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렉 레스트레이드는 큰 딸의 태도에 깊고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말 내용만 보면 투정이라던가 어리광, 칭얼거림같은 걸 떠올려야 할 것 같은데 직접 듣는 사람인 그렉에게는 운동가들의 선언처럼 들렸다.
“우리 펌킨, 학교에 안갈 수는 없어.”
“저도 알아요. 그렇다고 제가 공립학교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안가겠다고 말씀드린 거 아니에요. 그냥 제 기분이 그렇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했어요.”
로라나는 언니와 아빠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즐겁고 행복했던 여름방학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개학이 가까워오자 아이들의 감정기복 그래프는 X축을 뚫고 내려갈 지경이 됐다. 이렇게 싫어하는 애를 보내야 하는 그렉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으나 부모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커리어 쯤이야 갖다버린 셈 쳐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플레브스인 그렉은 필연적으로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있을 수가 없다. 그가 가고 난 뒤에 이 두 딸의 장래를 그나마 보장해줄 만한 것이라고는 오로지 학연 뿐인 것이다.
“....아빠가 늘 미안해.”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정말 싫어요.”
수갑 풀린 연쇄살인마와 밀폐된 취조실에 함께 갇힌 적이 있고 그때도 의연했던 그렉 레스트레이드였지만 큰 딸이 정색을 하고 노려보면 다리에 힘이 빠졌다. 솔개가 매를 낳았다는 오래된 표현이 있지만 이 경우에는 비둘기가 매를 낳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의, 생물의 본능적인 부분이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렉은 그때마다 감추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리스벳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금방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시선을 내리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했어요.”
“그거 아니? 나도 네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걸 듣는 게 정말 싫단다.”
“정말?”
“정말정말.”
그렉은 아까 서슬퍼런 기세는 간 곳 없이 풀이 죽은 아이를 꼭 끌어안고는 볼을 부볐다. 리스벳은 그렉이 방금 면도를 마쳤다는 걸 알면서도 아프다고 거짓으로 엄살을 피웠고 그렉은 벌을 주려는 것 마냥 더욱 강하게 뺨을 들이댔다. 결국 두 부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를 꼭 끌어안는 것으로 개학 첫날 아침을 보냈다.
“괜찮아요, 아빠. 요새는 왓슨 씨가 늘 학교에 계시니까.”
리스벳도 이번에는 아빠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계급분화가 끝나 확고하게 고착된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출신계급에서 벗어나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노리는 행위를 조롱하고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위치한 사람들의 적대감은 독점적으로 누리던 기득권이 걸려있는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나진 못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그 현상이 하층부에서도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때는 적대감보다는 조롱의 느낌이 좀 더 강하다. 그렉 레스트레이드가 자신의 두 딸을 사립학교로 보낸 이후에 직장에서 겪어야 했던 냉대의 정도를 짐작할 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움츠러드는 남자가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의 직장동료들은 그렉의 선택을 이해해주었다. 그렉의 사람됨이 그들을 감화시켰다기보다는 큰 딸 리스벳이 소심한 동생 로라나까지 끌고 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척하며 아빠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온 스코틀랜드 야드를 헤집고 돌아다닌 덕분이었지만. 그렉은 자신이 부모로서 자식을 돌보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방어적으로 굴지도 않았고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택에 당당했고 그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았다. 노동계급 출신의 플레브스로 태어나 이 자리까지 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쉬운 일이 아니라해도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다른 사람에게 굽신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가 그냥 파트리키가 아닌 노빌리타스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셜록 앞에서도, 홈즈 가의 다음 주인인 마이크로프트 앞에서도 뻣뻣했던 고개와 당당했던 마음은 이상하게도 존 왓슨 앞에서는 같은 수준의 강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두려움은 아니다.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내였다.
그 기분의 정체를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은 아내가 아이들 학교의 체육 선생과 바람을 피운 일로 학부모회의가 소집되었을 때였다. 그때 그렉은 삼중 살인사건에 발목이 잡혀서 회의가 소집되니 참석 바란다는 문자를 받고서도 현장으로 가야했다. 겨우 현장을 마무리 짓고 학교로 달려갔을 땐 이미 회의는 끝나있었고 그렉은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선에 아이 둘만 내보낸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때처럼 스스로가 한심하고 싫었던 적이 없었다. 그 순간에, 인간 그렉 레스트레이드 생애 최저점 중 하나로 꼽힐 만한 그 순간에 존이 있었다. 분노와 수치심, 부끄러움과 원망이 돌처럼 뭉쳐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불을 뿜을 준비가 되어있었던 리스벳과 그저 슬프고 괴로워서 우는 것 밖에 못하고 있던 로라나를 달래면서 그렉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스벳의 연락을 받고 학부모 회의에 대신 참석했다고 했다. 그렉은 그 와중에도 아빠가 아닌 그에게 전화를 건 큰 딸아이의 선택에 크게 충격받고 또 상처입었다. 그것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영리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렉. 그동안 잘 지냈나요?”
“안녕하셨습니까, 왓슨 씨.”
“존이면 충분하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살짝 서운한 티를 내며 미소짓는 남자 앞에서 그렉은 자신이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진짜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또 신세를 지게 되는 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언제나 제가 드려야 하는 걸요.”
존 왓슨은 늘 그에게 두 손 가득 진흙을 묻힌 채 최고급 비단 앞에서 어물대고 있는 어린애가 된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셜록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어떻게 노빌리타스 앞에서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렉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는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거짓말을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자 진실이 드러났다. 진리는 시간의 딸이므로.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얼굴의 묻어나는 일상의 흔적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가 믿음직한 동료, 신뢰할 수 있는 상관, 훌륭한 경찰,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희생하고 방치해둔 것들이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상자 위의 먼지처럼 그의 온 몸 위에 쌓여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루고자 목표했던 바의 거의 대부분을 이루며 살아왔으나 정작 지금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실패의 역사가 아니라 승리하기 위해 치러야했던 대가들이었다. 그렉으로 하여금 결국 셜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도 그 대가의 부재였다. 셜록의 오만함이나 타고난 특권은 그에 비하면 오히려 공정하게 느껴졌다. 목격자를 매수하여 증언을 오염시키거나 자기 가설에 맞지 않는 증거품을 은닉하는 행위들도, 그 모든 일을 저지르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겨우 자기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그에 비하면 참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단지 지루하기 때문에 약을 하고 그 바람에 구급차에 실려가 새벽 4시에 잠복근무 후에 돌아와 잠든 지 2시간이 지난 그렉을 헐레벌떡 뛰어오게 만드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렉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모든 일들을 저지르고도 그로 인한 책임은 하나도 지지 않은 채 여전히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개자식으로 베이커가 221B로 돌아왔을 때, 존 왓슨이 늘 그 곳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반복된 구토와 발열, 오한으로 기진맥진해서 물먹은 솜덩어리마냥 침대 위에 엎어진 셜록을, 신발과 양말, 겉옷을 벗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히기까지 한 뒤 이불을 덮어 그 위로 꼭 끌어안고 한동안 침대 같이 누워 있어주는 존의 모습을 뒤에서 그저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을 때의 기분이 그로 하여금 선을 넘게 만들었다.
셜록이 범인을 잡기 위해서 그가 설치해둔 폭발물 중 하나를 고의로 터지게 놔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스코틀랜드 야드는 폭파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일반시민들로부터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불법행위로 고소당했고 그를 사건현장에 참여시킨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의 핸들러로서 관리감독의무를 다했는지 여부를 밝혀내기 위해 내사를 받게 되었다. 그렉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했다. 그 모든 일이 셜록이 아닌 자신의 판단이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셜록도 놀랐지만 존은 대경실색했다. 그렉의 행동은 전략적으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셜록을 건드릴 수 있는 세력은 아무도 없다. 13인 위원회에게 경찰업무는 너무나 사소하고 지엽적인 분야였다. 홈즈 가가 버티고 있는 한 모든 실책은 셜록에게 미루는 것이 맞았다. 지금까지도 해온 일들도 그런 식이었다. 그렉 레스트레이드의 역할은 셜록이 진짜 큰 물고기들에게 앞뒤 가리지 못하고 덤비는 것을 막고 그의 약물남용 습성을 감시하고 사건현장에 대한 접근권을 주는 것이었지, 셜록에게 떨어져야 할 돌멩이들과 함께 자폭하는 것이 아니었다. 존은 그 소식을 도노반 경사에게서 들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되자마자 존은 군단 규모의 변호사들을 대동하고 스코틀랜드 야드로 쳐들어갔고 그렉이 직접 변호인선임권을 포기하고 진술한 내용을 무효로 돌리기 위해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몸 사리는 데는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관료제의 특성상 먼저 물러난 것은 내사팀이었다. 물론 존이 달리는 버스 앞에 아낌없이 셜록을 집어던진 덕분이기도 했다. 어차피 야드 내에서 그렉 레스트레이드가 경위에 머물려있는 이유가 삼생(三生)의 업보인 셜록 홈즈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들도 굳이 레스트레이드를 내쫓고 희대의 재앙인 셜록 홈즈과 직접 대면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시민들이 요구한 배상금에 대해서는... 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마이크로프트와 먼저 의논해보지 않고서는 섣불리 장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결과적으로 홈즈가가 다 뒤집어쓰게 될 거긴 하지만 말이다. 시지포스의 형벌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고 같은 곳만 맴돌 것 같던 회담이 드디어 끝나고 의례적이긴 해도 존은 총경과 악수를 나누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가장 큰 일이 마무리되고 나자 존의 머릿속에 그렉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키 작은 남자가 할 수 있는 한은 가장 박력 있고 위엄 넘치는 걸음걸이로 그렉을 찾아 헤매다가 건물 뒤쪽 쓰레기장 옆에서 그동안 잘 끊고 있었던 담배를 연달아 태우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렉!”
셜록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짐인지 알기에 존에게 그렉은 늘 한없이 미안하고 감사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아니라 해도 지금까지 이 남자가 자신을 이렇게나 화나게 만든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에 존은 다름아닌 그렉을 상대로 화를 내야 한다는 게 어렵고 낯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장애를 뛰어넘을 정도로 존의 분노는 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겁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변호사도 대동하지 않고 그런 말들을 함부로 해요? 제정신에요?!”
“왓슨 씨.”
“정말 해임되고 싶어요? 나에게 맡겨두라고 했잖아요! 목숨만 붙어있으면 나머지 일들은 모두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진짜 큰 사고만 아니면 뭐든 무마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섣불리 뒤집어쓰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진 무조건 입다물고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게 큰 사고가 아니라고요?”
“그렉!”
