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BC가 원작 존 왓슨에게서 군인으로서의 면모를 좀 더 강조해서 존을 만들었다면 CBS는 외과의로서의 성격을 강조해서 조안을 만들었죠. 사실 강조고 나발이고 군인 쪽은 걍 떼내서 버렸다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만 ㅋㅋㅋ 영안실에 불법침입해서는 셜록이 조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신을 해부하려고 하는데 서툴게 메스질하는 꼬라지를 못참고 결국 자기가 나서버리는 그런 거 꽤 귀여워요. 설정 자체가 PTSD가 존이 아니라 셜록에게 붙어있는 형국이니까 뭐 ㅋㅋ 정말 가끔 읽은 적 있는 고유명사가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거 말고는 원작을 영리하게 요리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는 엘리멘트리이지만 셜록과 조안의 동료 케미만큼은 꽤 봐줄만 합니다. 무엇보다 여기 셜록은 조안이 안된다고 하면 정말 안함. 귀엽긴 귀여움. 게다가 이번엔 마이크로프트까지 나왔음. 얘기 심심하고 BBC 셜록에 비하면 정말 셜록 홈즈 프랜차이즈에 숟가락만 얹는 느낌이긴 한데 그래도 계속 볼 듯. 심심한데 재미있음. 그런 점에서는 전혀 원작과 닮지 않은 주제에 한바퀴 삥 돌아서 원작 냄새남. 솔직히 BBC 셜록은 압축 엑기스라 시즌 하나씩 끝날때마다 멘붕이고 원작과 달리 읽고 나서 깔끔한 기분이 안든단 말이야. 유독 2시즌이 더 그랬음. 이게 다 아이린 때문이다. ㅗㅗㅗㅗㅗ
2.
'왓슨, 여기는 뚱땡이, 뚱땡이, 여기는 왓슨.'
'뚱땡이? 난 꽤 날씬해졌는데.'
'랩밴드?'
'운동이다.'
'운동은 에너지와 야심을 필요로 하는데 넌 둘 다 없잖아.'
(이 부분을 원작에서 읽었을 땐 그 평가가 자못 모욕적일 수 있다는 걸 전혀 의식 못했는데 ㅋㅋㅋ)
3. 예전에 어떤 원작 팬이 BBC 버전을 팬으로서 용서할 수 없다며 자기는 홈즈가 신사라서 좋아했지 이런 소시오패스는 모른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있었지요. 모두가 가슴에 자기 버전 셜록 홈즈 하나쯤은 품고 있는 거지 말입니다. 헌데 요새 제가 주석 달린 셜록 홈즈를 읽고 있는데 말입지요 으음..... 과연 이 남자를 신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어렸을 땐 제 깜냥으로 해결 못하니까 도와주세요 데꿀멍 찾아온 주제에 자기가 맞다고 고집부리고 맨날 홈즈한테 당하면서 초반 잘난 척을 포기 못하는 레스트레이드를 보며 참으로 짜증이 났었는데 말이죠. 그게 말이죠....
빅토리아 중기에 태어나 교육받은 신사계급의 남자이니 행동에 신사적인 요소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 실제로 빅토리아 후기~에드워디안 시대를 살았던 코난 도일이 묘사하고자 했던 남자는 결코 그 시대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생각했던 신사가 아니었을 거예요. 괴짜와 신사 중 그 남자의 불멸성을 담보해주는 부분은 전자가 아니겠음? 그 둘의 조합이라는 게 더 정확한 분석이겠지만 그 비율을 따지자면 말이죠. 그래도 BBC 셜록은 좀 극단적이긴 하죠. 맞아요.... 원작 홈즈가 신사가 아니라고 해서 그런 인격파탄자였던 건 아니죠. ㅠㅠ
4. 주드 로의 왓슨도 왓슨이라고 받아들이면서 로다주의 홈즈는 홈즈가 아니라고 우기는 제 마음을 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조니 리 밀러의 셜록은 또 셜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냐 이거;;) 문제는 이 남자가 파일로 밴스나 엘러리 퀸의 이름을 달고 나왔으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조쿠나 하며 봤을 거라는 거지만.
5. 근데 또 모팻의 아이린 애들러를 생각하면 까짓꺼 로다주의 홈즈를 홈즈로 인정 못할 게 뭐냐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그래 홈즈일 수 있지. 무엇보다 그 많은 셜록 홈즈 각색물들 중 원작 마이크로프트에 가장 가까운 체중을 가진 스티븐 프라이를 형으로 둔 홈즈 아니냐능. 그림자 게임의 모리어티랑 모런은 훌륭했습니다. 급조한 바람에 셜록 홈즈의 망상라는 패스티지까지 나온 원작 모리어티보다도 시대적 배경까지 더해서 더 위협적이고 더 현실성 있는 악당이었음. 수학교수 설정도 살려줬고 무엇보다 모리어티쯤 되는 악당 수괴가 마지막에 셜록 홈즈랑 주먹으로 붙는다는 설정도 설득력 있게 만들어줬음. 솔직히 BBC랑 붙는 바람에 이만큼의 성의를 보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난 로다주 홈즈 1편을 기억한다구. 심지어 친구가 패트릭 제인만큼도 추리를 안하면 어쩌자는 거냐고 했었음. 패트릭 제인도 그레고리 하우스도 홈즈의 파생 캐릭터인데 원본 이름 달고 나오기까지 한 주제에 로다주 홈즈가 저 셋중 제일 안 홈즈스러웠음.
6. 로다주 홈즈가 싫은 것도 아니면서 (귀여움. 귀여우면 뭐든 용서가 됨) 재미있긴 한데 홈즈는 아냐라고 고집부리고 있는 이유는 이 남자에게 꽂힌 적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러니까 로다주한테 꽂힌 적이 없다는 게 아니라 로다주가 연기한 홈즈한테 꽂힌 적이 없다고. 로다주 홈즈가 안홈즈스러운 것만큼이나 안왓슨같은 주드 로 왓슨한테는 의외로 너그러웠던 게 주드 로가 연기한 왓슨에게서 정말 리얼리티를 느낀 순간이 1편에 있었거든. 둘이 같이 감옥갔을 때 주왓슨이 쳤던 대사.
'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넌 인간이 아냐!'
극장에서 낄낄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ㅋ
7. 스티븐 프라이 빼놓고는 마이크로프트 홈즈역으로 캐스팅된 배우들이 하나같이 날씬함. 세상은 썩어있음. 심지어 엘리멘트리 마이크로프트는 동생보다도 조안이랑 남녀케미가 돋음.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어!
8. 펄버 & 모팻의 아이린 애들러를 본 이후에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 그라나다 홈즈판 보헤미안 스캔들을 봤는데 보헤미안 국왕이 진짜 대놓고 졸부스러워서 이건 이것 나름대로 당황스러웠음. (졸부같다고 묘사되어있긴 했는데 행동거지가 나름 신사스러워서 잊고 있어따...) 게다가 뭔가 저 배우 연기가 전반적으로 오버함. 애들러 언니는 여기서 최고로 멋짐. 처음에 국왕이 나름해보겠다고 사람 고용해서 애들러 집 터는 장면 보여주는데 거기에 몸소 권총들고 나와 맞서시는 언니. 심지어 스쳐지나가는 애들러 언니 남편 노턴까지 멋짐. 미국으로 돌아가는 뱃길에서 호신용으로 갖고 있겠다던 국왕과 함께 찍은 사진을 물 속에 던져버리는 애들러, 그리고 그런 그녀를 곁에서 묵묵히 바라봐주고 있던 노턴. 원작에서 홈즈는 애들러가 노턴이랑 결혼하자 '이제 사진은 애들러 본인에게도 짐이다, 남편에게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되니까' 라고 말하지만 그라나다 TV판에서의 노턴은 그녀의 과거를 다 알면서 사랑한 거임. 근데 여기서는 아이린이 아니라 '이레네'라고 부르더라? 철자가 Irene이니 읽는 법이 갈릴 만도 하다. 그러고보니 레스트레이드도 정확하게 어떻게 읽는지 의견이 갈린다고. 대충 다들 '레스트라드'라고 읽는 것 같음. '여성 모험가'라는 묘사도 그렇고 원작에서부터 그녀가 발레리나나 배우, 오페라 가수 같은 직함 하나 달고 귀족이나 왕족 등 지체높은 양반 정부노릇하는게 본업인 이른바 고급창녀였던 건 맞지만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자기 고객들한테서 빼낸 정보로 모리어티랑 결탁해서 나랏돈으로 호의호식하려다가 셜록에게 뒷통수맞고 퇴장하는 여편네로 그릴 필요는 없었잖아..... 진짜 그렇게 대놓고 셜록의 '첫사랑'비스무레한 포스를 풍기고 싶었으면 셜록을 유혹해서가 아니라 정말 기지로 뒷통수쳐서 이긴걸로 해주던가 엉엉엉 셜록에게 처음으로 '그런' 기분을 들게 만든 여자의 이름이 아이린 애들러 이외의 다른 것일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나으 아이린 애들러는 이러치 아나!!!!' 밖에 생각 안나는 나. 아!!!! 이거시 바로 BBC 셜록을 인정못하는 원작 홈즈팬의 마음인가! 깨다라써!!! 과연 역지사지. 세상이 평화로워지는 주문 ㅠㅠㅠ
9. 애정과는 별개로 설정을 제대로 반영한 정도만 따지면 BBC의 존은 너무 의사 같지 않고 CBS의 조안은 너무 반듯하게 살아온 모범생이라 왓슨 특유의 될대로 되라 기질이랄까, 홈즈가 하자고 하면 첨엔 빼다가도 결국엔 사고칠 거 다 치는 그런 느낌이 없고 끊임없이 투덜대고 화내면서도 결국 홈즈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는, 알고 보면 제일 과격하고 다혈질인 주드왓슨이 그나마 의사+군인+스릴광 설정에 제일 충실해보인다는 게 함정. 지적으로 너무 홈즈한테 의지안하고 혼자서도 잘한다는 게 서운할 지경. 근데 주드 로 얼굴 가지고 순진한 칭찬머신이 되는 것도 힘들긴 했을 거다.
