지. 말을 나눠보면 금방 알게 될 거야. 다행히도 그 빌어먹을 말에 대해서는 너는 제임스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고수했고 그야말로 근사하게 대처했지만..... 존, 난 너마저도 잃는다면 견딜 수 없을 거야.”
함께 자란 것은 고작 14년 동안이었지만 그 동안 존과 제임스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충분히 알고 있을 해리엇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존은 그저 불안감의 발로로 받아들였다.
“네가 나를 잃는 것은 불가능해, 해리. 물론 미래는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나는 아프리카, 인도, 미국을 거쳐 이 곳으로 돌아왔고 전쟁과 전염병, 폭동과 지진에서 살아남았어. 고작해야 네 마음을 부수려고 그 먼 길을 돌아왔을 리가 없어.”
해리엇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동생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존은 해리엇의 몸이 완전히 긴장을 풀고 늘어지는 것을 감지했고 그녀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뜻을 읽었다. 그래서 존 역시 관자놀이 위에 가벼운 입맞춤만을 남긴 채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나왔다.
상류사회의 관습이라고는 하지만 들으라고 하는 말이 뻔하건만, 차라리 그럴 바에야 대놓고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존은 불평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보낸 근조 꽃바구니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존은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일단 홈즈라는 인물은 주로 부정적인 맥락 속에서 무척이나 자주 언급되었다. 그리고 제임스와 관련이 있는 홈즈 가 사람들은 두 사람으로(the elder one and the younger one), 그 둘은 형제간인 것 같았다. 정확하게 누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꽃을 보내온 쪽은 형제들 중 형 쪽인 것 같았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꽃만 보내온 것만으로도 인정머리 없다는 평가가 운운한 가운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동생 쪽은 그야말로 험담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존은 사교계 기준으로는 거의 모욕에 가까운 그 험담 속에서 희미하지만 광범위하게 깔린 제3의 감정을 포착해낼 수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까지나 사교계가 아닌 존의 기준이지만) 모두 입을 모아 한 사람의 부적절한 처신을 탄핵한다면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이 무엇인지는 대개 공식처럼 정해져있는 법이다. 그 탄핵의 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공식의 유효성도 높아지는 데 존은 이 경우가 그 공식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혀 진지하지 않은, 무책임하고 가볍고 그저 품고 있는 사람을 조금 귀찮게 만드는 수준에 불과한 사소한 수준의 죄책감 말이다. ‘너무 안됐어. 마음이 안 좋아’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털어내버릴 수 있는 먼지같은 마음. 그 먼지 속에 둘러싸여서 존은 깨달았다. 그의 친누이뿐만 아니라 제임스가 알고 지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자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뭔가 대단한 음모가 있다고 생각해서 해리엇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해리엇이 말을 아끼자 존의 의구심이 솟구쳤다. 비난에 걸맞을 만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판단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험담을 마다할 해리엇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관습과 틀에 박힌 예의범절을 무시하고 면전에서 비난을 퍼붓고도 남을 그녀다. ‘꽤 심각한 일이구나.’ 심각한 일이니까 덮어둬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존과는 인연이 없었다. 상류사회가 당연한 듯 요구하는 그런 방식의 처신이 잘못되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존 왓슨은 그런 식으로 사는 남자가 아니었을 뿐이다.