“폭탄이 터졌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은 건 순전히 천운이에요. 이런 운이 언제까지 따라줄 것 같습니까? 이건 저에게 경고였습니다. 셜록과 함께 지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어디까지가 기준인지도 잊어버리고 마냥 그에게 끌려가고 있던 저에게 내려진 경고요. 진짜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여기서 멈춰야 해요. 셜록을 더 이상 수사에 참여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 앨 죽일 거예요!”
“제 문제는 아니죠.”
“그렉.....”
“제가 야드에 남아있다면 셜록을 막을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제가 없어지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존의 머릿속에 하얗게 비워졌다. 존의 입은 그렉을 잡기 위해 아무 말이나 쏟아내기 시작했다.
“리, 리비는요? 론은?!”
그렉은 그 와중에도 자기 아이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애칭으로 부르는 존의 모습에 날카로운 칼에 베인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제가 셜록을 버리면 철회될 혜택이었던 가요?”
마이크로프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자였다. 하지만 존은, 존 왓슨은.
“그,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제 퇴직금인 셈 쳐주시지요.”
“그렉, 그렉, 잠깐만! 잠깐만요!”
성큼성큼 주저없이 내딛는 그렉의 발걸음을 따라잡기 위해서 존은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겨우 따라잡아서 앞을 막아섰을 때도 존의 머릿속은 여전히 하얀 공백이었다.
“그럼 나는? 나는 어쩌고요?”
“당신?”
존이 조금만 더 침착했어도 되묻는 그렉의 눈빛이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쇠가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뜨거움을 알 듯이. 그러나 존은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래서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에서 그렉에 의해 벽 쪽으로 밀쳐졌다. 존의 머리에는 아직 그렉이 자신에게 물리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조차 입력되지 않았는데 몸은 그에 의해 짓눌렸고 뒤이어 싸구려 담배 특유한 매캐하고 독한 냄새와 함께 그의 입술이 존의 것 위에 포개졌다.
존의 몸은 냄새가 없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특유의 체취가 있기 마련인데 존의 체취는 유별나게 희미한 편이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보통의 데오드란트나 코롱을 사용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냄새마저 희미해진다는 것이었다. 셜록이나 마이크로프트에게서 맡았던 고급 남성용 코롱의 냄새를 생각해보면 파트리키의 특성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이일까.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존 왓슨이 자기가 산 세월의 10배 넘는 시간을 살아온 오래된 존재라는 사실을 이럴 때만 상기하곤 했다, 편리하게도. 원인이야 어쨌든 상관없었다.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큰 남자였다. 존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컸으며 어깨도 그에 맞게 넓었다. 벽에 밀쳐져 균형을 잃고 있는 남자의 겨드랑이 안쪽으로 팔을 넣어 품 안에 가두자 맞춘 듯이 쏙 들어왔다.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가 존에게 옮겨지고 있다는 걸 의식했다. 싸구려 담배와 그에 못지 않게 값싼 커피, 밤샘 작업 후에 갈아입지 못한 셔츠에서 나는 자신의 냄새, 그 모든 것이 존에게 묻었다. 짐승이 마킹하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부끄럼 없이 그에게 비비며 그렉 레스트레이드의 뇌는 원시적인 쾌감에 젖었다. 조금 덜 원시적인 뇌는 존이 자신에게 전혀 반항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입술이, 자신에게 탐사를 허락한 듯 열려있는 입안이 그의 사고능력 중 상대적으로 고등한 부분을 잠시 마비시켰다. 존의 입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매끄럽고 관대했다. 그렉의 혀가 마음대로 자신의 입안을 유린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자못 강압적으로 엮어오는 움직임에도 순순히 따랐다. 입고 있는 옷의 색깔하며 미소 띤 얼굴이 늘상 따뜻하여 잊기 쉬웠지만 존의 체온은 그렉은 물론이고 셜록보다도 낮은 편이었다. 그 사소한 사실을 발견한 날, 그렉은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 그를 좌절하게 했던 사회적 굴레가 사라진 것도 아니면서 존의 캐시미어 코트 단추를 풀고 자켓 안쪽으로 뻗어나가는 그렉의 손은 거침없었다. 드레스 셔츠 위로 도드라진 유두를 세게 문지르자 품 안의 몸이 감전된 것처럼 펄쩍 뛰었다. 그게 저항의 신호라도 되는 듯 그렉은 존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는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무릎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끼워넣었다. 은근히 중심부를 누르며 밀어올리는 움직임에 그렉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존의 손아귀 힘이 더 강해졌다. 셜록이 저지한 연쇄폭탄테러범의 원래 계획은 다른 장소에 설치해둔 여러 개의 폭탄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연달아 터지는 것이었다. 그렉은 지금 그 폭탄 같았다. 한번 불이 붙고 뇌관이 터지자 폭발이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존은 그저 황홀했다.
존은 그렉 레스트레이드를 처음 만났던 날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갓 경사가 된 20대 중반의 젊은 남자는 결단코 존이 지난 500여년간 보아왔던 가장 아름다운 생물들 중 하나였다. 큰 키에 날씬한 몸매, 까마귀 깃털처럼 윤이 흐르는 검은 머리에 달아오른 숯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자기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무작정 발산하고 돌아다니던 셜록과는 달리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좀 더 교활하고 능숙했다. 그가 파렴치범들에게 보이던 날선 혐오감마저 그 아래의 불꽃이 보여 마냥 근사했다. 500년이나 살아온 존재가 새삼 사랑에 빠진다한들 10대 소녀처럼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렉 레스트레이드가 부인으로 선택한 여자는 존이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거나 다정하거나 우아해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란히 선 젊은 부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또 잘 어울렸다. (리스벳과 로라나의 아름다움은 부친에게서만 받은 것이 아닌 셈이다) 희망이 전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존을 편하게 해주었다. 간헐적으로 치밀어오르는 모종의 통증만 아니라면 존은 오랫동안 ‘친구’ 노릇을 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비록 단 한번도 그가 원하는 만큼 친밀한 관계가 되는데 성공한 적은 없지만 조용하고 고상하며 헌신적인 왓슨답게 존은 그렉 레스트레이드의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서서히 그의 삶에서 배제해버릴 수 없는 부분이 되어갔다.
불편한 자세로 안겨있고 벽에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부분들이 등을 아프게 찌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은 지금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을 맛보고 있었다.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이런 식으로 키스하는 남자였다.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존은 젊은 날의 그렉을 떠올렸다. 흑요석처럼 검은 눈 아래에서 붉고 푸른 불꽃이 작고 조용하게, 그러나 결코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검거하는데 실패한 범인들 때문에, 남겨진 피해자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직장에서 받는 부당한 취급 때문에, 외도한 아내 때문에 안그래도 작은 불꽃들은 점차 사그라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모두 여기 있었다. 이 늙고 지쳤지만 여전히 근사한 남자 안에, 이 키스 안에.
존은 문득 자신을 그렉에게서 떼어놓으려는 힘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그 힘은 강했고 존은 결국 그렉에게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정신이 들자, 그 힘의 주인이 그렉임을 깨달았다.
“존, 나를 봐요.”
그렉이 처음으로 그를 존이라고 불렀다. 존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존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턱을 들어올리는 손길은 은근히 가혹했고 존의 쾌감으로 흐려진 눈동자, 키스로 부풀어오른 입술, 달뜬 호흡을 관찰하는 눈은 매처럼 날카로웠다. 방금 전까지 존을 다짜고짜 밀어붙여 반강제로 입맞춤을 퍼부었던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했다.
“존,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당신이 내 뺨을 후려갈기거나 지나가는 경찰들을 부르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냐고?”
하지만 존은 좋았다. 뭐든지 괜찮았다.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단 한번도 그에게 친근하거나 살갑게 군 적이 없었다. 적의가 아닐까 고민될 정도로 거리를 두며 건조한 예의만 차렸다. 그 모든 게 그 뒤에 숨겨둔 이 남자 때문이었다. 이 뜨겁고 고압적이며 저돌적인 남자를 숨기기 위해서. 존은 정확히 그렉이 뭘 묻는지 알아듣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방금 전의 키스를 다시 갖는 것이었다.
“좋아요, 알았어요.”
그러나 그렉은 존의 이마 위에 입술을 한번 꾹 누르더니 흐트러진 존의 옷을 정리해주기 시작할 뿐이었다. 안달복달 애를 태우다가 먼저 입술을 들이밀어 보았으나 그렉은 매정하게 존을 밀어냈다. 그리곤 존의 옷차림이 제대로 정돈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한쪽 팔을 잡고 거의 질질 끌다시피 도로변으로 나아갔다. 존은 저항해보려고 했지만 그렉의 힘에 당할 수는 없었다. 므두셀라의 유전자는 긴 수명과 오랜 젊음,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줄 뿐이지, 단련없이 근력을 강화시켜주지는 않는다. 차 문이 열리고 던져지듯 집어넣어지고 나서야 존은 여기가 자신의 리무진 안임을 알았다.
“집에 가요.”
항의하려던 입은 이어지는 그렉의 말을 듣자마자 조개처럼 다물렸다.
“거기서 날 기다려요.”
리무진이 출발하고 난 다음에야 존은 그렉에게서 야드를 떠나지 않겠다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셜록은 야드에 불을 지르든 언론을 이용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건현장에 접근할 다른 방법을 찾을 테고 설령 그 과정에서 수습하지 않으면 안될 일을 벌린다 해도 마이크로프트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존은 어떤 옷을 입고 그렉을 기다릴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 저에겐 오랫동안 숨겨온 은밀한 욕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능 몸파는 존, 노예 존, 미혼모 존 (....) 이중 마지막은 존잘님이 현재 진행형으로 해주고 계셔서 요새 살 맛 남.
2. 나에게는 AU픽 배경세팅 조루증후군이 있는 덧 (....) 본격적으로 뭣 좀 해볼려면 시들.....
3. 걍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씬고자인 것에 있지 아늘까......
로드 제임스 손더스는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망높은 의학자이자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는 개업의였다. 비범한 괴짜라는 것이 그의 성품에 대한 총평이었지만 그의 연구자이자 의사로서 쌓은 업적과 명성은 경의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했다. 존 왓슨은 그의 개인 노예로 20년간 봉사해왔다. 보통 오랫동안 주인을 위해 봉사하여 그 총애를 얻은 개인 노예들은 주인의 사망 후 해방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부친의 사망 후 자신의 상속분을 모조리 유동자산화하기로 결심한 젊은 손더스 경에 의해 경매에 부쳐졌다. 존 왓슨은 요리사나 악사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높은 가격이 매겨졌고 따라서 경매가 실시될 때까지 단독 우리 안에 거처가 마련되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막 교대근무를 시작한 경비원이 존이 갇혀있는 우리의 문을 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짜고짜 그를 경매소 건물 안으로 데려갔다. 집무실과 따로 마련된 응접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척 봐도 귀족인 티가 나는 중년의 남자로 존이 받은 첫인상은 삶은 달걀의 표면처럼 매끈하고 뱀의 살갗처럼 차다는 것이었다.