10. 마틴 프리먼의 존 왓슨은 101에서 보여준 지치고 날카롭고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면서도 희한하게 단단해보이던 얼굴이 제일 좋았음. 아직 마이크로프트의 정체를 모를때 둘이 대면하는 장면은 백미 중의 백미. 그렇다고 해서 마냥 딱 부러지게 곧기만 한 것도 아니다. 대차게 말대답하고 비꼴 거 다 비꼬면서도 마이크로프트랑 똑바로 눈을 못마주치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그것만큼 존 왓슨이란 남자의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이 또 있을까? 거기에 낚여서 이러고 있는데 그 놈의 영드는 원래 한 시즌에 에피소드가 얼마 안되더라고. 존이 셜록에게 얼른 넘어가지 않으면 얘기 진행이 안되겠더라고. 아 놔..... 셜록이 없는 3년동안 다시 예전의 존으로 돌아갔을까 싶었는데 왠걸... 콧수염까지 달고 -_-;;;; 스틸 컷 봤더니 옷도 드디어 유니클로에서 벗어나 좀 전문직같아 보이는 걸로 입었던 거 같고 게다가 결혼까지 하시네;;; 강을 건너면 배는 버려야 하는 건가;; PTSD를 고친 후엔 셜록이랑 헤어졌어야 이 양반 인생이 좀 인생같아지는 거였나;;;;
1. 너무 헐레벌떡 지르고 났더니 마음에 안들어서 대대적 수정. 절대로 설정덕후는 아닌데 가끔 꽂히면 애먼 곳에서 죽치고 앉아있는 듯.
2. 기본적으로 왓슨 수인데 특별한 커플링은 없음. 왓슨 수라고 해서 모든 남남커플링에서 존이 바텀인 것도 아님. 메인 남성캐릭터와의 관계에서는 수쪽 포지션이지만 여자랑도 엮이고 소년이랑도 엮이고 아주 그냥 사랑은 잔칫상임. 삼대륙 왓슨의 위엄 -_-;;
3. 배경은 정확하게 보어 전쟁 이후로 1906년쯤 됌. 하지만 딱 그 시기에 맞춰져있는 건 아니고 밸꼴리면 1902년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1908년에 일어났던 사건이 현 시점에 일어날 수도 있음. 확실한 건 제1차 세계대전은 아직 안일어났고 보어전쟁은 이미 끝났음. 따라서 존이 참전한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아니라 보어전쟁. 에드워디안 시대이지만 기타 사회적 관습 및 복식에 관한 묘사는 빅토리안 중후기를 넘나들 거임. 자료 조사하기 귀찮아서 -ㅠ-
3일 전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씨를 생각하면 오늘 힐브로드쇼어의 화창함은 어처구니 없는 구석이 있었다. 더욱이 오늘이 힐브로드쇼어의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경의 장례식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서(Sir) 제임스 왓슨보다는 닥터 왓슨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소탈한 청년은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50여년 전만 해도 힐브로드쇼어의 주민들 대다수가 왓슨 가의 소작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준남작의 때이른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설령 그가 준남작이 아니었더라도 힐브로드쇼어의 주민들은 그의 죽음 앞에 진심어린 애도를 보내고 옷깃을 단정하게 여몄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때에는 이 고장의 유일한 향사(esquire)였고 찰스 2세의 왕정 복고와 함께 준남작의 작위를 하사받은 왓슨 가가 상징하는 그 길고도 엄중한 전통과는 별 상관없이, 서른이 넘는 나이에도 '사랑스럽다'란 표현이 어울렸던 온화한 청년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무상함과 인생의 불공평함을 되새기게 했다. 특히 그의 부모를 기억하고 있는 나이든 자들에게 이것은 거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지경이었다. 선대 왓슨 부처는 그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봄날의 미풍처럼 온화하고 사소한 일에도 공정하며 고귀하나 오만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부부가 남매처럼 꼭 닮아있었다. 그러나 그 그린 듯이 아름다웠던 부부에게 주님은 헨리 왓슨을 장남으로 주시고 해리엇 왓슨을 그 다음 자식으로 주었다. 유별나게 과격하고 버릇없는 성질머리라해도 해리엇은 남의 집으로 시집가버릴 준남작 영애에 불과했지만 헨리 왓슨은 찰스 왓슨의 뒤를 이어 힐브로드쇼어의 서 헨리 왓슨이 될 사람이었다. 그 경박하고 공작새처럼 오만하며 무엇 하나 그럴듯하게 해내는 법이 없는 헨리 왓슨이 대학 진학 차 머물러있던 런던에서 불한당들과 어울리다가 패싸움에 휘말려 칼에 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힐브로드쇼어에는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진짜 비극은 그 다음에 닥쳐왔다. 찰스 왓슨과 루이자 왓슨이 장남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런던에 다녀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마차가 전복되는 사고로 사망한 것이었다. 그때 당시 해리엇은 18세, 다음 대 준남작이 될 왓슨 가의 영식은 겨우 14살이었다.
모두가 불안해했지만 그래도 300년 동안 이 고장을 지켰던 가문의 힘은 핏줄의 흐름 속에서 그냥 사라져버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 많은 백작과 후작들이 전쟁영웅으로, 불세출의 시인으로, 모험가로, 정계의 어릿광대로, 사교계 유명인사로 살다가 역사의 저편으로 스러져가는 동안 늙은 고양이처럼 따뜻한 햇살 아래의 힐브로드쇼어를 지키며 왓슨은 살아남았다. 그 긴 세월동안 우둔하거나 연민을 모르는 지주가 단 하나도 없을 리가 있었겠느냐만 적어도 힐브로드쇼어의 주민들과 텐비쳐스의 하인들이 기억하는 한, 왓슨 가의 주인은 그 사람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많은 경우에 자랑스러웠고 그렇지 않다 해도 참고 훗날을 기다릴 만한 사람들이었다. 14살의 나이에 부모를 둘 다 잃고 믿고 의지할 만한 친척이라고는 영국 땅 반대편에 사는 외숙 하나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T. 왓슨은 소란없이 원만하게 자라 자신의 의무를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자라면서 일으켰던 소동이라고는 난데없이 의사가 되겠다며 런던의 의과대학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 유일했다. 새로운 경쟁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준남작이라는 사실에 은퇴할 때까지 투덜거렸던 닥터 허먼과는 달리 주민들은 조금만 징징거려도 금방 진료비를 탕감해주어서, 아이들은 이빨이 아파서 가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언제나 달콤한 과자를 쥐어주기 때문에 언제나 닥터 왓슨을 선호했다.
사람들은 해리엣 왓슨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보며 하나뿐인 동생의 장례식에서도 술을 삼가할 줄 모른다며 수군거렸다. 선대 왓슨 부처를 미끄러운 비탈길에서 굴러 떨어지게 만들었던 운명은 그들의 아들을 절벽 위에서 밀어던졌다. 3일간의 실종 후에야 라베스타 해안절벽 아래 해변으로 밀려온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경찰은 평소 고인의 성품과 시신의 상태만을 고려하고는 씁쓸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며 사고사로 결정지었다. 여타 사람들과는 달리 크랩트리 순경은 동생의 시신을 확인할 때의 해리엇의 모습을 기억하여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물에 불어 터진 시신은 도저히 신원을 확인할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걷어올려진 흰 천 아래 끔찍한 모습을 보고서도 해리엇은 비명을 지르거나 눈을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거처럼 부풀어오른 얼굴 어디에선가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시신이 입고 있던 옷과 무엇보다 왼손 검지손가락에 끼워져있던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 마지막으로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나온 서툰 자수가 놓아진 손수건을 확인하고서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시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인정사정없이 내리치며 소리쳤다. '이 개자식! 이 망할 새끼! 어떻게 네가 나한테...!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날 버렸어! 이 천하의 개자식! 날 버렸어! 네가 날!' 크랩트리 순경은 그 모습에서 사고사가 아닌 자살의 가능성을 떠올렸고 자신이 느낀 바를 상관에게 보고했다. 그레이엄 형사는 크랩트리에게 입을 다물 것을 명령했지만 그가 틀렸다고 하지는 않았다. 크랩트리는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장례식을 주관하는 목사는 제임스 왓슨이 대학으로 진학하기 전까지 그를 가르쳤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인품만큼 존경의 대상이 될만한 지성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주민들에게 존경 못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인 윌리엄 펙은 자기 자식을 묻는 듯한 애통함을 품위있게 드러내며 아름답기 그지 없는 추모사를 마쳤다. 6피트 아래로 청동으로 둘레를 장식한 마호가니 관이 내려갔다. 그 위로 추모객들이 던진 흰 장미와 백합이 쌓였다. 흙이 한 삽, 두 삽씩 떨어지더니 점차 쌓이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해리엇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구덩이 아래를 들여다보았을땐 이미 관의 표면도 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동생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해리엇의 곁에는 친한 친구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그래도 우두커니 목각인형처럼 서서 동생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는 정상적인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몰래 눈물을 훔치게 하는 처연함이 깃들어있었다. 머즈그레이브 부인과 해밀턴 씨의 딸들은 오늘 만큼은 그녀의 나쁜 평판에 신경쓰지 말고 잠시나마 동무가 되어주기로 했다. 해리엇도 부드럽게 자신의 팔을 잡아오는 레이스 장갑들에 저항하지 않았다. 발걸음이 비틀거리는 걸로 모자라 다른 사람의 팔에 의지하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자 해리엇은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려고 했다. 주위 사람들도 오늘만큼은 그녀의 성질을 모두 받아주기로 결심하고 눈물을 닦기 위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려는 데,
"안녕, 해리."