스템포드는 추도식이 끝나고 저녁이 될 때까지 남아있어주었다. 우울하고 무심해져있는 해리을 대신해서 런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존이 추도식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에는 스템포드의 도움이 매우 컸다. 정말로 친근감을 느껴서라기보다는 스템포드의 편의를 생각하여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두 사람이었지만 그 결여된 친밀감만큼 존은 스템포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스템포드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제임스에 대한 죄책감을 홈즈 형제에 대한 적의 대신 존에 대한 헌신과 충실함으로 보상하고자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제임스에게 가지고 있었던 우정이 얼마나 두터운 것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존은 제임스가 스템포드에게 그만큼의 애정과 충의를 되돌려준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스템포드의 죄책감은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존에게도 매우 뚜렷하게 보였으나 그의 슬픔은 그만큼 강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제임스와 스템포드의 교류는 이미 제임스의 생전에 중단된 상태였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리엇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 남자에게 찾아가보라고 권했다는 것 자체가 존에게는 마이클 스템포드야 말로 그의 죽은 형제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중립적인 정보를 제공해줄 출처임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간소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존은 스템포드를 서재가 아닌 응접실로 이끌었다. 제임스의 서재에서 제임스의 옷을 입고 제임스의 친구를 맞이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존은 담배를 좋아하지 않았고 설령 핀다해도 시가보다는 궐련을 선호했지만 신사계급의 남성에게 시가와 고급 술을 대접하는 것은 예의의 문제였다. 제임스는 질좋은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가지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시가는 없었다. 어리둥절해있는 존을 보고 스템포드가 웃으며 말했다.
“제임스다운 일이지요. 평소에는 걱정이 될 만큼 순둥이인 사람이 그런 부분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고집이 셌어요. 예의상 시가를 입에 물고 있는 건 남의 집에 갔을 때로 충분하다고 여겼지요. 아마 제임스의 대인관계가 협소했던 이유 중 하나는 담배에 대한 그의 극단적일만큼의 혐오 때문일 겁니다.”
“그거 안타까운 일인데요. 동생이 여흥거리에 대해 그렇게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니.”
유리잔 안에 채워지는 투명한 갈색의 액체가 벽난로 불빛이 투과하며 호박색으로 빛났다. 스템포드는 잔을 받아들고서도 잠시 향을 즐길 뿐 마시지 않았다. 스템포드가 말을 꺼낸 것은 존이 자기 술잔을 반이상 비우고 난 후였다.
“존, 저는.... 당신에게 설명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레이디 해리엇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존은 그리 놀라거나 당황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술 한모금을 넘길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존이 꺼낸 물음은 스템포드를 놀라게 했다.
“그 홈즈 형제들에 관한 일입니까?”
“어떻게....?”
“사람들이 추도식 내내 떠드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도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힘든 일이지요.”
스템포드가 지키고 있던 침묵에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소파 깊숙이 묻고 있던 상체를 일으키는 존의 모습은 제임스와 같은 틀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움찔 뒤로 물러나게 만드는 기운이 있었다.
“마이클, 난 그동안 쭉 해외를 떠돌다가 온 터라 이런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저 당신의 관대함에 기대서 직설적으로 묻겠습니다. 정확히 그 형제들과 제 동생이 맺고 있었던 관계의 본질이 뭡니까?”
“....형제들이 아닙니다. 관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던 사람은 동생뿐이었지요. 셜록 홈즈, 제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특이한 사람이었고 또 가장 명석한 사람이라 부를 만 합니다. 그와 제임스는.... 만약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제게 셜록 홈즈와 제임스 왓슨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전 제임스에게 있어서 셜록 홈즈는 최고의 친구였다고 말할 겁니다.”
“당신이 아니라요?”
스템포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뇨, 저는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그런 시절도 있었죠. 하지만 전 그 자격을 꽤 오래전에 잃었습니다.”
“그럼 제가 묻는다면?”
“저는 제임스가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거의 숭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그 감정은 보답받지는 못했구요.”
“마이클, 실례합니다만 지금 제게 제임스가 같은 남성에게 법이 금지한 감정을 품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임스의 애정이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았어요. 하지만 제게는... 제 눈에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제임스가 떠난 지금,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마음이 매우 열정적이고 강렬한 것이었음은 누가 봐도 분명했습니다. 그것을 우정의 범주에 집어넣을 수 있다해도 그 우정은 매우 불균형적인 것이었습니다. 셜록 홈즈씨는... 소위 ‘재기가 지나쳐서 인간미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평가될 만한 사람입니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인간의 내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감정 중에서도 악덕과 범죄로 이어지지 않는 감정은 그저 결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잠깐만요, 이어지지 않는 감정이 결함이라고요? 그럼 이어지는 감정은?”