“존 왓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나긋했고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으나 존은 경험이 그에게 부여해준 직감으로 이 남자의 전신에서 뿜어져나오는 권력의 냄새를 맡고 단번에 압도당했다.
“Yes, sir.”
“내 이름은 마이크로프트 홈즈라고 하네. 자네의 잠재적인 구매자이지.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이렇게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자네를 불렀네. 괜찮겠지?”
노예로서 받은 적이 없는 정중함이었으나 존은 긴장을 놓지 못했다.
“예, 하문하십시오.”
“여기 자네의 포트폴리오에 보면 전문적인 의료훈련을 받은 기능자라던데 사실인가?”
“예, 제 주인이신... 주인이셨던 제임스 손더스 경께서 직접 사사해주셨습니다. 공식적으로 검증받은 적은 없습니다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느 수준에 이른 것 같나?”
“....감히 말씀드리자면 수련의 과정을 수료한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음, 포트폴리오엔 없는데 손더스 경을 모셨던 기간은 얼마나 되나?”
“20년이 조금 안됩니다.”
“자세하게.”
존은 조금 숨을 들이마셨다.
“제 나이가 16살 되던 해에 손더스 경께서 저를 구매하셨고 그 이후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 분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셨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시중을 들었습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께서 직접 저에게 글을 가르쳐주시며 당신의 일을 보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의학과 약학에 대한 지식은 모두 그 분께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그 분의 관리감독 하에 제가 시술을 맡아보았습니다.”
“아, 자네를 찾는 단골 고객들도 있었지?”
“예. ...관대한 분들이셨습니다.”
그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의미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남자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존을 보며 웃었다.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오히려 간교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존, 자네야말로 지금까지 내가 찾아 헤맸던 사람인 것 같네.”
정식 경매절차를 밟지 않고 우회적으로 그의 소유권을 얻으려 한다는 점이 조금 수상하게 느꼈으나 존은 이내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노예였고 이제부터 이 수상한 남자가 자신의 새 주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를 따라 검은 리무진에 올라탔을 때, 남자는 다른 얘기를 했다.
“비록 법적인 주인은 나로 등록되겠지만 자네가 실제로 모셔야 할 주인은 따로 있네.”
남자,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묘사에 따르면 그의 진짜 새 주인은 노예의 인내심과 의사의 엄격함으로 다뤄야할 사람으로, 심각한 수준의 약물중독 병력을 가지고 있으며 위험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면서도 아메바 수준의 자기보호본능도 갖추지 못한, 다름아닌 그의 친동생이었다.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들으며 존은 머릿속으로 자기파괴적인 성향이 다분한 정키를 떠올렸다. 마이크로프트의 말투도 노예에게 새 주인에 대한 당부라기보다는 의사에게 다루기 힘든 환자에 관해 주는 경고와 비슷했다. 첫 만남도 그 묘사에 맞아떨어졌다. 마이크로프트의 동생, 존의 새 주인은 약에 취한 채 소파 위에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홈즈 가문의 주치의가 다녀가서 이미 응급조치를 취했다고 마이크로프트의 다른 노예들이 주인에게 전해주었다.
“셜록, 셜록. 내 말 들리니?”
그러나 그 남자는 존이 예상했던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와 이목구비는 그 골격이 조각한 것처럼 뚜렷했고 존은 그 모양이 아름다운 것인지 추한 것인지 알아차리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도자기처럼 창백한 이마와 젖어서 더욱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의 대조는 강렬했고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는 팔다리는 삐쩍 말라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망가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존에게 했던 가차없는 묘사와는 달리 동생의 이마를 쓰다듬는 마이크로프트의 손길에서는 애정과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만지지 마.”
깜짝 놀랄 정도로 깊은 바리톤이었다. 그리고 매우 명료한 발음이었다. 존은 자신의 귀가 들은 것과 눈이 보고 있는 것을 매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보다. 눈꺼풀이 열리고 드러난 눈동자는 초점이 분명했고 바로 존을 직시했다.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는 와중에도 존은 그 눈동자가 민트색에 가까울 정도로 밝은 청색이며 중앙에 황금색 반점이 찍혀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지가지하는 군, 마이크로프트. 네 도움 따윈 필요없다고 이미 말했던 거 같은데.”
“어린애처럼 굴지 말렴, 셜록. 존은 매우 유능한 사람이다. 널 보살펴줄 거야.”
“날 보살피기 위해서 필요한 게 창부는 아니겠지.”
셜록의 빈정거림에 존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가 손더스경에게서 의술을 배우기 전, 그가 손더스경에게 팔려오기 전 그의 포트폴리오에 적혀있던 카테고리는 ‘침실용’이었다. 하지만 그 포트폴리오는 다름 아닌 손더스경에 의해 폐기되었고 현재 그의 포트폴리오 어디에도 그런 말은 적혀있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는 놀라기는커녕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라. 창부는 화대를 받아. 게다가 존이 널 위해 해줄 일에 비하면 그 직업의 노동 강도가 훨씬 가벼울 거다.”
명료한 시선과 훼손되지 않은 언어구사능력에도 불구하고 셜록은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셜록조차 그 상태로는 혼자서 자기 플랫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셜록은 이를 갈면서 마이크로프트의 도움을 받아들였고 존은 그 과정에서 슬쩍 끼어들어 따라갔다.
베이커가 221B는 본디 적당히 넓고 안락한 주거공간이었다. 심지어 현 상태에도 불구하고 존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플랫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이크로프트의 표정에는 잘못 볼 수 없는 강렬한 혐오감이 떠올랐다.
“여길 ‘집’이라고 불러야 하다니.”
“...앞으로는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에서 혐오감이 사라졌다. 그는 애완견이 가르쳐주지 않은 재주를 부리는 걸 바라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존을 바라보았다. 코 끝으로 사람을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시선과 기특함의 결합은 존의 속을 조금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셜록을 보살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존. 이런 사소한 일까지 자네한테 모두 맡겨둘 순 없지.”
“일상적인 집안일까지는 그리 큰 부담이 아닙니다. 손더스경의 연구실도 이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비슷한 상태였고... 그 분께선 자기 연구실에 다른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싫어하셨던 지라 정리정돈은 모두 제 몫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벅차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말해주게. 그럼, 잘 부탁하겠네.”
존은 그날 밤, 밤새도록 셜록의 플랫을 청소했다. 침실에서 자고 있는 셜록을 깨우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이미 쌓여있는 쓰레기를 치우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이 플랫에선 무엇이 쓰레기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존은 최선을 다했다. 동쪽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서 존은 거실 바닥 구석에 누워 잠을 청했다. 셜록은 플랫에 돌아오자마자 자기 침대로 가서 곯아떨어졌고 마이크로프트도 별 말 없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아무도 이 곳에서 존이 머물 장소를 지정해주지 않았다. 존은 자신이 주인 소유의 소파 위에서 잠들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존을 깨운 것은 누군가의 발길질이었다.
“일어나, 노예!”
정확히는 그의 새 주인, 셜록의 발길질이었다.
“내 케이스 파일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디다 버렸냐고!”
복부를 걷어차인 것이 아니어서 존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재빨리 일어날 수 있었다. 존은 수면이 부족해 멍한 머리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셜록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재빨리 책장 앞으로 다가가 손으로 가리켰다. 졸린 눈을 깜박이며 더 맞기 전에 설명하려고 했다. ‘여기에 정리해두었습니다.’
“누가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라고....”
그러나 존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셜록의 고함이 먼저 터져나왔고 동시에 셜록은 그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놀라운 스피드로 존의 옆으로 다가와 책장에 꽂혀있는 폴더 하나를 뽑아들었다. 폴더의 겉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고함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존은 그 케이스 파일을 모두 열어보고 내용을 확인한 다음, 사건 관계 서류들과 사진들을 시간 순서에 맞게 정리하고 자기 나름대로 사건명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포스트잇에 적어 폴더 겉면에 붙인 뒤 알파벳 순서에 따라 정리했다. 해결한 케이스의 경우에는 그 옆에 작게 ‘complete’ 또는 ‘solved’ 라고 적어놓았는데 complete은 사적인 의뢰를 받아서 어떤 목적을 수행해야 했던 사건의 경우였고 solved는 말그대로 범죄를 해결한 경우였다.
셜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몇 번의 헛기침 후에 그가 꺼낸 말은 이러했다.
“증거품들은?”
존은 다시 한번 눈을 깜박였다. 당혹스러웠다. 케이스 파일을 다 읽은 후에도 바닥과 탁자, 소파 위에 어지러이 널려있던 잡동사니들이 ‘증거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아직 청소차가 오지 않았을 테니 다시 가지고 오겠습니다.”
존은 셜록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집밖으로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종이박스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여기에 모두 들어 있을 텐데...”
마이크로프트라면 라텍스 장갑을 끼지 않는 이상 절대로 만지려고 들지 않을 더러운 낡은 용도불명의 물체들을 존은 셜록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바닥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오브제 전시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아지는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던 셜록은 존이 박스에 들어있던 물건의 반 이상을 꺼내놓았을 때야 내뱉듯이 말했다.
“됐어, 필요없으니까 모두 버려.”
그러더니 벙쪄있는 존을 내버려두고는 파란색 가운을 망토처럼 휘날리며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20분 후, 욕실에서 나와 다시 침실로 들어간 셜록은 30분 만에 정장, 코트, 구두, 머플러, 장갑까지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한 차림새의 신사가 되어 나타났다. 존은 이미 바닥에 늘어놓았던 쓰레기들을 다시 치우고는 부엌으로 가서 어제 하지 못했던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런 존을 힐끗 바라보기만 하고 셜록은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저, 아침은....”
“만들 수 있으면 해보시지.”
그리고는 휑하니 자리를 떠났다. 존은 이것이 이곳에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셜록의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프트는 존이 베이커가에 있으리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듯 했다. 그날 오후, 셜록이 없는 집에 마이크로프트가 보낸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플랫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소포 하나를 존에게 건네주었다. 안에 든 것은 얇은 남성용 지갑과 휴대폰이었는데 지갑 안에는 신용카드 한 장만이 들어있었다. 신용카드 겉면에 새겨진 소유주의 이름은 마이크로프트 홈즈였다. 그리고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는 단 두 개였다. 하나는 MH라는 이니셜 아래 저장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SH였다. 존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확인해볼 것도 없이 MH로 저장된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답문은 15초쯤 후에 왔다. You’re very welcome.