그저 조용히 이름을 부르는 것 뿐이었는데 천둥이 울리듯 들렸다. 반쯤 주저앉아있던 해리엇이 소리나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시선이 멈춘 곳에는 지금까지 힐브로드쇼어 근처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남자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마냥 난데없이 나타나있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오버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눈이 안보이게 눌러쓴 남자는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큼지막한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다. 덩치가 크지 않아 위협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수상했다.
남자들이 여자들 앞을 가로막고 낯선 이의 신원을 확인하려고 다가서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하여금 마차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해리엇이 느리지만 똑바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말리는 손들도 차가우리만치 단호하게 물리쳤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해리엇이 가까이 다가오자, 남자는 그제야 중절모를 벗고 해리엇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숭부숭한 수염이 단정치 못하게 입과 턱 주위를 뒤덮고 있었으나 그 눈. 그 푸른 눈. 해리엇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깜짝 놀라 다가갔으나 오히려 남자에게 온 몸으로 부딪힌 것은 해리었다. 비명에 마땅히 깃들어야 할 공포는 처음부터 없었고 약간이나마 내포되었던 경악도 사라지자 해리엇이 내는 소리는 비명이라기보다는 절규에 가까워졌다. 크랩트리 순경은 제임스 왓슨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그녀가 내질렀던 것 같은 짐승과는 울부짖음과는 조금 다른, 좀 더 인간이, 문명화된 지성체가 낼 법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해리엇은 지상에서 자신의 육신이 갖는 무게를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때리다가 그것조차 지쳐서 여의치 않자 열리지 않는 문을 열 때처럼 온 몸으로 남자에게 부딪혔다. 그저 남자를 부숴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해리엇은 남자와 거의 비슷한 키였다.) 해리엇이 온 체중을 실어 그에게 가하는 폭행 앞에 뒷걸음질조차 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벽처럼 굳건하게 서서 해리엇이 그에게 쏟아붓는 모든 것을 감수했다. 마침내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그의 품 안으로 쓰러지자 그는 팔을 벌려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흡사 미치광이같은 모습에 다들 안절부절 못할 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데 펙 목사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자기를 바라보는 낯선 청년의 얼굴에는 무언가 마음을 끄는 요소가 있었다. 저 눈매와 얼굴형이 눈에 익었다. 그 정체를 깨닫는 순간, 두터운 기억의 지층 아래에서 오늘의 제임스만큼이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이름이 생살을 찢고서 의식의 표면 위로 부상했다.
"......존?"
존 H. 왓슨과 제임스 T. 왓슨은 3분 25초의 간격을 두고 태어났다. 존이 형이었다. 일란성 쌍둥이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구분이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큰 형 헨리가 죽자 그렇지가 않았다. 그 3분 25초의 우선권으로 다음대 준남작은 존이 되었다. 14살 소년에게 한꺼번에 들이닥친 부모님과 큰 형의 죽음이 크나큰 충격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거기에 더해 존에게는 자신이 지금까지 꿈꾸었던 장래희망과는 전혀 다른 미래가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고 그에 대해서 조금의 항의도 용납되지 않았다. 보호자 없이 황야에 내동댕이쳐진 신세도 불우했지만 고정되어버린 미래도 끔찍하기로는 만만치 않았다. 존은 힐브로드쇼어를 싫어했다. 고향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떠난다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리울 것이다. 죽기 전에는 이곳으로 돌아올 의향도 있다. 하지만 이대로는 싫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이 가문을 이어받으면 우리는 런던으로 가자고 7살 때부터 제임스를 꼬여댔는데 이젠 다 틀려버린 것이다. 14살의 존은 가출을 결행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보석들을 제외하고는 현금화할 수 있는 재산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들고 튀었다. 그 중에는 초상화 뒤쪽에 숨겨놓은 풋맨 히긴스의 비상금도 있어서 존은 해리와 제임스에게 변제를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즉시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행방을 찾았더라면 14살짜리 소년이 갈 곳이야 뻔했으니 금방 귀가 잡혀 텐비쳐스로 돌아왔을 수도 있었겠지만 부모님과 헨리의 장례식만으로도 해리엇과 제임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마침 런던에 머물고 있었던 터라 4시간 만에 힐브로드쇼어로 와준 외숙부 월터가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는 바람에 그렇게 어영부영 존을 놓치고 말았다. 월터가 일부러 존을 찾지 않은 것은 다음대 준남작이 될 주제에 모든 걸 제임스와 해리에게 맡기고 도망가버린 행색이 괘씸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존이 곧 항복하고서 패잔병같은 몰골로 집에 기어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월터가 틀렸다. 한달이 지나도 반년이 지나도 존은 돌아오지 않았고 무려 8년 후, 전쟁에 참전할 거란 소식을 마지막으로 – 왓슨 가문에서 자기가 대표로 참전할테니 제임스는 꼼짝하지 말고 고향에 박혀있으라는 말을 남겼다 – 존에게선 연락이 완전히 끊겼고 월터는 자신의 경솔한 처사를 자책하다 병을 얻었다. 모두가 존이 먼 이국땅에서 죽었을 거라 생각했고 정식 사망통고도, 시신도 돌아오지 않은 나날들 속에서 존 왓슨은 마치 태어난 적 없었던 사람처럼 취급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떨어져다니는 법이 없었던 것치고 제임스는 존의 부재는 물론, 사람들이 존의 부재를 취급하는 방식도 잘 참아냈다. 하지만 펙 목사는 알았다. 제임스는 영혼을 나누어가졌던 쌍둥이 형제가 그의 곁을 떠난 이후로 시작된 만성적인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격렬한 감정기복을 드러내는 해리보다 이런 것이 더 위험하다. 증세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뿐이지, 제임스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폭탄이었다. 해리엇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펙도 제임스의 죽음이 자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만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 청년을 사랑했다. 결혼은 했으나 자식이 없었던 그에게 제임스는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비록 그 감정이 일방적인 것이었을 지도 모르나 자신이 자식의 절망에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없었음을 쉽게 인정할 수 있는 부모란 없다. 그래서 펙 목사는 입을 다물고 그저 불운한 사고사였던 것처럼 제임스를 묻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존이 돌아오다니!
몸에 걸친 것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고급의 재질로 만들어진 고가의 의복이었겠지만 너무 오랫동안 험하게 입어서 헤어지고 기워진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것도 꽤나 서툰 솜씨여서 척 보기에도 남자가 자기 손으로 수선한 것 같았다. 게다가 대체 어떤 길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코트의 밑단과 구두가 진흙으로 뒤덮혀 엄청나게 더러웠다. 왓슨 가는 이제 더 이상 대대로 가문에 봉사해온 하인들만 거느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라나 테일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고용되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대놓고 싫은 얼굴로 자신의 부츠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린 존은 불쾌해하는 기색도, 멋쩍어하는 기색도 없이 코트와 부츠를 벗고 현관 앞에 놓인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해리엇은 넋이 나간 것 같았다. 하나밖에 없던 남동생이 죽자마자 죽은 줄 알았던 다른 남동생이 살아돌아오다니. 그리 정교한 통제력을 자랑하지 못하는 그녀의 감정체계는 과부하로 폭발할 것 같았다. 비탄과 환희, 원망과 고마움,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서 아침부터 들이부은 스카치 위스키가 그녀의 혈관 속을 미친 무희처럼 돌아다녔다. 존에게 반쯤 안기다시피 돌아와서는 텐비쳐스에 도착하자마자 하인들에게 존이 쓰던 방을 치우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초봄에 난데없이 걸린 감기에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있던 집사 버나드가 밖에 나와서 존의 얼굴을 보더니 까무라칠 것처럼 놀랐다. 버나드는 조부 때부터 텐비쳐스에 있었던 사람으로 헨리나 해리엇은 물론, 찰스가 태어나는 모습도 지켜본 사람이었다. 집사의 위치에서 해리엇처럼 격렬한 감정표현은 허용되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노인의 눈이 존이 들고 있는 지팡이와 어색하게 서 있는 모습에 머물렀다. 존은 오랜만이라고 인사할 틈도 없이 펑펑 울기 시작하는 늙은 집사를 어색하게 다독여야만 했다. 존이 집을 떠난 후에 텐비쳐스로 온 하인들은 현관 앞에서 어색한 듯 서있는 낯선 남자가 그들의 자상한 고용주와 일란성 쌍둥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제임스 왓슨보다 최소 6살은 더 많아 보였고 늙고 지치고 험상궂게 생긴 장애인이었다. 언제나 깐깐하기 짝이 없어서 주인인 제임스보다 더 대하기 힘든 상대였던 버나드가 노망이라도 든 것처럼 울고 해리엇이 특유의 정신나간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동안, 하인들은 겨우 손님방을 치워서 존의 짐을 옮겼다. 하인이 치운 방이 예전에 존이 쓰던 방이 아니라 손님방이라는 사실을 알자 해리엇은 더 성질을 부렸다. (그게 가능할 줄이야. 라나 테일러는 생각했다) 모두를 다독인 것은 존이었다.