“동기요.”
존은 실소를 흘렸다. 그 웃음은 전염성이 있어서 스템포드는 술잔을 쥔 손이 떨리는 와중에도 같이 웃었다.
“제임스는 그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신을 아낀다고 생각했고 저도 그에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제임스의 마음이 언제나 항상 더 컸습니다.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면 저울 자체가 뒤집어졌을 겁니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제임스가 거절당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하는 군요.”
스템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당신이 용서를 구할 만한 지점이 대체 어딘가요?”
“제가 그 두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오, 마이클, 당신의 책임의식은 지나친 감이 있군요.”
“하지만 전 홈즈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죠. 일이 이 지경이 될 거라는 사실은 몰랐다고 해도 그가 제임스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어야 했어요. 존, 당신은 아까 제임스가 여흥에 대해서 협소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정작 높은 기준을 둬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제임스는 아무런 기준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만약 그가 오래 살아서 수명이 다할 때가지도 그 터무니없는 관대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그는 성인으로 추앙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불량배들, 전과자들, 거리의 부랑아들, 매춘부들.... 제임스는 그저 자비로운 사람이었던 게 아닙니다. 그는 그들의 삶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기벽이고 집착이었어요. 범죄와 법의학에 대한 홈즈씨의 관심도 그에 못지 않았죠.”
“마이클,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이 제임스의 실수라고 한다면 그 부분에서는 저 또한 그리 당당하지는 못한데요. 의사라는 직업이 아니었다면 제가 살아온 방식이....”
“하지만 제임스는 끊임없이 상처받았습니다! 지속적으로 배신당하고 이용당하면서도 가난에 찌들어 궁핍한 사람들이 더 정직하고 선량할 거라는 신화를 끝까지 믿었지요. 어떤 의미로는 경이롭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성자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한결같은 연민과 동정, 공감능력이 그렇게 연약하고 섬세한 용기에 담겨있었다는 것이요. 그런 그의 고통과 상실감을 이해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의 고통은 서서히 그의 연민과 자비심의 증거가 아니라 어리석음과 사려 깊지 못함의 증명이 되어갔습니다. 홈즈씨는 항상 곁에 있기는 했습니다. 있을 수 밖에 없었지요. 매춘부가 살해당하거나 부랑아가 사라지는 일에 주목하는 사람은 그 사람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제임스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존중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임스는 언제나 그를 변호했습니다. 언제나 정의가 구현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홈즈씨는 그가 아니었다면 그저 그림자나 안개처럼 사라졌을 사람들에게 얼굴과 이름을 주었습니다. 설령 그것이 살인과 학대의 희생자라는 꼬리표에 불과했다고 해도 말입니다. 모두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홈즈씨는 점점 페르소나 논 그라타가 되어갔지요. 하지만 그는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진 집안의 차남이었고 선천적으로 성품에 취약한 면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그의 조부가 벼락출세한 졸부라는 사실을 물고 늘어졌지만 그건 홈즈씨가 지금처럼 특이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해도 으레 달라붙었을 공격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당사자에게는 물론 그 공격을 관전하는 제3자측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제임스에게로 화살을 돌렸습니다. 그는 전장 한복판에서 양 진영 모두에게 공격을 받은 겁니다.”
존은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다시 소파 깊숙이 기대고는 잔에 남아있는 술을 모두 비웠다. 공기마저 빨려나간 듯한 느낌의 침묵 속에서 스템포드는 존이 술을 목구멍 안으로 넘기는 소리와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오르며 내는 불씨의 소리, 자신의 심장이 뿜어낸 혈액이 대동맥을 지나 온 몸을 순환하는 소리까지 들린다고 생각했다.