대충 부엌과 식탁을 본래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치우자 허기가 찾아왔다. 존은 셜록의 말을 기억하고는 - 만들 수 있으면 해보시지 - 그를 허락으로 간주해도 그리 큰 비약은 아닐거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냉장고를 열자, 그 말의 진의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손더스경은 여러모로 매우 좋은 주인이었다. 존은 절단된 신체부위에 익숙했다. 익숙하지 않았던 건 그것들이 식재료와 같은 냉장고에 들어가있다는 점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냉장고 안엔 식재료라고 할 만한 것들이 거의 없었다. 썩기 직전의 채소와 먹다 남은 과일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난 뒤,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준 카드를 들고 마트로 향했다.
1. 폭주의 에너지원이 되어주었던 분노가 슬슬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퀄리티는 예외로 쳐도 멘붕일때 가장 생산력이 좋다니 자괴감이... ㅠㅠ
2. 쓰다보니 팬픽의 핵심인 인간관계 재정립은 어따 던져버리고 가리지널틱한 설정짜기에나 몰입하는 내 꼬라지를 목도하게 됐다. 아, 이게 제작진이 셜록 3 찍다가 한 짓이구나.
3. 존잘님~ 저는 존잘님의 은총에 힘입어 행복한 소비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싶사와요~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탄생은 홈즈 클랜 뿐만 아니라 노빌리타스 전체의 기쁨이었다. 가문의 요청 없이도 여왕이 직접 아이의 대모가 되겠다 나섰으며 갓 태어난 아이에게 13인위원회의 좌석이 주어졌다. 물론 다른 가문들의 시기가 없을 수는 없었고 겉으로 보이는 만큼 한마음 한뜻으로 기뻐할 리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300년 만에 태어난 노빌리타스의 아이는 그만한 영예의 독점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존재였다. 13인 위원회에 좌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노빌리타스는 총 아홉 클랜. 그 중 홈즈 클랜은 클랜의 수장인 사이먼 홈즈에게 한 좌석,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태어나자마자 한 좌석, 총 두 좌석을 (이 의결권은 그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그의 부친인 사이먼 홈즈가 대행할 예정이었다) 확보하게 되었다. 이로써 홈즈 클랜은 노빌리타스 중에서 선두에 서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안도감은 딱 7년 동안 유지되었다. 바이올렛 홈즈가 두 번째 아이를 잉태한 것이었다. 므두셀리온 중에서 귀족계급인 파트리키, 그 중에서도 순혈의 극단을 달리는 노빌리타스의 생식능력은 노새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했다. 한 대에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힘들어서 갓 태어난 마이크로프트에게 그 많은 영광들이 주어졌는데 겨우 7년의 터울을 두고 형제가 태어나다니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노빌리타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파트리키에게 형제란 신화적인 개념이었다. 동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플레브스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마이크로프트의 탄생과 달리 둘째 아이의 잉태는 그 부모들에게도 반갑지 않은 사건이었다. 독생자로 대를 잇는 것이 당연한 파트리키에게는 장자상속이니 균분상속이니 하는 개념조차 없었다. 게다가 장생종 중에서도 정점에 올라선 노빌리타스에게 7년이란 터울은 지나치게 가까웠다. 아들이든 딸이든 두 번째 아이의 존재는 클랜의 분열을 조장할 위험인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장구한 것이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동그란 머리를 가능한 한 힘껏 젖힌 채 벽에 걸린 오래된 초상화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아이의 뒷모습에는 바라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존 한정일테지만) 요소가 있었다.
“마이크로프트.”
나지막한 부름에 재빨리 뒤돌아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는 모습에는 분명 기쁨과 반가움이 있었다. 당장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지 않은 것은 홈즈 가의 다음 대 수장으로서 받은 교육이 부여한 자제력 때문이지, 애정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어서와요, 존. 기다렸어요.”
생물의 눈이라기엔 지나치게 표면이 매끄럽고 색이 골라서 세공한 인공물 같은 눈동자에 비로소 어린아이다운 반짝임이 깃들었다. 친근하게 손을 잡거나 팔에 매달리는 등의 스킨쉽은 없었지만 존을 맞이할 때의 마이크로프트는 다른 이들을 맞이할 때와는 달리 퍼스널 스페이스를 아예 잊어버린 듯 가까이 섰다.
“괜찮아요. 존이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다들 제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좀 지겨워요. 이젠 동생도 생기니까 어린애 취급은 그만해도 될 텐데.”
태어난 그 순간부터 순하디 순해서 흔한 잠투정 한번 한 적 없는 아이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존은 대견하다기보다는 안쓰럽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동생이 생긴다는 것의 의미를 알 리가 없는 아이가 플레브스의 책이라도 읽었는지 ‘윗동기로서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 플레브스의 아이들은 동생이 생기면 다 큰 아이도 퇴행적인 행동을 한다고 하던데 그네들과는 달리 이 아이는 어리광을 부릴 생각도 못하는 것이다. 노빌리타스에는 그의 친구가 되어줄 만한 아이가 없다. 겨우 7년의 세월이지만 이 아이가 겪은 인간관계에 또래친구란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홈즈 클랜의 오랜 클리엔테스이자 사이어인 왓슨 가의 당주인 존에게 홈즈의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유전형질이나 다름없었다. 혈우병 환자가 자신의 출혈을 멈추지 못하듯이 존은 아이에 대한 애정을 온전히 자제할 수 없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의 어깨를 끌어당겨 정수리에 입을 맞추는 존의 손길을 태연한 듯 받았으나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색을 온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존은 마이크로프트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아이가 보고 있던 것들에 시선을 주었다.
“새삼 여기서 뭘 보고 있었던 거야?”
“동생이 어떻게 생겼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존과 해리엇은 꽤 닮은 편이죠?”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좀 슬프지만 그래, 우린 좀 닮았지.”
내용과는 달리 존의 말투에는 해리엇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마이크로프트는 존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저렇게 거침없이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리엇과 존은 육촌지간이었다.
므두셀라의 형질은 우성이었기 때문에 지금 현재 지구의 지배종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므두셀리온이었다. 4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므두셀라의 유전자는 인간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몇몇 소수인종들을 제외하면 인류의 태반은 므두셀리온이라 할 수 있었다. 왓슨 가문은 상류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력가문이었지만 온전한 파트리키는 아니었다. 해리엇의 존재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왓슨 가의 유전자풀엔 아직 플레브스의 특징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왓슨 가문이 어지간한 파트리키 가문보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까닭은 홈즈 클랜과의 관계 덕분이었다. 홈즈 클랜은 그들이 노빌리타스로 인정받기 훨씬 전, 평범한 파트리키였을 때부터 아직 순수한 인간이었던 왓슨과 연을 맺었다. 므두셀라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관계는 더더욱 공고해져 홈즈는 마침내 왓슨을 자신들의 사이어(sire)로 삼기에 이르렀다. 사이어를 둔다는 것은 단순한 유모나 후견인을 지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정서적 결합을 의미하는 일이기에 홈즈 측에서도 상당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사이어를 둔다는 건 그만큼 강한 메리트가 있는 일이었다. 우선, 사이어를 둔 어린 므두셀라는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훨씬 건강하고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사이먼 홈즈는 존 왓슨의 부친인 에드워드 왓슨을 사이어로 두었고 존 왓슨과 함께 성장했다. 세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후손이 없어서 노빌리타스의 구성원은 주기적으로 교체되었는데 홈즈만은 그 교체의 물결에 휩쓸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 오래된 순혈의 계보에도 불구하고 왓슨을 사이어로 삼은 이래 홈즈의 혈족에는 단 한 명의 조산아나 사산아, 기형아도 태어나지 않았으며 언제나 대를 이을 후손을 생산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제대로 된 파트리키도 아닌 가문을 사이어로 삼는 무모함을 질책하던 다른 노빌리타스들도 이제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부러워한다고 해서 모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왓슨 가의 위상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노빌리타스의 사이어가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노빌리타스의 무조건적인 우정과 신뢰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노빌리타스에게는 그런 우정과 신뢰를 줄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있다 해도 개인의 수준에서 그쳤다. 그에 반해 홈즈와 왓슨의 인연은 깊었다. 왓슨도 홈즈에게 대대로 헌신적이었지만 왓슨에 대한 홈즈의 배려는 때론 노빌리타스로서의 지위를 위협받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루어졌다. 2500여년 전, 홈즈는 플레브스인 왓슨을 자신의 정식 클리엔테스로 인정받기 위해 파트리키와 플레비스 간의 혼인과 플레브스의 공직 진출을 금지하는 성문법을 폐지하는데 앞장섰다. 그때 홈즈는 처음으로 13인 위원회의 의결권을 거머쥔, 그야말로 신참내기에 불과했다. 일대의 의결권은 노빌리타스로 인정받기 위한 첫 번째 관문에 불과하다. 정치적 도박을 할 때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홈즈는 그 무모해보이는 도전에 뛰어들었다. 그 결정을 플레브스 중 상류계층에 속하는 에퀴테스 계급을 포섭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사이어에 의해 양육되어지는 홈즈 클랜의 수장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이어는 마치 같은 틀에서 찍어낸 듯 조용하고 고상하고 금욕적인 사람들이었으며 헌신적으로 그들을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권력이 개입되어 있기에 미묘한 긴장감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친부모와의 관계보다 비록 계약과 주술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동물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무조건적인 애정을 조건없이 퍼부어주는 사이어들에게 그들은 한없이 약했다. 사이먼 홈즈는 그의 어머니 에키드나 홈즈가 죽을 때는 울지 않았지만 에드워드 왓슨의 죽음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사이먼 홈즈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속마음을 존에게 고백했다.
“존, 어떡하면 좋지? 난 정말 뭘 어찌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네. 난 이 아이를 죽일 수가 없어. 이 아이도 나와 바이올렛의 아이란 말이야.”
존은 의사로서 노빌리타스를 상대로 한 낙태시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이렇게 태어나버리면 이 아이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야. 자네는 이미 마이크로프트의 사이어고 왓슨 가에 자네 말고 있는 자손이라고는....”
“해리엇 뿐이지.”
“자네가 해리엇을 사랑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녀에게 내 자식을 맡길 수는 없어. 최악의 사이어라도 없는 사이어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해리엇은...”
“잠깐만 사이먼, 일단 좀 진정해. 아무도 해리엇에게 자네 아일 맡긴다고 하지 않았어. 오 갓, 부디 그런 일이 없길 바라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웃었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사이먼, 이 아이에게 사이어를 붙일 수는 없어. 해리엇이 아니라 다른 왓슨이 있어도 나는 반대했을 거야.”
“...나도 알아. 자네의 판단이 옳겠지.”
“이 아이와 마이크로프트 사이의 나이 차는 고작 7년이야. 성년이 지나면 그 정도의 나이 터울은 아무것도 아니야. 둘은 이란성 쌍둥이나 다름없을 거고 설령 노빌리타스의 상속이 장자우선의 원칙에 따라 이뤄진다해도 둘 사이에 있을 갈등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될 거야.”