“아무 데나 상관없어. 일단은 좀 자고 싶다.”
그 말 한마디를 끝으로 손님방으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해가 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혼란과 충격이 가라앉고 슬픔으로 달아올랐던 머리가 식자 사람들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가 진짜 존 왓슨이라고 어떻게 믿지?’ 버나드는 늙었고 해리엇은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도 제정신이 아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존 왓슨의 모습이란 사람의 이목구비보다는 보송보송한 솜털과 하얀 얼굴과 뿌리부터 짙은 색이 올라오던 상아색 금발, 무릎이 멀쩡할 날이 없던 장난꾸러기의 이미지 등을 피스로 하여 만들어진 흐리멍텅한 퍼즐이었다. 18년 전을 기억하고 있는 자들은 거기에 하나 더, 제임스 왓슨과 같은 거푸집에서 나온 것처럼 똑같이 생겼었다는 걸 상기했을 뿐으로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존 왓슨의 얼굴이란 제임스 왓슨의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 지치고 고생한 기색이 역력한 작은 남자는 제임스 왓슨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어보였다. 얼굴 아랫부분을 완전히 덮고 있는 풍성한 수염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의 해쓱한 얼굴을 수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이 찾아가서 좀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월터 경께도 알리고요.”
윌리엄 펙 목사의 부인 엘리자베스 펙은 남편의 분별력을 믿는 여자였다. 확실히 윌리엄 펙은 세상의 어떤 악덕에도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판단력을 그다지 신용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 왓슨과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사람들의 말이 맞기는 하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존 같았다! 그러나 윌리엄 펙에게는 자신이 생각하는 ‘존’다움이 실제로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제임스에게 품었던 희망을 투영한 것에 불과하지 않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가 제임스를 스승으로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존이 떠난 후였다. 분명 그에게는 제임스를 아는 만큼 존을 알 기회가 없었다. 소망이 사람의 판단력을 얼마나 흐리게 하는 지 잘 알기에 펙 목사는 지금으로선 ‘존’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기억을 더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글쎄, 지금 당장은 너무 참견쟁이처럼 보일 거야.”
“하지만 이대로 텐비쳐스를 해리엇과 버나드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어요.”
힐브로드쇼어 사람들에게 해리엇 왓슨에 대한 평판은 바닥에서 조금 올라와있는 정도였다. 펙 목사는 늘 그런 평가가 불공평할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반론하지 않았다.
“일단 월터 경께는 알려야 할 것 같기는 하군.”
하지만 그것도 자기가 하기는 싫었다.
“나보다는 당신이 나을 것 같아.”
해리엇은 늘 그렇듯이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씻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마리아를 불러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에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건 레이디 왓슨만의 특권이었다. 어머니인 루이자 왓슨이 사망한 뒤, 왓슨 가의 장녀로서 레이디 왓슨의 칭호와 그녀의 어머니가 누렸던 거의 모든 특권을 물려받은 해리엇이었지만 미혼의 처녀에게 그어진 한계선은 명확했다. 그녀는 식당으로 향했고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습관의 힘은 무서워서 그는 저도 모르게 제임스를 불렀다.
“지미...!”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고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을 절제하는 데는 소질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은 해리엇이다. 그녀는 분풀이하듯 비명처럼 제임스를 불러제끼기 시작했다. 온 집안 사람들을 죄다 뒤흔들어놓고 싶었다. 이렇게 멀쩡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하루가 시작되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해리엇의 방 안을 정리하고 있던 마리아가 당황하며 달려왔다. 그런데 그녀보다 한 발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해리엇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를 받쳐 올리는 단단한 팔이었다. 제임스는 그런 식으로 그녀를 부축하지 않았다. 일단 상대방을 일으켜야 한다는 확고한 목표 아래 정서적인 감촉은 별로 없는, 대단히 효율적이며 기술적인 부축이었다. 해리엇은 그러고 싶다는 의지가 전혀 없었음에도 자신의 다리가 제대로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울고 있던 어린아이가 색다른 구경거리에 넋이 빠져서 울음을 멈추듯 해리엇은 조용해졌다.
“괜찮아, 해리?”
그녀가 기억하기로 해리라는 애칭으로 자신을 불렀던 이는 단 둘 뿐이었다.
해리엇의 고함소리에 놀라서 달려나온 마리아가 그렇고 죽은 제임스의 시종 에머슨, 풋맨 레이프가 그랬듯이 해리엇도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축해준 남자를 바라보았을 때 소스라칠 정도로 놀랐다. 일란성 쌍둥이치고도 유난히 닮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닮았을 줄이야. 무려 18년 동안 다른 곳에서 다른 인생을 살아왔는데도 아직도 이렇게나 똑같았다.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주께서 나사로를 일으키신 것처럼 죽은 주인님을 일으켜 세우셨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눈 밑이 거뭇하고 혈색이 안 좋은 얼굴하며 비쩍 마른 것까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징표 같았다.
“....수염, 깎았구나.”
“영국적이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자, 있는 지도 몰랐던 뺨 위에 가는 흉터가 도드라졌다. 해리엇은 명주실에 눌린 것 같은 흉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말없이 묻는 시선을 보냈다.
“어떤 문제 많았던 환자가.”
“환자? 너도 의사인거야?”
“군의관이었지.”
이거야말로 정말 놀랄 일이었다.
“제임스도 의사였던 거 알고 있어?”
“짐작은 했었어.”
“어떻게?”
“오늘 아침에 서재에 들어갔다가.”
“유일하게 그 애가 고집부렸던 거였어. 런던에 가겠다고 말이지. 거기서 널 찾으려고 했었던 건지도 몰라.”
“난 에딘버러에 있었어.”
“넌 언제나 런던, 런던 노래를 불렀잖아?”
존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항상 원하는 걸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해리엇의 눈빛에 비난의 기색이 담겼다.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물을 법도 한데 자칫 냉담해보일 만큼 아무 것도 묻지 않는 누이의 모습을 보며 존 왓슨은 역설적이게도 비로소 자신이 고향에 왔음을 실감했다. 미국에서는 이렇지 않았다. 대서양 너머의 이웃들은 존이 영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온갖 질문들을 다 던져댔다. 영국인들이 미국의 서부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를 통해서인 것처럼, 미국인들도 영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단편적인 신문기사와 프랜시스 베넷의 소설들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자수성가한 비누 제조업계의 타이쿤 앨렌 후퍼의 외동딸 몰리 후퍼가 뉴욕 사교계에서는 신랑감을 찾을 수 없자 영국으로 건너갔다는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읽었으며 존에게 몰리 후퍼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공작과 결혼할 수 있을 지를 물었다. 그리고 존에게는 알고 있는 귀족이나 귀족 친척이 없느냐고도 물었다. 물었던 사람이 어린 소녀였기 때문일까 그때 거짓말한 것이 아직까지도 마음에 걸렸다. 존의 어머니 루이자 왓슨은 자작의 딸이었다. 즉 왓슨 남매의 외숙인 월터 에버다인 경은 달림플 자작이었다.
존에게 고향을 느끼게 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점심 식사의 맛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스스로 선택한 자유의 대가를 꽤 혹독하게 치러야했던 만큼 존의 입맛은 음식에 대한 영국인의 평균적인 무관심에 얼추 수렴될 정도에 불과했지만 해외에서의 경험이 그를 망쳐놓았다. 특히 미국에서 그가 묵었던 하숙집 여주인이 뉴올리언즈 출신의 크레올이었던 것이 매우 막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한때 이 식당이 사람들로 붐볐던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헨리가 아직 런던에 진학하기 전, 하루에 세 번 (헨리는 종종 나가서 점심을 먹곤 했다) 한창 자라나는 사내아이 둘과 여성스러운 조신함이라고는 없는 해리엇이 함께 하는 식탁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귀족들의 식사 예절이 까다로워지기 시작한 것은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여 귀족의 부를 넘보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귀족은 아니지만 젠트리 중에서 가장 윗물에 속하는 만큼 왓슨 가도 하려고만 했으면 꽤나 점잔을 빼며 살았겠지만 외동아들로 어린 시절을 외롭게 자랐는 데다가 힐브로드쇼어 같은 촌구석에서 비교대상도 없이 왕족처럼 살아온 찰스 왓슨은 그런 소란스러움을 가슴 깊이 사랑하여 자식들이 음식을 서로에게 집어던지지 않는 한 뭐라고 하지 않았다. 루이자는 그런 남편을 사랑하여 친정과는 달리 중산층처럼 식탁 앞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왓슨 가의 가풍을 묵인했다. 존은 식탁 앞에서는 아무리 아버지의 말이 길게 이어져도 두 마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다른 동기들과 어떻게 다투든 아버지에게 말대답하는 것만큼은 두고 보지 않았던 어머니를 기억하고는 추억에 잠겼다. 해리엇의 포크질이 투박하다는 것도 힐브로드쇼어에 있었을 때는 몰랐던 사실이다. 에딘버러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은 본인은 의사의 길을 걸어도 부모님 때는 구두수선공이나 식자공, 양돈업자 같은 노동계급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대로 의사집안이었던 동기들도 있었지만 존은 이상하게 그런 사람들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자신의 식사예절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건 인도에 가서였다. 함께 지냈던 동료가 남작의 아들이었던 탓이다. ‘참으로 격렬한 기질의 친구였지.’