“....설령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한 선택은 아니었을 지언정 마이클 당신도 제임스의 죽음은 선택의 문제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군요.”
“존.”
“해리엇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Hell, 실질적으로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네요.”
“........”
“이건 제가 아는 제임스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생각해보면 저는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군요.”
“존. 무례를 무릅쓰고 이런 말씀을 드린 건 온 사교계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른 척 하며 당신을 어둠 속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스스로를 책망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애의 곁을 떠나있었던 세월동안 전 동생이 그리우면 그저 거울을 보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우린 아주 다른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게으르고 태만했습니다. 내 하나 뿐인 동생이 내가 증오하고 경멸하는 인간들보다도 내 관심에서 밀려나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마이클, 지금 이 자리에서 진정으로 책임을 지고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접니다. 헌데, 저를 용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네요.”
스템포드의 눈에 비친 제임스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행동력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약한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을 우울한 기분으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에 그토록 안절부절 못하는 이유도 제임스에 대한 태도의 연장일거라고 존은 짐작했다. 비록 죄책감과 잘못 인도된 친밀감에서 빚어진 배려라해도 오랜 세월 타지에서 방황하며 살아온 존에게는 포근한 담요처럼 느껴졌다. ‘좋은 사람을 친구로 두었구나, 제임스. 그 쓸데없는 일에서만 발휘되던 네 고집도 여전하고.’ 존은 불길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벽난로 속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너를 알았으면 좋았을 걸. 이제와서야 너를 떠나지 않고서도 힐브로스쇼어와 작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다니. 너를 알고 너와 사귀고 너와 형제이기전에 친구가 되었다면 너를 내 일부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텐데.’
생각에 빠져 망연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던 존은 가까스로 예전의 자유분방한 삶과는 달리 하인들의 작업일정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주인도 적절한 시간이 일어나고 잠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해리엇은 이미 잠들었을 것이고 대부분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텐비쳐스의 하인들과는 달리 런던 하우스의 스텝들은 모두 제임스가 고용한 사람들이라 존과는 아무런 안면이 없었다. 젊은 주인이 난데없이 요절한 것도 당황스러운데 주인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낯선 사람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존은 유난히 자신에 대해 조심스러운 하인들의 태도를 이해했다. 버나드였다면 한번쯤은 너무 늦지 않게 주무시라는 말을 건넸을 텐데. 추도식이 열렸던 복도와 거실은 공간을 가득 메운 화환과 부케들을 제외하면 이미 깔끔하게 정리된 후였다.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하얀 꽃은 몽환적으로 아름다웠다. 뭉쳐진 구름처럼 넘실거리는 하얀 꽃들 속에서 유독 한 꽃바구니가 존의 눈에 띠었던 것은 그것이 흰 꽃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추도식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검은 리본으로 장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장례식용 꽃으로 사용되지 않는 수국과 줄기가 곧고 길어 눈에 뛰는 칼라를 선택하여 배치한 방식은 오히려 순백을 테마로 한 연회에나 어울릴 법했다. 존의 눈에 띨 정도이면 말 많은 사교계 인사들에게 거슬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합창이라도 하듯 쏟아지던 홈즈에 대한 험담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지만 이 꽃바구니를 보낸 사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존은 꽃 사이에 끼워있던 카드를 집어들었다.
이 어찌나 비관습적인 문구인지. 존의 감정은 경탄과 불쾌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결혼식이라면 몰라도 장례식이나 추도식은 독창성을 발휘할 만한 장소가 아니다. 아직까지 자신에게 이 정도의 상식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살짝 놀라면서 존은 겉봉에 적힌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이니셜뿐이었다. I. A. 존은 장담컨대 이 이니셜의 주인이 누구인지 추도식에 참석한 모두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문 것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절대로 언급해서는 안 되는 인물. 존에게 필적을 알아볼 재주는 없었지만 카드의 겉봉에서는 희미하게 여성용 향수의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