“하지만 존... 나는, 나는 이 아이에게도 부모야.”
존은 사이먼의 간절한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사이어 없이 잘 사는 다른 노빌리타스들에게 실례야, 사이먼.”
임신 3개월 때부터 스무개쯤 되는 후보군을 마련해놓고 고심을 거듭해 고른 마이크로프트의 이름과는 달리 둘째 아이, ‘셜록’의 이름은 자못 즉흥적으로 결정되었다. 모두가 그 아이의 탄생으로 인한 여파에 신경쓰느라고 정작 아이의 존재 자체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7년 간격으로 노빌리타스의 아이를 둘이나 낳은 바이올렛은 심신이 피곤에 지쳐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결국 이런 일에는 별 재주가 없는 사이먼이 마이크로프트의 이름을 정할 때 생각해두었던 후보군 중 하나를 선택했다. ‘셰린포드’. 지나치게 고루하고 발음하기 귀찮다고 탈락시켰던 이름이었다. (그래놓고서 선택한 이름이 마이크로프트라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전화번호부를 뒤지면 수만명은 나올 평범한 이름보다는 차라리 고루하고 발음하기 힘든 게 낫다고 생각한 사이먼이었지만 그래도 처음의 탈락이유는 여전히 유효해보였다. 사이먼은 한참동안 혼자서 끙끙 앓다가 바이올렛에게 상의도 없이 출생신고서에 원안을 변형시킨 이름을 적었다. ‘셜록(Sherlock)’
비교할 대조군이 없는 고로 마이크로프트의 영리함과 의젓함은 좀처럼 주목받는 바가 없었다. 존은 예외였다. 그는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중간에 위치한, 일종의 하이-에퀴테스 계급에 속했고 (정확하게는 에퀴테스보다는 파트리키에 가까운 위치였다) 따라서 스스로가 홈즈 클랜의 클리엔테스이면서도 자기 휘하의 클리엔테스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플레브스였다. 존은 클리엔테스들의 집에 자주 초청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의 아이들을 보았다. 존은 다정다감한 성품이었지만 아이들은 존의 파트리키적인 면모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차리고는 무서워해서 그가 곁에 있으면 조용해졌기에 아이는 아이답게 좀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존은 아이들의 곁에 다가가지 않고 그저 멀찍이 서서 관찰하곤 했다. 따라서 존은 보통의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노빌리타스보다는 훨씬 잘 알았고 마이크로프트의 영리함과 의젓함이 노빌리타스의 특질이라기보다는 그 아이가 감수해야 하는 고독함에 기인한 것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것이 존으로 하여금 마이크로프트를 원래 사이어가 그의 아이에게 그래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성과 관심을 기울이게 한 요인이었다. 그러면 어른스러운 마이크로프트는 그런 존의 관심과 애정을 자신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서 온 것이라 생각하여 더욱 어른스럽게 구는, 악순환이 이루어졌다. 사이먼은 그런 일을 겪을 일이 없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꽤 많은 노빌리타스들이 태어났고 무엇보다 그에겐 형제나 다름없는 존이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로프트에겐 아무도 없었고 장차 자신의 정적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한 어린 동생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이먼에게 매정하게 경고한 것치고는 존 본인도 갓 태어난 아이를 눈 앞에 두고서는 자기가 한 말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어쨌든 그는 홈즈의 사이어였고 홈즈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은 갓 태어난 동생을 보고 싶어하는 마이크로프트를 말리지 못했다. 눈도 뜨지 못하면서 주먹 가까이에 손가락을 갖다대기만 하면 꽉 움켜쥐는 작은 손가락들에 마이크로프트는 완전히 매료된 듯 했다.
“너무 작아요. 저도 이렇게 작았어요?”
존은 바이올렛의 몸이 7년의 휴지기만으로는 또 하나의 노빌리타스를 키워내는 걸 버거워하는 바람에 셜록이 원래 그래야 하는 것보다 일찍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신생아치고도 작은 거란 사실을 모두 이야기해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너는 셜록보단 조금 더 컸단다. 아주 건강하고 순한 아이였지.”
존은 스쳐지나가는 말로도 동생이 약하니까 네가 잘 보살펴줘야 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존 왓슨은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을 죽여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못되었다. 그냥 놔두면 하루종일 어린 동생만 쳐다보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마이크로프트를 내보낸 건 결국 마음 약한 사이어가 아니라 엄한 어머니였다.
“마이크로프트, 곧 튜더가 오실 시간이야.”
“예, 어머니.”
벌써부터 서운한 기색을 능숙하게 갈무리할 수 있게 된 마이크로프트가 애달픈 건 존 뿐이었다. 바이올렛에게선 자신이 낳은 완벽한 후계자에 대한 자랑스러움 밖에 읽어낼 수 없었다.
“나도 가볼게요, 바이올렛. 몸조리 잘해요.”
“일부러 들려줘서 고마워요, 존.”
홈즈 가의 사람들은 대체로 짙은 색의 머리카락과 옅은 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정형적인 묘사에 들어맞는 쪽은 마이크로프트보다는 셜록이었다. 사이먼은 검은 머리카락에 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고 바이올렛은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지니고 있었는데 마이크로프트는 머리카락은 바이올렛을 닮았지만 눈은 홈즈 가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짙은 갈색이었다. 그에 비해 셜록은 부친의 검은 머리카락에 한 눈에 봐도 바이올렛를 쏙 빼닮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누굴 더 닮았든 간에 존은 생각했다. 첫 아이로 마이크로프트같은 아이를 얻는 것은 어찌보면 불행일지도 모르겠다고. 셜록은 까다로운 아이였다. 그저 까다롭다고만 말하는 것은 심각한 과소평가다. 300년간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없었던 노빌리타스에게 겨우 태어난 아이가 마이크로프트같이 키우기 쉬운 순둥이였던 것은 후에 셜록을 안배해두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본디 아이들은 시끄럽고 손이 많이 가는 법이라고 생각했던 존이었지만 셜록은 보통 아이 10명 분의 까다로움과 시끄러움을 갖고 태어난 듯 했다. 먹는 것도 잘 먹지 않으면서 보채기는 끊임없이 보챘다. 이럴 때의 셜록은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이 안드는 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데 그 작은 몸으로 어찌나 격렬하게 자신의 불쾌감을 표현하는지 어디선가 웜홀이 열리고 지구의 멸망을 경고하는 외계생명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셜록의 양육을 위해 고용한 유모는 채 석달을 버티지 못했다. 안그래도 예민한 아이가 양육자가 자꾸 바뀌니 더 예민해졌다. 셜록과 같은 층 방을 쓰는 사람들은 셜록의 울음소리 때문에 밤마다 두 세번씩 깼다. 부모의 애정으로도 축적된 수면부족을 견딜 수는 없었다. 셜록은 별채로 보내졌다. 마이크로프트는 종종 동생을 보러갔지만 존과 함께 보았던 처음의 얌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마이크로프트가 만지기만 해도 자지러지듯 울어대는 바람에 점점 마이크로프트도 발 길을 끊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생이 싫어졌다기보다는 동생이 너무 울어서 탈진할까봐 걱정되어서 그런 것인 만큼 존이 올 때마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의 이야기만 했다. 그리고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뭔가를 원할 때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존은 홈즈의 아이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의도적으로 셜록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로프트의 기대에 찬 눈 앞에서는 그 모든 결심이 무용했다. 셜록은 마침 드물게도 잠들어있었다. 고용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유모는 간이 나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얼굴색이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존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지금 그녀를 버티게 하는 건 아이에 대한 의무감이 아니라 홈즈 가가 제시한 천문학적 금액의 보수임을 알아차렸다. 마이크로프트의 등장에 유모는 셜록이 깰까봐 전전긍긍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형을 돌려보낼 수 있는 배짱은 없었다. 50년전만 해도 노빌리타스에겐 자신에게 무례를 범한 플레브스를 직접 처벌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보통 사려가 깊다는 평판을 듣는 존이 이렇게까지 타인의 정신상태에 무심하게 굴 수 있는 건 오직 마이크로프트 때문이었다. 정작 유모의 고충을 배려한 것은 마이크로프트였다. 마음에 드는 건 뭐든지 만져보고 싶고 잡아보고 싶은 어린아이의 충동을 꾹 참으면서 마이크로프트는 혹시 실수라도 할까봐 자신의 양손을 꽉 움켜쥔 채 셜록의 요람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마이크로프트를 따라 셜록의 모습을 지켜본 존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어린애답게 보송보송해야 할 하얀 피부 위에 건선과 염증의 흔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들어있는 눈가에는 눈물자국이 또렷하다. 존은 안타까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셜록의 습진이 생긴 피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미미한 접촉은 셜록의 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셜록은 가만히만 있으면 도자기 인형처럼 예쁜 얼굴을 있는 힘껏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전조는 충분했다. 신경쇠약으로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유모를 옆에 두고서 존은 재빨리 셜록을 안아올렸다. 으아앙! 흡사 사이렌을 닮은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유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마이크로프트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존에게는 아직까지 침착함이 남아있었다. 적어도 이 정도 울음소리로는 존을 당황시킬 수 없었다. 먹지 않아 작고 마른데다가 피부질환으로 온 몸이 얼룩덜룩한 아이는 존의 눈에 일단 환자로 보였고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로서의 존은 쉽게 당황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몰라 불안한 유모는 방 밖으로 내보낸 뒤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셜록을 기저귀교환대 위에 올려놓고는 온 몸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몇몇 부위에서는 이미 피부의 태선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적신 거즈로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얼굴과 피부질환이 생긴 부위를 닦아주고 있는데 어느샌가 거짓말처럼 울음이 멈춰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기해서 쳐다보자 눈이 마주쳤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크고 동그란 눈동자 속에서 오고간 격렬한 갈등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보였다. 으앙, 다시 시작될 것 같았던 격한 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이런 깜찍한 녀석.”
이 조그만 녀석이 상대의 반응을 보며 성질을 부린다는 걸 알게 되자 존의 손속은 더욱 거침없어졌다. 연고를 바르고 기저귀를 갈고, 카페인이 없는 찻물을 우유병에 담아 물리는 과정 중에도 셜록은 종종 반항을 시도했으나 존은 윽박지르거나 섣불리 달래지 않았다. 대신 단호하게 버텼고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와 눈싸움을 시도했다. 이 나이 때 영아의 시야는 선명하지 않은 법이고 셜록이 존의 기세에서 뭔가를 느꼈을 지도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셜록은 결국 존에게 굴복했다. 그는 물을 다 마신 뒤에는 순순히 분유까지 마시고 존의 토닥거림에 맞춰 트림을 하더니 다시 잠에 빠졌다. 이미 마이크로프트를 키워본 존의 손길은 능숙했고 의사로서의 자신감은 견고했다. 어쩌면 셜록의 잔뜩 성이 나있던 신경을 진정시킨 것은 그 무심한 전문성일 수도 있었다. 셜록이 잠들어 조용해지자 마이크로프트는 숭배하는 눈으로 존을 바라보았다.