“네 다리는 어떻게 된 거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기 때문일까, 존은 기습공격을 당했다고 말하는 자신의 느낌에 당혹했다. 의식이 과거 속을 헤매고 있었던 터라 존의 응대는 거의 무의식적이었다.
“총에 맞았어.”
해리엇이 놀랄 이유는 없었다. 이미 군의관이었다고 이야기했으니까.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일으킨 소란에도 불구하고 살얼음이라도 낀 듯 냉한 얼굴로 태연하게 있는 모습을 보자니 존은 왠지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의 해리엇은 시종일관 다혈질에 감정의 기복이 격렬했는데 나이가 드니 기저에 깔린 역동적인 성품 위로 어머니가 그렇게나 주입시키고자 했던 영국 숙녀의 냉정함이 얇게나마 표면을 덮게 된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저 세월의 힘이던가.
“어디서?”
“트랜스발.”
“보어 전쟁이 끝난 건 한참 전이야. 왜 집으로 오지 않았어?”
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많았다. 존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농담이나 순간적으로 떠오른 핑계들로 답변을 무마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해리엇이었다. 그의 하나뿐인 누이.
“영국으로 오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나 이 곳이 싫었어?”
“힐브로드쇼어는 그리웠어. 제임스가 보고 싶었고 네가 어쩌고 있는 지 궁금했어.”
“그런데 왜?”
“영국(England)이 싫었어.”
제임스가 결혼하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집안을 운영한 건 해리엇이었다. 바로 그 점이 윌리엄 펙이 해리엇의 분별력을 크게 의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음주벽에 상스러운 발언과 튀는 행동을 자제하지 않아도 해리엇은 자신이 책임진 일을 소홀히 하는 법은 없었다. 지역 신문에는 이미 부고를 냈다. 페이지 하단에 한 단락으로 처리된 제임스의 부고기사를 읽으며 해리엇은 마침내 장래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은 존을 다음 대 준남작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준남작의 작위와 텐비쳐스는 왓슨 가의 직계인 해리엇이 아니라 먼 친척인 새커 가에게 넘어가게 된다. 여자에게는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여자를 통한 상속권은 인정하는 상속제도의 모순이었다. 마치 혈우병처럼.
해리엇은 진하게 우린 아삼 차를 마신 뒤, 사망처리 되어있는 존의 신원을 복원시키기 위해 런던의 법률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샌들 앤 로딩은 그 이름이 코셋, 샌들 앤 스턴이었을 때부터 왓슨 가의 일을 봐주었다. 아버지 찰스 왓슨과 친분을 맺고 18년 전 왓슨 가의 쌍둥이 형제를 데리고 포위로 놀러가주었던 사람은 지금은 회사 이름에서 지워지고 없는 코셋 씨였지만 그 당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무소에 합류했던 신참내기 법정변호사 샌들 씨도 찰스와 루이자가 사망하고 뒤이어 존까지 없어져서 힐브로드쇼어가 아수라장이 되었던 시절을 알고는 있었다. 해리엇의 말을 들은 샌들은 예상대로 당혹감으로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건 아주 잠시 뿐이었다. 이내 베테랑 법정변호사 특유의 냉정함과 침착함으로 샌들은 해리엇에게 그가 진짜 존 왓슨임이 확실하냐고 물었다. 해리엇은 내가 내 동생도 못알아볼 것 같으냐고 윽박지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샌들 씨도 보시면 바로 알게 될 겁니다. 그 애는 존 왓슨 이외의 다른 사람일 수가 없어요.”
제임스와 존이 일란성 쌍둥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18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샌들은 해리엇에게 존과 함께 런던으로 와서 왕실 고문 변호사를 만나보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해리엇은 그녀 특유의 성질을 부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천방지축 왈가닥이라고 해도 그녀는 레이디 왓슨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18년 동안 텐비쳐스의 여주인이었다. 아무리 평판이 안좋고 힐브로드쇼어 근방 향사들의 부인과 딸들로부터 백안시당한다해도 해리엇은 하인들에게는 제임스보다 더 대하기 어려운 주인이었다. 해리엇은 일단 존과 함께 런던에 가는 것은 찬성했다. 하지만 존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못 박았다.
“설령 존이 아니라고 해도 제임스와 그렇게까지 닮았다면 우리가 몰랐던 왓슨 가의 사람임이 분명하니 그는 내 가족입니다. 이 집이 새커에게 넘어가는 꼴을 보느니 왓슨의 혈통을 이은 낯선 사람을 다음대 준남작으로 만들겠어요.”
샌들은 이 말이 누가 뭐라고 하든 존 왓슨의 사망신고를 취소하라는 명령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부고 기사를 내기는 했으나 친지들에게는 따로 소식을 알려야했다. 친척이라고 해봤자 외숙인 월터 경뿐이고 뒤에서 뭐라 수군거린들 새커 가 사람들에겐 직접 편지를 쓰고 싶지 않았지만 존의 작위계승문제를 마무리 지으려면 한번쯤은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순순히 기대해온 권리를 포기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차피 왓슨 가의 직계 남자자손이 살아있는 한 그들의 기대는 마땅히 포기되어야 할 것이었다. 새커 가에게 텐비쳐스를 넘기느니 낯선 이의 손에 들어가는 꼴을 보겠다고 했지만 사실 해리엇은 제임스의 장례식 날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자신의 동생 존 왓슨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를 존이라고 알아본 것은 자신이다. 그가 맨처음 꺼낸 말은 ‘Hello, Harry’였다. 실로 존다운 첫 인사이지 않았는가. 18년만에 나타나놓고선.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은 18년만이었고 마지막 소식을 들었던 때로부터는 10년만이었다. 어차피 해리엇이 증인으로 버티고 있는 한, 솔로몬 왕이 온다해도 존이 존 왓슨임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해리엇은 왕실 고문 변호사를 만나서 일을 정확하게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고 한 샌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잘했다고 결론지었다.
작위를 세습할 수 있다 뿐이지, 귀족도 아니고 상원의원석도 가지지 못했지만 제임스는 런던에서 의사 박사 학위를 받고서 힐브로드쇼어로 귀향한 후에도 사교계 시즌마다 꼬박꼬박 런던에 상경했다. 닥터 허먼이 투덜거리면서도 후계자로 삼을 젊은 의사를 영입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부활절 이후부터 런던 시즌이 끝나고도 겨울이 시작될 때까지는 제임스는 좀처럼 힐브로드쇼어에 오지 않았다. ‘분명 런던 대학에 재학 중일 때 사귄 친구며 의대 동창들, 런던에 남아있는 지인들이 꽤 될텐데.’ 해리엇은 아무리 서재를 뒤져도 주소록과 명함모음집을 찾을 수 없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같은 서랍을 세 번째 여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캐비넛 안에 있는 술을 찾았다. 마굿간을 돌아보고 온 존과 마주친 것은 석 잔째 셰리주를 비우고 난 뒤였다.
“해리.”
이름을 부르는 억양에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과 나무라는 듯한 어감이 스며들어있었다. 해리엇은 기이한 쾌감을 느꼈다. 존은 흥미로운 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비밀과 모험으로 가득 찬 과거를 트렁크 안에 꼭꼭 숨겨놓은 채 보는 사람을 호기심으로 안달하게 만들면서 정작 자기자신은 더없이 태연했다. 겨우 서른 초반인 주제에 생기도 감정의 동요도 없는 늙은이의 얼굴을 해서는 의심받을 걸 뻔히 알면서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로 돌아왔다. ‘그래놓고 바로 다음날 깎아버렸지.’ 한 쪽 손을 등 뒤로 감춘 채 축하의 말을 건네는 사기꾼처럼 점잖지만 불온한 구석이 있었다. 제임스는 언제나 감정표현이 풍부했다. 표정에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이 모조리 드러났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계속 무덤덤하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나. 해리엇은 신중한 가면같은 표정의 동생을 안달하게 만드는 게 무척 신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도 내게 널 놀라게 만들 만한 게 남아있어.’
“우린 런던으로 갈 거야. 거기서 왕실 고문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어.”
“....알았어.”
“새커는 제임스가 살아있을 때부터 주제넘게 굴었지. 그 앤 겨우 서른이었고 언제든 결혼해서 아들을 낳을 수 있었는데 그 재수없게 거들먹거리던 꼴이란! 그 사람들한테 편지 쓰기 싫어!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네가 정식으로 작위를 물려받을 때쯤에야 남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만들어주고 말겠어.”
“그렇게 될 거야.”
“....못 찾겠어. 여기 어디에 주소록이 있을 텐데... 핌리코에 놔두고 왔을 리는 없어. 그 애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으니까. 그 애가 이대로 잊혀지게 내버려둘 순 없는데....”
“내가 찾아볼게, 해리엇. 그러니까 방으로 가.”