“널 키우면서는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어.”
존을 바라보는 유모의 시선은 마이크로프트의 것처럼 순수하게 열렬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가 받는 보수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는데 그녀는 결국 자신의 능력이 그에 어울린다고 증명하는데 실패한 셈이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존은 마이크로프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본채로 향했다.
“넌 너무나 착한 아이라 내 실력을 모두 발휘할 기회를 준 적이 없었거든.”
훈훈한 결말이었지만 존이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존은 자신의 품안에서만 스위치를 끈 듯 울음을 멈추는 셜록의 어린 고양이같은 파란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이 꼬맹이는 동물적인 것을 넘어서 악마적이라고 부를 만한 본능을 타고 났다고. 심적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따스함이 깃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존 왓슨의 한계였다. 마이크로프트가 튜더를 통한 홈스쿨링을 끝내고 보딩 스쿨로 진학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년 뿐이었고 존은 그 시간을 소비함에 있어서 마이크로프트를 최우선순위에 놓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끝나면, 어린 마이크로프트가 보딩 스쿨을 졸업하고 엄격한 교칙에서 해방되는 날이 오면 그는 더 이상 존의 아이가 아니게 될 테니까. 존은 여전히 그의 사이어겠지만 마이크로프트는 더 이상 그의 아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존은 이미 그 모든 과정을 자신의 아버지와 사이먼을 통해 목격했다. 그나마 아버지에겐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 자신에겐 아무도 없었다. 존은 자신이 그 상실감을 아직 어린 셜록을 통해 보상받으려고 할까봐 걱정되었다. 존은 아무도 바라지 않지만 언젠가 올 것이 분명한 ‘그 날’이 왔을 때 자신이 마이크로프트의 옆에 서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의 의무이고 책임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된다니까!’ 그러면서도 존은 셜록을 안아올려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의미없는 소리를 내어 주의를 끌고 하도 악을 쓰며 울어서 열이 오른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마이크로프트는 젖먹이가 아니었고 튜더와의 교습, 홈즈 가의 후계자로서 공식석상에 의례적 참석 등 벌써부터 짊어져야할 의무가 있었다. 항상 존의 곁에만 있을 형편이 아니었고 존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반해 셜록은 아직 요람에서 버둥거리는 영아로 누군가가 항상 곁에 있어줘야만 했다. 바이올렛은 새로 고용한 유모가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이건 당신 책임이에요, 존. 사이어에게 안겨본 아이가 다른 사람 품을 편하게 여길 리가 없잖아.”
“미안해요, 바이올렛. 하지만 그때는 나도 모르게, 애가 너무 약해보여서 그만...”
“그냥 투정이었어요, 존. 사과받으려고 한 말 아니에요. ...마이크로프트는 안 이랬는데 어디서 이런 아이가 나왔는지.”
셜록은 존의 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길에는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듯 울었다. 심지어 친엄마인 바이올렛의 손도 타지 않으려했다. 노빌리타스가 자기 아이를 직접 양육한 사례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마이크로프트는 이렇지 않았다. 출산할 때의 환경은 아이를 대하는 모친의 정서적 반응에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클랜의 분열을 유발시킬 골칫거리를 낳게 되었다는 걱정, 주변 사람들의 살얼음 위를 딛는 듯한 반응, 무엇보다 육신의 고통과 피로. 게다가 태어난 아이까지 까다롭고 예민하기 짝이 없었다. 바이올렛은 자신의 장남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평범한 모친이 아이에게 갖는 보편적인 정서와는 거리가 있지만 노빌리타스는 원래 보편성과는 그닥 인연이 없는 종자들이다. 그래도 바이올렛에게 마이크로프트는 바라볼때마다 기쁨을 느끼게 하는 존재임은 확실했다. 셜록이 바이올렛에게 그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데 실패했다는 건 명백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 존. 당신에게 이런 고생을 연달아 두 번이나 시키다니. 사이먼도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요.”
“그러지 말아요. 사이먼이면 몰라도 진짜 고생한 당신한테서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네요. 게다가 마이크로프트는 이상할 정도로 순해서 일이라고 할 것도 없었어요.”
뭐가 그렇게 불편하고 분했는지 울다가 그친 후에도 남은 여운에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떠는 셜록을, 존은 애정과 한심함이 적당히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내 첫 시련이다, 이 못된 녀석.”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이 지나치게 많은 ‘유일한(only)’ 타이틀을 달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는 노빌리타스의 유일한 7살짜리 어린애였으며 유일하게 친동생을 가지고 있었고 유일하게 사이어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의 간접경험은 노빌리타스든 아니든 7살짜리 어린애에게 어울리지 않는 광대한 범위와 깊이로 축적되어 있었지만 지나치게 똑똑한 아이들이 종종 그렇듯이 자신의 진짜 경험과 감정에 대해서는 좀 느리게 반응했다. 마이크로프트가 동생도 좋고 존도 좋지만 존과 동생이 함께 있는 건 싫다는 모순을 자각하고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그러나 직설적이지 않게 표현하는 방법을 익혔을 때쯤엔 셜록은 이미 빛의 속도로 기어다니거나 지지대를 잡고 걸어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어있었다. 아직 제대로 된 말은 하지 못했지만 눈빛과 손짓, 몇몇 유아식 어휘들로 자신의 의사를 상당한 수준의 구체성을 갖추고 표현할 수 있었다. 마이크로프트나 셜록이나 서로에게 정을 붙이지 않는 게 좋겠다는 어른들의 판단에 따라 두 형제가 함께 있은 적은 드물었는데 그래도 동생에 대한 아련함이 있는 마이크로프트에 비해 셜록은 마이크로프트를 명확하게 ‘경쟁자’로 인식했다. 그 원인은 존에게 있었다. 어린 셜록이 눈치챌 정도로 존의 우선순위가 언제나 마이크로프트였던 것이다. 존을 비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홈즈의 사이어이자 클리엔테스로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한 것에 불과했다. 그를 탓할 수 있는 일은 이미 확고한 결정을 내린 주제에 셜록에게도 어설프게 정을 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셜록은 더 이상 온 몸을 화재경보장치화 시키며 우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고 까다롭고 예민한 성질을 드러내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지만 그래도 슬슬 존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을 돌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납득했다. 따라서 한때 해고되었던 베이비시터가 다시 고용되었고 존은 셜록에게서 해방되었다. 그렇다해도 마이크로프트의 사이어로서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보딩 스쿨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홈즈 저택을 빈번하게 찾아왔고 더 이상 별채에 머무르지 않는 셜록과도 늘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존은 그때마다 뽈뽈뽈 기어와서 자신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일어서는 셜록을 안아올리고야 말았다. 도저히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그 맹목적인 애착의 시선을 외면하고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존이 마이크로프트의 스케쥴이 비는 시간에 맞춰 왔을 때는 상대적으로 나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응접실에서 마이크로프트의 용무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을 때엔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처럼 셜록이 나타났다. 베이비시터가 데려다주지 않으면 자기가 벽을 잡고서 걸어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이크로프트에 대한 죄책감과는 별개로 아이의 사랑스러움은 대뇌에서 터지는 화학물질 같았다. 그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요렇게 작은 몸으로도 이 넓은 집을 제멋대로 쏘다니는데 크면 아무도 널 못 말리겠구나, 그렇지?”
뭐가 그렇게 좋은 지 존의 무릎 위에 앉아선 셜록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존의 이름은 발음하기 쉬웠고 어린애의 불분명한 발음으로도 그것이 자신의 이름임을 모를 수가 없어서 존은 셜록이 자신의 이름을 무슨 구호처럼 외칠 때마다 대답해주었다. 존은 셜록에게 있어 자신이 그렇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가 부를 때마다 대답해주는 사람.
마이크로프트의 우수한 학업성취도는 그의 배경과 함께 그가 원하는 어느 학교에라도 진학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했다. 언론에 공개된 사항들과 팜플렛, 사이먼이 개인적으로 인맥을 동원해 조사한 결과 등을 바탕으로 마이크로프트는 세 군데의 학교를 1차적으로 선정했다. 그는 학교 건물과 부대시설, 기숙사를 모두 자기 눈으로 직접 살펴보고 싶어했고 존에게 함께 가주기를 요청했다. 존은 기꺼이 따라나섰다.
마중나온 교장을 대하는 마이크로프트의 태도를 보며 존은 솔직히 좀 놀랐다.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마이크로프트를 본 적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그의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자기보다 몇 백년을 더 살아온 노회한 행정가와 고도로 정제된 외교적 언사를 주고 받았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게 말해온 것처럼. 그는 의젓하고 예의발랐으며 노련하게 고압적이었다. 이것은 사이먼보다는 바이올렛이 잘하는 일이었다. 존은 사이먼에게는 마이크로프트와 셜록 모두가 그의 아이인 반면, 바이올렛에게 마이크로프트는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유를 알았다. 마이크로프트는 바이올렛을 닮았다. 특히 자신이 권력자임을 자각하고 있는 부분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묘하게 섭섭한 마음이 뒤엉켜서 마이크로프트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데 문득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교장의 태도가 눈에 들어왔다. 존은 보통 신경쓰지 않고 적당히 무시하는 전략을 취하곤 했는데 마이크로프트가 한 발 빨랐다.
“존, 이리 와봐요. 여기가 대강당이래요. 크리스마스 연회 때 정말 근사할 것 같죠?”
난데없이 어리광을 부리며 존의 팔에 매달리는 마이크로프트의 모습을 보고서야 교장은 존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았다. 홈즈 클랜을 제외한 모든 파트리키에게 사이어는 관념으로만 존재했다. 파트리키만 되어도 아이들은 자기 부모한테 저렇게 허물없이 굴지 못한다. 이 친밀감은 오래도록 알고 지낸 고용인을 대하는 태도라고도 볼 수 없었다. 존을 대하는 마이크로프트의 태도에는 노빌리타스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순종적인 기색이 있었다. 집사, 친구, 후견인, 대리부모 그 어느 개념에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이어는 본질적으로 모호했고 어찌 보면 그 모호함이 강력한 정서적 연결의 기반이 되는 지도 몰랐다.
“그럼, 다음으로 기숙사 건물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기숙사방들은 하나같이 넓고 깨끗하고 볕도 잘 들었지만 다인실이었다. 존은 늘 사이먼과 함께 학교를 다녔기에 모르는 사람과 생활공간을 같이 써야하는 불편함을 겪은 적이 없었다. 존은 마음이 안좋았다. 분명 마이크로프트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 걸 할 이유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에 더더욱. 하지만 그 필요성을 납득하는 것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존이 생각하기에 마이크로프트는 그걸 무척이나 힘들게 배울 것 같았다. 존은 그것이 싫었다.
“마이크로프트, 독방이 낫지 않겠니?”
“하는 수 없죠. 교칙에 신입생은 독방을 쓸 수 없다고 되어 있으니.”
“맙소사, 그 교칙이 아직도 있다니.”
학교를 하나씩 둘러볼 때마다 존은 곧 마이크로프트를 품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침울해졌다. 이 아이는 이제 겨우 9살인데. 반면, 마이크로프트는 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학교를 가든 선생이든 학생이든 모두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플레브스가 본능적으로 파트리키에게 위압감을 느끼듯이 파트리키는 노빌리타스를 구분할 수 있었다. 노빌리타스 중 9살짜리 아이는 자신 밖에 없으니 자기가 마이크로프트 홈즈라는 사실은 전광판에 써져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존의 손을 잡으며 슬쩍 그를 올려다보았다. 홈즈 가는 사이어를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존의 모습을 본다. 집사나 시종이라기엔 입은 옷이 너무 고급이고 몸가짐은 당당하고 위엄 있다. 자신과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은 매우 친밀하다. 하지만 노빌리타스는 아니다. 남은 선택지는 그가 홈즈의 사이어인 왓슨이라는 것. 그저 함께 다니는 것뿐인데 존까지 주목의 대상이 된다. 존은 자신의 손을 꽉 잡아오는 마이크로프트의 작은 손을 느끼고는 다정하게 미소지어주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보며 마이크로프트는 새삼 굳은 결심을 했다.
마이크로프트가 몰랐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그저 머리가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는 컸다. 그는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넓은 세계에서 자신이 응당 차지해야 할 위치를 훌륭하게 지켜내고 있다는 것도 만족스러웠지만 방학 때마다, 크리스마스 휴가 때마다 집에 돌아와서는 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봐야한다는 게 싫었다. 마이크로프트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존은 불가항력적으로 셜록의 것이 되었다. 아버지인 사이먼은 원래부터 차남을 불쌍하다고 여겨 약한 모습을 보였고 그나마 엄격했던 바이올렛은 셜록의 고약한 성질머리를 감당할 사람이 존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집안의 평화와 자신의 안녕을 위해 타협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여전히 창백하지만 이제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동생의 뺨을 조심성이라고는 없이 쫙쫙 잡아늘리는 존의 손을 보았다. 존은 한 번도 저런 식으로 자신을 만진 적이 없다. 물론 아프다는 말을 무시하고 귀를 틀어잡고 식당으로 끌고 간 적도, 어깨 위에 올려놓고서 엉덩이를 두들겨 팬 적도 없긴 하지만.
이제 셜록과 마이크로프트의 차이점이라고는 자신의 유치함을 자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여부만이 남았다. 마이크로프트는 어린 셜록이 자기 몸집의 반만한 백과사전을 들고 와 자신을 흥분하게 만든 항목을 존에게 보여주며 아직 불분명한 발음으로 어려운 단어들을 늘어놓으려 할 때마다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어서는 존을 채갔다. 핑계는 여러 가지였다. 시내에 있는 디저트 가게에 가보고 싶다, 키가 커서 교복을 새로 맞춰야한다, 사고 싶은 책이 생겼다 등등. 그러면 존은 두 말 하지 않고 셜록을 내버려두고 마이크로프트를 따라나섰다. 존의 등 뒤로 얼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커다란 푸른색 눈동자가 분노와 원한의 눈물을 가득 담아 마이크로프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죄책감은 반복될수록 무뎌져갔다.
“바지폭이 너무 좁은 거 같은데?”
“존, 요새 유행이에요.”
“너무 유행에 따라가는 것도 좋지 않아. 품위가 없잖니.”
“하지만 벌써 아버지처럼 입는 건 고루하다고요!”
“하긴 어차피 오래 입지도 못할텐데.”
셔츠의 소매 자락을 당기고 겉옷의 여밈을 확인하고 바지의 기장이 충분하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존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마이크로프트의 몸을 끊임없이 어루만졌고 그 따뜻한 손길을 받으며 마이크로프트는 터부의 개념을 배웠다.
셜록이 기숙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존은 마이크로프트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셜록을 데리고 후보 학교들을 순례하고 교복을 맞추고 교재와 필요한 생활물품들을 사주었다. 비록 마이크로프트에게는 할 필요가 없었던 경고와 질책이 셜록에게 쏟아졌으나 그 어느 것도 두 형제에 대한 애정의 차이를 의심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직 셜록만이 ‘차별취급’에 투덜거렸으나 본인조차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나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존 왓슨은 결국 마이크로프트를 셜록보다 더 사랑하는데 실패했다. 두 아이에 대한 그의 애정은 그 색과 결에 차이가 있을 지언정 동등하게 무거웠다.
일단 둘 다 학생의 신분이 되고 마이크로프트의 인생에 있어서 점점 또래집단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갈수록 존은 아무래도 마이크로프트보다는 셜록과 가까워졌다.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교장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학생회장에 출마하는 동안, 셜록은 8번의 전학을 갔다. 그 모두가 퇴학처분을 받지 않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존은 그런 셜록을 달래도 보고 야단도 쳐보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마지막에 셜록을 멈춰세운 것은 존이 아니라 어머니 바이올렛의 한마디였다.
“이젠 신대륙 밖에 안 남았구나. 우리 집안에서 중퇴자는 용납할 수 없다. 이대로 계속 네 멋대로 가족의 명예나 체면 따위 생각안하고 살 거라면 영국을 떠나렴. 그게 네 형에게도 너한테도 좋을 듯 싶구나.”
셜록은 존의 질책이나 호통 이면에 깔린 애정이 얼마나 깊고 진실된 것인지를, 자신의 친어머니와 독대하고서 깨달았다. 서리로 된 칼을 맞은 것 같은 모습으로 바이올렛의 방을 나오는 셜록을 본 존은 그 잠시 풀죽어있는 모습을 보는 걸 견딜 수가 없어 그를 달래고 위로했다. 셜록은 결국 9번째 학교에서 졸업식을 올렸다.
유서깊은 명문대의, 전통적으로 많은 석학들을 배출했고 가문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수진이 있는 학과에 진학하여 착실하게 인맥을 넓히고 있는 마이크로프트와 달리 셜록은 철저하게 흥미위주로 학과를 선택했다. 배우고 싶은 만큼 배웠다 싶으면 굳이 졸업하여 학위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성적표는 들쑥날쑥했고 어떤 학과에선 수료증조차 받아오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가 회계감사관, 행정지도관, 법무관 등 중하위 공직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동안에 셜록은 걸어서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었으며 이탈리아 반도를 떠돌다가 영원의 도시 로마에 잠시 머물렀고 마침내 흑해와 사막을 건너 히말라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본 모든 풍경과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어 존에게 엽서로 보냈다. 셜록의 모습은 사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간단한 인사말조차 없었지만 존은 그 모든 걸 소중하게 간직했다.
마침내 셜록이 영국에 돌아왔을 때, 가문 내에서 마이크로프트의 지위는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확고한 것이 되어있었다. 바이올렛은 그제야 차남에게 약간의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뢰는 더 이상 셜록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존.”
“셜록!”
어차피 성년이 지난 후에 시작한 여행이니만큼 몰라보게 변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더욱 깊고 짙어졌으며 키만 겅중하게 컸지, 뼈와 거죽 뿐이던 몸은 어느새 질긴 노끈처럼 탄탄한 근육으로 감싸여있었다. 사랑스러웠던 것만큼이나 존을 불안하게 하고 지치게 했던 불안정한 에너지가 단단하고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존은 뿌듯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슬프고 부끄러워졌다. 결국 이 아이는 혼자 자란 것이다.
셜록은 런던으로 향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직장 때문에 일찌감치 집을 나와 팰맬 가의 타운하우스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생에게 넌지시 함께 살 것을 권해보았으나 셜록은 비웃지조차 않았다. 그는 몬태규 가의 작은 플랫을 임대했다. 집들이 축하 겸 찾아간 존은 공간의 협소함과 주변 환경의 열악함에 경악했으나 셜록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는 자문 탐정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위대한 창조에는 그에 걸맞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셜록의 첫 번째 희생양은 막 강력계 경사로 승진한 그렉 레스트레이드였다. 셜록에게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는지는 모를 일이나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형사로서의 프라이드를 지키는 일이나 영역싸움보다는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위험한 범죄자를 거리에서 몰아내는 일에 더 큰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피로에 찌든 이상주의자와 셜록은 상당히 위험한 조합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셜록이 피해자를 심문하는 태도에 크게 분노한 레스트레이드가 (유괴되어 강간당하고 살해당해 암매장될 위기에서 겨우 벗어난 14살짜리 여자아이였다) 그의 가문이고 신분이고 자신의 장래와 함께 엿이나 먹으라는 태도로 그를 사건현장에서 완전히 배제해버렸을 때, 셜록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장품과 세정제의 성분을 배합하여 LSD를 만들어내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자기 플랫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다행한 일이라면 그 과정에서 셜록의 LSD 제조시도에 대한 증거도 함께 날아갔다는 점 뿐이었다. 셜록은 옷 한 벌 없이 길거리에 나앉았고 집주인에게 막대한 배상금마저 물어줘야 하는 처지가 됐다.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을 상대하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셜록이 상처입힌 상대가 피해자였기 망정이지, 자신의 안위였다면 그렇게 철저하게 셜록을 내쫓지도 못했을 것이다. 고집스럽게 노숙자 생활을 감수하면서 집에 연락하지 않으려고 드는 셜록을 보자 그렉은 걱정이 되었다. 말 안듣는 아이를 타이르는 양 어르고 달래서 겨우 연락처 하나를 알아냈다. 그렇게 그렉 레스트레이드와 존 왓슨은 처음 만났다. 자초지종을 들은 존은 편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집주인에게 배상금을 물어주고 베이커가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근사한 플랫을 셜록에게 구해주었다. 그리고 셜록을 대신해서 그의 행동과 태도에 대해 진심으로 레스트레이드에게 사과하고 셜록을 돌봐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자신의 명함을 남겼다. 동생과 함께 붙어다닐 때는 모른척 했던 마이크로프트가, 레스트레이드가 존과 접촉하여 인사를 주고받자 바로 버려진 창고로 불러서 신상을 턴 것은 존은 모르는 일이다.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플레브스 중에서도 하층의 노등계급 출신이었다. 아마 큰 공적을 세웠다해도 총경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존은 자기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담임 선생에게 선물을 싸들고 가는 부모의 마음이었을지 몰라도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에게서 그나마 셜록을 제어할 수 있는 어떤 자질을 보았다. 셜록이 젊은 20대 청년의 모습에서 한 치도 변하지 않는 동안 레스트레이드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머리숱을 잃기 시작했다. 그가 플레브스 중에서도 인간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하층계급 출신인만큼 그의 부인도 비슷한 계층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이들에서 격세유전의 신비가 일어났다. 레스트레이드는 두 딸을 두었는데 두 딸 모두에게서 므두셀라의 유전형질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장녀인 리스벳의 경우에는 그 피의 짙음이 거의 에퀴타스-파트리키 수준이었다. 레스트레이드가 이걸 기뻐해야 하는지 걱정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동안 마이크로프트는 기회를 보았다. 그는 레스트레이드에게 그의 두 딸의 장래를 홈즈 클랜에서 책임지겠다고 제안했다. 그 대신 셜록이 아무리 그를 위해 사건을 해결해주고 그 결과 그의 공적이 늘어난다해도 그는 현장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라 했다. 왜냐하면 셜록은 언제나 현장에 있을 것이고 그를 제어하고 감독할 사람 또한 현장에 그와 함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경감의 지위로만 올라가도 직접 지휘할 수 있는 사건현장이 제한된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레이드에게 평생의 경력과 두 딸의 평탄한 장래를 교환하라고 한 것이다. 존이라면 너무나 무례하고 속물적이라 생각해내지도 못했을 제안을, 레스트레이드는 행운이라 생각하며 붙잡았다. 레스트레이드의 두 딸, 리스벳 레스트레이드와 로라나 레스트레이드는 존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는 퍼블릭 스쿨에 태어나자마자 입학자격을 얻었다. 등록금은 당연히 전액 홈즈 가에서 지원했다. 존은 이것이 그저 셜록을 돌봐준 것에 대한 감사표시라고 생각했다.