비틀거리는 해리엇을 방으로 데려다준 뒤, 존은 해리엇에게 말한 대로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형제자매들의 유년기 시절과 부모님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모아놓은 상자를 발견했다. 사진 찍는 것은 좋아해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앨범 정리에는 취미가 없었다. 제임스 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다시 본 큰 형 헨리는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어리고 연약해보였다. 그리고 아버지보다는 월터 숙부를 훨씬 더 닮았다. 에버다인 가 사람들의 핏 속에는 왓슨 가의 견실함과 대비되는 무모하고 파격적인 행동을 일삼고 모험을 즐기는 기질이 숨어있다. 월터 경의 둘째 동생인가, 아니면 셋째 동생이 젊은 나이에 중동 지역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헨리 형의 행실을 항상 걱정하고 틈만 나면 나무랐던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월터 숙부였다. 그는 헨리의 모습에서 이른 나이에 요절한 자신의 남동생을 떠올리며 몰래 마음을 태웠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제임스와 존이 따로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지만 성장한 뒤에는 언제나 제임스 혼자였다. 심지어 친구들과 같이 찍은 사진조차 없었다. 좀 더 좋은 옷과 더 통통한 체형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제임스의 모습은 깜짝 놀랄 만큼 존과 닮았다. 존은 14살 때 헤어진 이후 한번도 만나지 못한 쌍둥이 형제의 모습을 눈에 새겨두기라도 할 것처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사진으로는 그 눈동자의 빛깔과 머리카락의 색을 알 수가 없었다. 남아프리카, 인도, 미국, 그가 홀로, 때로는 동료, 더 드물게는 친구들과 함께 떠돌아다녔던 이국의 땅들. 똑같은 태양이나 다른 햇살이었고 전혀 다른 냄새의 바람이 불었다. 그을린 피부와 색이 바란 머리카락. 14살 때 둘의 피부는 똑같이 부드러운 크림색에, 머리카락은 밑에서부터 진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밝은 상아색 금발이었다.
해리엇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반복해서 서랍을 열고 책장 사이를 뒤졌지만 존도 주소록을 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갑자기 벽난로를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왜 들었는지 모르겠다. 라나 테일러, 그 건방진 하녀의 얼굴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버나드가 말하길, 처음 채용했을 때 그녀는 쓸고 먼지를 터는 일은 괜찮으니까 하겠지만 식사 시중은 천한 일이니 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마리아라면 대꾸하지 않았을 것이고 에머슨이라면 못들은 체 했을 것이다. 레이프라면 식사 시중은 따로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둘러댔을 것이다. 하지만 버나드는 사륜마차를 타러 갈 때 아무도 레이디 왓슨을 앞지를 수 없고 (이건 지금도 그렇다. 힐브로드쇼어에서 이 관습보다 사륜마차가 먼저 역사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입장하지 않으면 무도회에서 춤을 시작하지 못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몸가짐과 그런 예의범절을 지닌 사람은 왓슨 가의 사람에게 접시를 건넬 수 없다고 쏘아붙였다. 존은 마굿간을 둘러보러 갔을 때, 마굿간지기인 조지의 곁에서 고양이처럼 애교를 피우던 라나를 떠올렸다. 그녀라면 주인도 없는 서재를 부지런히 치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겨울도 아니었다. 벽난로 칸막이를 치우고 안쪽 아궁이를 들여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재가 수북이 남아있었다. 부집게와 부삽을 들고 잿더미를 한참 헤집었다. 타다 남은 책등과 명함 특유의 빳빳함이 남아있는 시커먼 종이조각이 나왔다. 존은 혼란에 빠졌다. 추론을 하고 가설을 세운 뒤 그걸 확인하려고 벽난로를 뒤진 것이 아니었다. 이런 건 그냥 직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왜 제임스가 주소록을 비롯해 자신의 사적인 물품들을 정리한 것일까? 편지의 일부분으로 보이는 종이조각들도 남아있었지만 판독가능한 글자는 없었다. 하지만 수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아궁이 깊은 곳에 반쯤 탄 사진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열기에 앞면은 모조리 그을려 대체 무엇을 찍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뒷면에 적혀있던 글씨는 남았다. ‘1902년 라벤더 클럽’
정작 런던행이 결정되자 해리엇은 존의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이제와서 옷을 맞출 수는 없다. 사실 존이 입고 있는 옷이나 들고 온 옷들도 그렇게 낡지만 않았어도 나쁘지 않은 옷들이었다. 조금 기성복 느낌이 나는 것이 미국식이긴 했지만 그걸 저어할 만큼 까다롭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존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왕실 고문 변호사를 만나는 자리에 보풀이 일어나기 시작한 회색 플란넬 양복을 입고 갈 수는 없었다. 해리엇은 하는 수 없이 제임스의 옷을 꺼냈다. 제임스가 런던에서 맞춘 비스포크 슈트 중 최고급인 것은 오히려 존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존에게서는 평범한 상류층 출신의 신사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거칠거칠한 현실의 질감이 강하게 묻어났다. 해리엇이 고른 것은 조금 보수적으로 재단된 네이비색 양복이었다. 입어보자 기장은 맞는데 품이 약간 헐렁했다. 특히 허리 부분이.
“이 정도면 브레이시스를 하면 될 거야.”
분명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는데 희한하게 남의 옷을 입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네게 아주 잘 어울려.”
제임스의 취향이었던 세련되고 도회적인 스타일과는 약간 어긋난, 단조롭고 보수적인 디자인이 존에게는 더 잘 어울렸다. 똑같은 얼굴, 거의 동일한 체형임에도 불구하고 존에게서는 제임스에게서 느껴지던 것과 같은 개성의 부족함이 없었다. 비바람과 가뭄에 시달리며 자라난 나무의 단단함처럼 존에게는 두텁고 묵직한 느낌이 있었다. 영혼의 무게중심을 확고하게 아래쪽에 둔 자들 특유의 견고함. 힐브로드쇼어는 물론, 런던에서도, 에딘버러에서도 그런 것을 찾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굳이 남아프리카까지 가야했을 까? 해리엇은 한 동생의 넥타이를 다른 동생에게 매어주며 속으로 생각했다. 무척이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임은 분명하지만 나와 제임스를 버려야 했을 정도로?
샌들에게서 왕실 고문 변호사 마틴 코스텔로와 약속을 잡았다는 연락이 왔다. 해리엇은 아파서 누워있는 버나드를 대신해 집사 업무를 맡고 있는 레이프에게 런던에 있는 타운하우스를 준비해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런던 핌리코에 있는 왓슨 가의 타운하우스는 상하수도와 전기설비를 위한 개조를 제외하면 앤 여왕 이후로 별 변화가 없는 텐비쳐스와는 달리 시대의 흐름에 따른 왓슨 가의 부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었다. 양모와 담배 무역으로 부를 거머쥐어 메이페어에 입성했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저택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세인트 존스 우드로 옮겨갔다. 그마저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런던이 남쪽으로 확장할 당시 벨그라비아와 함께 부상했으나 벨그라비아와는 달리 1890년대 이후로 하향세로 접어든 핌리코에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해리엇은 코스텔로와의 면담에 뭘 준비해가야 할지 의논하기 위해 존을 찾았다. 그러나 존은 집에 없었다. 라나가 샐쭉한 얼굴로 마을로 내려갔다고 전해주었다. 해리엇은 알지 못했지만 라나는 손님방에 있던 존의 물건 중에 이국적인 도자기가 있는 것을 보고 만져보려다 간결하지만 매서운 질책을 듣고 토라져있는 상황이었다. 모양새는 투박했지만 선명한 푸른색 바탕에 복잡한 문양들이 야하다싶을 정도로 화려한 색채로 새겨져 있었고 함처럼 뚜껑이 덮여 있었다. 끈으로 묶어놓았는데다가 이음매가 밀랍으로 꼼꼼히 봉해져있어서 들어본다 한들 열릴 리가 없었는데도 존은 화를 냈다. 조지는 존이 마굿간에서 말을 한 마리 꺼내갔다고 했다. 맥스 2세라는 이름을 가진 반혈종으로 존과 제임스가 어린 시절 이름을 짓는 것으로 다투었던 막시무스의 아들이었다. 제임스는 강인하고 몸집이 큰 냉혈종 숫말에게 막시무스라는 로마식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했고 존은 그 이름이 부르기에 불편할 거라 생각했다. 맥스와 막시무스의 싸움은 결국 제임스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 존이 두 손 들고 물러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해리엇은 제임스가 막시무스의 아들에게 맥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을 존이 알아차렸을지 궁금하게 여겼다.
말까지 가지고 나갔음에도 존은 금방 돌아왔다. 마을에 들렸다가 텐비쳐스 근방와 라베스타 절벽까지 돌아보고 왔다면 이렇게 빨리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해리엇은 기왕 말을 타고 나갔으니 느긋하게 풍경을 즐기다 올 줄 알았다고 말했다. 존은 오로지 마을까지 빨리 다녀오기 위해 말을 탄 것이라 해명했다.
“무슨 일이었어?”
“벤틀리씨에게 맡길 일이 있었어.”
“벤틀리씨라면 석공 말이야?”
“응.”
“널 보고 놀라지 않든?”
“말을 못하더라.”
존은 해리엇이 무슨 일로 석공업자를 찾아갔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거기서 말을 끊었다. 아직은 그녀에게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직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런던에서는 자동차와 마차, 자전거가 함께 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풍경이지만 힐브로드쇼어에는 아직 승용차를 모는 사람이 없었다. 자동차는 신기한 기계였으나 아직까지 도시가 아닌 지역에서는 말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몇 년 안에 런던은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동차와 마차가 함께 달리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게 될 것임은 자명했다. 존은 미국에서 이미 자동차를 운전해본 경험이 있었다.
“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기차역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존이 해리엇에게 물었다.
“사고 싶어?”
“여유가 되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 싶어서.”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쓸모가 있겠지만 힐브로드쇼어에선 별로 실용적이지 않을 것 같은데.”
“핌리코에 있는 집에다 놔두면 되지.”
“....너도 제임스처럼 런던에서 지낼 거니?”
“누나는 싫은 거야?”
창 밖을 바라보는 해리엇의 옆얼굴은 물에 담그면 고통의 쓴 맛이 우러날 것 같았다.
“네 일이 아니었다면 난 영원히 런던 땅을 밟지 않았을 거야.”
핌리코의 타운하우스는 터너 부인과 상주하고 있는 하인 둘 외에는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일꾼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집의 단위면적으로 비교하면 텐비쳐스보다 상주해있는 하인이 많은 셈인데 그건 그만큼 제임스가 이 집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역 신문에 실린 젊은 준남작의 부고는 런던 신문까지 주목할 만한 사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녀장인 터너 부인은 앞치마 자락으로 눈가를 훔쳤지만 응접실 탁자 위에는 조문 편지 하나 없었다. 하긴, 이스트엔드에는 선정적인 사건이 넘쳐나고 요즘은 웨스트엔드도 뒤질세라 합류하고 있다. 런던 밖으로 눈을 돌리면 카불, 하르툼, 트랜스발, 샌프란시스코가 있다. 무엇 때문에 데번 주의 힐브로드쇼어 같은 촌구석의 일을 궁금해하겠는가. 해리엇은 도착하자마자 서재를 뒤져 제임스의 주소록과 명함집을 찾았으나 역시 발견하지 못했다. 존은 제임스의 주소록이 텐비쳐스 저택 서재 벽난로 안에서 전소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해리엇에게 말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대해 다시 고민했다. 처음에는 타다 남은 책등이 주소록의 그것이라는 증거도 없는데 해리엇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해리엇이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존은 느끼고 있었다. 해리엇은 제임스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가 스스로 자신의 사적인 기록들을 불태웠다는 건 그 생각에 대한 확증이 될 것이다. 해리엇은 별로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해리엇은 그 누구보다 존의 귀환에 안도했으나 진심으로 그가 돌아온 것을 기뻐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제임스의 죽음과 맞바꾸기라도 하듯 되돌아온 존을 바라보며 그녀는 늘 책망하는 기색을 숄처럼 두르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의 살얼음같은 자제력을 뚫고 감정이 폭발하는 날이 오면 그 숄은 채찍으로 변해 존을 향해 휘둘러질 터였다.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상황에서든 존을 바라보는 해리엇의 눈빛은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너만 있었더라도 제임스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네가 우리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그 애는 이겨냈을 거라고. 이겨내다니 대체 무엇을? 존은 자신의 쌍둥이 형제가 만성적인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았다해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18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나 엄청난 것인가. 존은 그 세월이 자신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는 잘 알면서 똑같은 변화가 그의 형제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제임스 토바이어스 왓슨은 그의 쌍둥이 형제에게도 늘 그 자리에 있어줄 것이라 당연히 기대되는 사람이었다.
아아 드디어 둘을 한 지붕 아래로 보냈사와~ 뭔가 무리수같지만 됐사와~ 더 생각하기 귀찮사와~ 큰 짐을 던 기분이어와~ 여기서부턴 원작 케미에 숟가락만 얹고 가도 될 것 같으와~
2. 쉽고 편한 지름길 냅두고 혼자 고산지대에서 산소부족으로 헉헉대며 전진하는 기분이지만 뭐, 제가 하루 이틀 이러고 산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거쳐온 팬덤들을 돌이켜보자니 좋아서 이런다기보다는 그냥 할 줄 아는 게 이게 밖에 없어서 이러고 사나봐요...
3. 쓰는 저는 할 줄 아는 게 이거 밖에 없으니 이러고 있는다고 쳐도 읽어주시는 분들이 대체 뭐가 마음에 드셔서 계속 읽으시는 지 잘 모르겠어요 ㅠㅠ 이 외진 곳까지 일부러 찾아와주시는데 이런 소리나 하고 있고 죄송합니다 ㅠㅠ
존 왓슨의 모든 생활은 정부권력의 통제 하에서 이루어졌다. 정부는 존 왓슨이 제임스 모리어티와 함께 하던 시절 소유했던 의복과 기타 물품들의 소재를 찾아 그것들을 돌려줄 바에야 모든 걸 새로 사주는 편이 더 싸게 먹힌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존을 수용소에 집어넣은 것은 아니다. 직원들의 관사쯤 되는 작은 플랫에는 수수하지만 세련된 북유럽풍의 가구들과 제법 고른 사람의 개성이 느껴지는 소박한 디자인의 커튼도 달려있었다. 다만 일체의 조리기구나 화기가 허용되지 않았다. 제조과정에서부터 사람의 신체와 생명을 위협할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대개의 물건은 존 왓슨의 손에 들어가면 무기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은 싸구려 플라스틱 텀블러에 뜨거운 얼그레이를 마셔야 하는 걸 불평하는 대신, 자신에게 한 사이즈 큰 바지를 사준 대신 버클이 금속으로 된 벨트를 잊지 않고 챙겨준 것을 감사하기로 했다. 커튼은 좋았지만 옷은 별로였다. 존이 평소 입던 스타일에 비해 지나치게 포멀했고 신경에 거슬릴 만큼 고가였다. '국민 세금을 이상한 데다가 낭비하는 군.' 그나마 셔츠 소매에 달린 것이 커프스가 아니라 플라스틱 단추라 다행이었다. 옷차림은 인격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가짐을 반영하기는 한다. 타이는 없었지만 셔츠의 단추를 목 바로 아래것까지 모두 채우고 문 밖을 나서는 존의 마음은 갑자기 잡힌 ' 약속'으로 싱숭생숭했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보길 원했다. 기관이 아니라 플랫 앞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현재 그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작은 주거공간 어디에도 방문객에게 내놓을 만한 차(뿐만 아니라 찻찬도)가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존이 마신 얼그레이는 텀블러만큼이나 저렴한 종이티백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예의 그 검은 대형 세단 안에서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을 것이 뻔했다. 존은 그가 두렵지는 않았지만 껄끄러웠다. 마이크로프트나 다른 사람이 으례 그렇겠거니 하는 이유와는 좀 다른 이유였다. 그는 자기가 죽인 남자를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불편했다.
"오랜만입니다, 존. 잘 지냈습니까?"
아무리 붙임성 있게 굴어봤자 이 남자의 골수에 스며있을 권력자의 풍모가 존에게 덜 거슬리는 일은 없다.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런 자신을 바꿔봐야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을 터였다. 저 남자의 세계에선 그게 반드시 불리한 점이지도 않을 것이다. 존은 높으신 분들의 세계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보편적인 진리는 어디에나 들어맞는 법. '바다에는 언제나 더 큰 고기가 있다.' 존은 언젠가 마이크로프트가 그의 상급자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구경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존의 성의없는 끄덕임에 불쾌한 기색도 없이 마이크로프트는 꼬아앉은 무릎 위에 깍지낀 손을 내려놓았다. 존은 오른손에 낀 반지를 알아보았다. 왼손이 아니니 결혼반지는 아닐 것이다. 베스트 주머니 안쪽으로 이어지는 시계줄로 보아 이 남자는 무려 회중시계를 들고 다닌다. 손목시계도 차지 않는 남자가 반지를 단순한 장신구로 끼고 다닌다고? 존이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이크로프트는 태연하게 무시했다. 시선과 표정을 잘 감추지 못하는 자신을 아는 만큼, 존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도 즉시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대응에 일일이 마음이 상하기엔 존은 자신의 처지를 잘 기억하고 있는 편이었다.
"요즘 당신 덕분에 저희 직원들이 대단히 일을 편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감사드려야겠군요."
"감사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분명 예전과는 달리 일의 진척이 매우 괄목할 만한데 당사자가 이렇게 나오니 나는 누구에게 인사를 전하면 좋을까요."
"그냥 당신 동생에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별로 상관없잖아요."
"어째서요?“
존은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증오나 혐오,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땅히 감수해야 할 취급이라 생각했지만 이런 것까지 참아야 할 이유가 있나? 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신이랑 당신 동생이 그런 인사를 주고 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지금 이거 일종의 테스틉니까?"
"아닌데요."
"그럼 아까부터 계속 뻔히 아는 답을 굳이 물어보는 까닭이 뭡니까?'
생각해보면 좀 후안무치한 반응이다. '크리스토퍼 하비' 존은 이미 있는 대로 불손한 태도를 취한 뒤 한발 늦게 그것을 깨달았으나 이제와서 사과하고 태도를 고치는 건 너무 우스운 꼴이다. 자신에게 감정이 있다는 걸 본인이 부정하고 있는 판국에 가해자가 나서서 설치는 모양새라니. ‘차라리 뻔뻔해지는 게 낫지.’ 어차피 자신의 알량한 양심이 마지막으로 제대로 기능한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좋습니다. 우리 사이에 괜히 돌아갈 필요는 없지요. 양해해요, 존. 이젠 어쩔 수 없는 습관이 되어버린 모양입니다."