리스벳과 로라나가 학교 부속 유치원에 들어가고 그렉 레스트레이드에게 새치머리가 생기고 그의 바지벨트 구멍이 점차 한칸씩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을 때도 존은 그렉 레스트레이드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유행의 변화를 타지 않는 고급의 슈트를 입은 작고 침착하며 친절한 삼십대 후반의 남자. 반면 셜록과 마이크로프트에겐 너무나 미묘하여 플레브스의 눈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든 변화였지만 분명 뭔가 변화가 있었다. 노빌리타스의 세계에서 그들은 아직까지 새파란 어린아이였으며 성년은 지났으나 성장은 멈추려면 한참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레스트레이드의 아내가 리스벳과 로라나의 학교 체육선생과 바람을 피우고 그로 인해 플레브스와 함께 학부모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과 혐오감을 느껴왔던 학부모들이 기회를 잡아 두 아이의 전학수속을 추진했을 때도 존은 그렉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더 이상 경사 시절의 날씬한 몸매나 20대 후반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렉 레스트레이드 경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외향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럴 필요가 없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존은 꽉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처럼 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로라나와 동생에 비하면 훨씬 단단하고 차갑기까지 한 무표정이나 속은 마찬가지로 뒤집어져있는 리스벳 사이에 앉아서 두 아이를 달래주고 있었다. 운이 좋아 플레브스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주제에 특별전형으로 입학해 학교 면학 분위기를 흐리는 애들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뒤에 홈즈와 왓슨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자 일부 학부모들은 불에 덴 것처럼 잽싸게 물러났다. 어차피 물러나지 않았어도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이는 존이었으니 리스벳과 로라나를 쫓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그렉.”
“...잘 지내셨습니까, 왓슨 씨.”
“존으로 충분하다고 예전에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아, 뭐, 그러셨죠.”
그는 강력계 경위였고 그것은 일 이외의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망쳐놓기로 유명한 직업이었다. 바람을 피든 쇼핑중독에 걸리든 자신이 부족한 남편인 것에 비하면 아내의 행동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그렉이었으나 자기가 아닌 아이들에게 이런 수치심과 창피함을 안겨주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와 이혼했다. 아내가 유책배우자인 만큼 위자료는 주지 않아도 되었지만 재산분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존은 그렉에게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주택 하나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임대해주었다. 존 덕분에 그렉은 목숨보다 소중한 두 딸의 양육권도 가지게 되었다.
리스벳과 로라나는 이제 겨우 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하지만 레스트레이드는 50대 중반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밖으로 나아가던 바지 벨트 구멍이, 처음으로 줄어들었다.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운동만으로 체중을 조절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콜레스테롤 수치조절을 위해 육고기와 나트륨 소비를 줄이고 채소와 과일의 섭취를 늘렸다. 셜록과 마이크로프트의 성장이 멈췄다. 이제 그들은 30대 초중반의 외향을 유지한 채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고 죽기 전 몇 년 동안 급격한 노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해 크리스마스 디너의 주제는 마이크로프트의 혼인이었다. (정확하게는 될 예정이었다) 정략결혼임은 당연했다. 문제는 누구를 상대로 할 것인지였다. 마이크로프트는 바이올렛의 제안에 상당히 불쾌해했다. 그는 여전히 ‘애송이’였고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대리하여 13인위원회의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략결혼이라는 건 결국 그의 부모가 그가 클랜을 온전히 장악하리라 믿고 있지 않고 있다는 의미밖에 없었다. 장성한 자식과 부모의 갈등이란 자연의 섭리여서 크리스마스 디너 테이블은 순식간에 모자간 혈전의 장이 되어버렸다. 사이먼은 어쩔 줄 몰랐고 셜록은 ‘죽일 거야? 기왕이면 내가 잠들고 난 뒤에 해주지 않을래?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침에 뜯어보는 재미지.’ 따위의 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다. 존은 저녁 훨씬 이전부터 계속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영어를 모르는 자가 들었다면 방금 전의 빠르게 진행되던 대화가 언쟁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고상한 난투극을 마친 뒤 바이올렛은 존 쪽을 돌아보며 지원사격을 부탁하는 눈짓을 했고 마이크로프트도 질세라 존에게 자신의 존재를 피력했다. 존이 손에 쥐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주변 사람들을 모두 한 번씩 주의깊게 바라본 존이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 결혼을 할까해.”
핀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의 정적이 홈즈 저택의 식당을 두꺼운 벨벳처럼 감쌌다. 가장 먼저 회복한 건 사이먼이었다.
“대체 누구랑?! 해리엇과 클라라는 어쩌고?!”
사이먼의 걱정은 이유가 있었다. 명확하게 독신주의를 표방한 적은 없었지만 존은 오랫동안 독신이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해리엇과 그녀의 배우자인 클라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왓슨 가의 다음 후계자가 되기로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클라라의 뱃속의 아이는 존 왓슨의 정자를 기증받아 잉태된 아이였다.
“음, 내가 배우자로 삼고 싶은 사람은 남자야.”
“..........”
“그러니까 후계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봐.”
“어, 음, 그, 그러니까 추, 축하해. 존. 이거 진짜 놀랄 노자인데. 그래서, 대체 그 행운의 사나이는 누구야?”
역시나 이번에도 가장 먼저 회복한 사람은 사이먼이었다. 존은 일부러 마이크로프트와 셜록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음, 사실 진짜 중요한 얘기가 남아있어.”
“뭔데?”
“그 사람은 남자고.... 플레브스야. 이전 혼인에서 낳은 아이들도 있어.”
진짜 정적, 심연 밑바닥에서 갓 끌어올린 타르같은 정적.
“플레... 플레브스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바이올렛의 의식을 가장 먼저 정상으로 돌린 것은 그 한마디였다.
“존, 지금 제정신이에요?”
바이올렛의 격양된 말을 시작으로 홈즈 가의 크리스마스 디너 테이블은 더 이상 고상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순도 100%의 난장판이 됐다. 특히 셜록의 대응은 볼 만했다. 그가 접시를 집어던지거나 테이블을 뒤집지 않은 것은 홈즈가의 혹독한 가정교육이 이룬 성과라 할 것이다. 사태를 그나마 진정시킨 것은 마이크로프트였다. 비록 속이야 어찌되었든 마이크로프트의 끓는 점이 가장 높았다.
“존, 누구에요? 그것부터 말해주세요.”
여차하면 신상을 탈탈 털어 먼지 한 톨 만한 빌미라도 찾으면 그대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유배보내버리겠다고 결심하면서 마이크로프트가 물었다.
“어, 너희들도 아는 사람이야. ....그렉이야.”
사태가 이 지경만 아니었다면 셜록은 형의 얼굴에 떠오른 순수한 경악의 표정을 꽤 즐겼을 것이다.
“그렉? 그렉이 대체 누구야?!”
마이크로프트의 얼굴 위에 떠올랐던 경악이 그 한마디에 썰물에 쓸려가듯 사라졌다. 동생을 바라보는 그의 눈초리에는 장님이라도 느꼈을 만큼 강렬한 한심함이 서려있었다. 셜록이 발끈해서 뭐라 하기도 전에 존이 대답했다.
“레스트레이드 말이야. 그렉은 그의 이름이야.”
“제발, 동생아. 레스트레이드 경위의 배지를 그렇게나 훔쳐낸 주제에 그의 성 앞에 붙어있는 ‘G’라는 약자가 뭘지 궁금하지도 않았니?”
“그런 게 왜 궁금해?! 뭐가 궁금해! 대체 왜 그딴 게 궁금해?!”
셜록은 본격적으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존! 앞으도 20년만 지나면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밤 중에 다섯 번씩 화장실을 가는 쭈그렁 할아범이 될 거라고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제 생전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존, 셜록의 품위 없는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그가 많은 미덕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은 동의합니다만 그는 존의 상대가 되기에는 너무 늙었어요.”
“마이크로프트, 셜록, 사이먼, 바이올렛. 여러분들의 걱정과 염려는 이해하지만 그 모든 게... 내게는 하루라도 더 빨리 그렉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로 밖에는 다가오지 않는 군요.”
“.....존.”
“네 말대로야, 마이크로프트. 그렉에겐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진심은, 존에게 그렉은 언제나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대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였다. 주름살이 늘어가는 얼굴과 하얗게 세기 시작한 머리카락, 늘어나는 허리치수에도 이 마음은 더해갔으면 더해갔지 줄어들지 않았다. 존은 확신했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후회하기는 커녕 왜 좀 더 일찍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까 아쉬워하며 자책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이 하는 말. 존은 그렉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홈즈들을 설득시킬 수는 없을 지언정 최소한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을 해야 했다.
“그 시간동안 뿐이야. 내가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건. 나는 그가 죽은 이후로도 한참동안을 더 살아가야 해. 그 긴 시간동안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어. 난 그렉이 늙고 약해지는 동안 옆에서 그를 돌봐주고 싶어. 그를 돌봐주는 게 당연한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어.”
마이크로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힐끗 동생 쪽을 바라보았다. 절묘하게도 셜록도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고 두 형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