마이크로프트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종이조각을 하나 꺼내어 존에게 건네주었다. 펼쳐보자 거기에는 '베이커가 221B번지' 라고 적혀있었다.
"이게 뭐죠?"
"당신의 새 거주지입니다."
존은 그리 놀라거나 당황해하지는 않았다.
"제 관할권이 다른 기관으로 넘어갔나요?"
"으음..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군요."
그것을 끝으로 더이상 물어보려 하지 않는 존의 태도에 마이크로프트는 약간 김이 샜다. 셜록을 자극시키던 방법(그리고 대개의 경우 다른 사람에게도 통하던 방법)이 이 남자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당신은 셜록과 함께 생활하게 될 겁니다."
펠멜 가에 위치한 마이크로프트의 타운하우스는 화이트홀의 제 2기지였다. 그곳은 마이크로프트의 사적인 거주지였지만 그의 상관과 부하직원들은 물론, 마이크로프트 본인조차 자신에게 사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이라기보다는 재택근무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수많은 보좌관과 비서진들이 관공서처럼 그 집의 문턱을 드나들었고 안보기구는 테러 가능성을 계산하여 특별히 감시요원들을 배치하였다. 길고 긴 관료제의 고리를 따라 내려가 그 누구도 정확한 근원을 알지 못하는 명령은 지역경찰에게도 내려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3시간 간격으로 행해지는 순찰은 이례적이다. 손만 뻗으면 갓 우린 차가 대령되고 종만 울리면 시간과 관계없이 식사가 제공되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셜록이 이 집에 진저리를 치며 오지 않으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셜록은 형의 집에, 영국 정부의 심장부에 와 있었다.
"스나이퍼를 추적하는 것은 가능한가?"
"유령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셜록은 입술을 비틀어올렸다.
"기대도 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실망스러운 건 아니군."
셜록은 그때까지 악의라는 것은 그저 한여름의 더위나 잘못된 방향으로 부는 바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앤더슨이 내뿜는 악취같이, 좀 불쾌하고 거슬리지만 무시하고 넘어가지 못할 것도 없는 하찮은 일상의 요소처럼. 하지만 그때, 그 정체불명의 스나이퍼의 총알이 자신의 머리 바로 옆을 지나갔을 때 느꼈던 그것은 무기였다. 칼이나 둔기같은 물체였다. 질량이 있었고 힘을 주어 내리치면 다른 물체를 파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무게감이 셜록으로 하여금 악의라는 감정을 재정의하게 했다. 그때 그가 느꼈던 그 납덩어리같은 것을 악의라고 부른다면 앤더슨이나 도노반이 그에게 배설하는 감정들은 가벼운 투닥거림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 것을 어디에서도 보고 들은 적이 없었기에 셜록은 잠시 그 악의가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도 잊고 경이로워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시 상황에 압도당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그의 동생을 생각했고 따라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제 발로 걸어들어가 확실하게 목숨을 잃게 될 위기에 처했던 셜록에게 아무런 훈계도 추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총알에선 나온 게 있단다."
"뜸 들이지 말고 얘기해."
"이 분야에 대해선 나보다 네가 더 나을 것 같구나. 저격용 라이플 중에서도 L96A1 모델에서 나온 총알이라는 구나."
"....나오긴 뭐가 나왔다는 거야. 개나 소나 다 쓰는 총을."
"으흠, 하지만 이건 기록에 남아있는 걸."
"무슨 기록?"
"군용 총기 폐기 기록."
“..........”
"어디에서 폐기됐을 지 한번 맞춰보겠니?"
".....아프가니스탄이로군."
"바로 맞추는 구나. 그럼, 이제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니?"
문 뒤에서 나온 사람이 인자해보이는 노부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존은 겉으론 크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매우 당황했다. 점점 그가 생각했던 셜록 홈즈와는 거리가 먼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외관의 건물은 멋스러웠지만 그만큼 낡아보였다.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유학생이나 장기로 해외에 파견 나온 독신자들이 거주할 것 같은 집이었다. 거기에 이 눈웃음 가득한 노부인까지. 존은 딱히 목적어도 없이 이건 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형이랑 같이 살 리는 없으니 펠멜가는 아니고 벨그라비아도 느낌상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것보다는 fancy한 곳에서 살거라 생각했는데.’
“누구세요?”
낯선 사람의 모습에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상냥하게 묻는 노부인에게 존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셜록 홈즈씨 계신가요?”
“이런, 지금 집에 없는 데요. 의뢰인이신가봐요?”
“아, 그런 것은 아니고....”
노부인은 경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친절한 태도로 존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 옆으로 비켜서서 존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세들어 살기까지.’ 존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새삼 자기가 제임스와 함께 다니면서 얼마나 버릇이 잘못 들었는지 깨달았다. 존은 런던 대학에 진학했을 때부터 단 한번도 자기 소유의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모리어티와 만난 후로는 임대기간이나 임대료를 걱정하면 산 적이 없었다. 프랭크 러스틴, 필립 그린, 엠마뉴엘 슐레징거, 계약서에 기재되어 있는 집 소유주의 이름은 언제나 달랐지만 그 집들은 모두가 제임스의 소유였다. 그리고 단순히 ‘임대인’이라는 부분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제임스만큼 대하기 편한 주인은 달리 없었다. 그는 재미만 있다면 자기 임차인이 폭발물로 집을 날려버려도 손뼉을 치며 깔깔 웃을 위인이었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앞으로 셜록 홈즈씨와 같이 살게 된 존 왓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드슨 부인의 환대는 좀 얼떨떨한 느낌이 있을 정도로 열렬한 것이라서 존을 당황하게 했다. 그저 함께 살게 됐다고 말했을 뿐이고 셜록에게 따로 언질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1층의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더니 차에 갓 구운 비스킷까지 (맛이 아주 기가 막혔다) 가져다주며 어쩌다 셜록과 만나게 됐는지, 함께 살겠다는 결정은 어떻게 내리게 된 건지 묻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캐물었다면 존도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렸을 텐데.
“정말 잘됐어요! 난 항상 그 애 곁에 누군가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라고 말하며 기뻐하는 부인을 상대로는 도저히 말을 끊거나 질문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예전 정신과 상담의 앞에서도 이렇게 고분고분했더라면 다시 뛸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임스의 꾐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셜록 홈즈와 친분이 있어서 함께 살게 된 게 아닌 만큼 존은 마이크로프트를 핑계로 댈 수 밖에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일부러 동생 옆에 붙여줄 만한 인물이 되어야 하다보니 자신이 전직 군의관이었다는 얘기까지 해버렸다. 허드슨 부인은 존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기쁨으로 빛났다. 말그대로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의사선생님이라니! 어쩜! 정말 딱이네요. 역시 마이크로프트예요. 그 양반이 새침한 척 뒷짐 지고 있는 것 같아도 하나뿐인 동생을 어찌나 싸고 도는지. 조금만 솔직하게 굴면 셜록도 지금처럼 삐딱하게 굴진 않을 텐데 참.”
“어쩌겠습니까, 형제인 걸요.”
존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응당 그럴 법한 것보다 훨씬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려서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놀랐다. 하지만 존의 말 밑에 깔린 비릿함 따위는 이 상냥한 노부인의 귀에는 닿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린 모양이다. 허드슨 부인은 실로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래요, 정말이지요. 둘이 어쩜 그렇게 똑같은 지! 더없이 멀끔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둘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나이차가 무색하게 똑같은 어린애라니까요. 너무 닮은 형제는 사이가 나쁘기도 한 법이지요.”
“홈즈 씨는 분명 동생이 어렸을 때 돌봐주는 척 하며 젖병에다 자기 유전자를 섞여 먹였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안 닮은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똑같은 행동만 하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요.”
허드슨 부인은 존이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저녁까지 차려줄 기세였다. 함께 살면서 셜록과 싸우게 되면 자기 집에 남는 방을 주겠다는 제의까지 했다. 존이 셜록과 함께 살게 된 진짜 이유를 모르고 그가 아무리 동거인이 마음에 안들어도 혼자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는 처지인 것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존은 그 깊은 호의에 의아한 마음마저 들었다. 허드슨 부인만큼 열렬하진 않아도 존은 언제나 타인의 호의를 쉽게 얻어내는 편이었다. 대체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점을 보며 이렇게 쉽게, 빨리 마음을 놓는 걸까. 악마일수록 천사의 외향을 하고 나타나고 사기꾼은 교활할수록 성자의 얼굴을 한다. 아마도 자신은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악’에 적합한 인간이었나보다.
“차 한잔 더 하시겠어요?”
“예, 부탁드립니다.”
“그건 안돼. 지나치게 위험하다.”
“하지만 존 왓슨이 형이 확신하고 내가 의심하는 것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위험한 인간이라면 그는 간교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쟁이야.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꼬리의 그림자도 잡을 수 없을 거야.”
“그래도 그를 너와 함께 베이커가에 둘 순 없어. 그 집에는 변변한 방범시설 하나 없지 않니?”
셜록은 코웃음을 쳤다.
“내 집 반경 50m 내를 CCTV 및 기타 감시시설의 밀도로는 영국을 넘어서 유럽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놓으신 분의 입에서 들으니 더욱 각별하게 들리는 군.”
“아직까지는 제프 호프 사건 하나뿐이야. 이렇게 달려들 듯이 반응할 일이 아니야. 일부러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거라 해도 이보다는 신중해야 해. 진짜 ‘모리어티’가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해도, 아니면 그저 ‘모리어티’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계략이라 해도 적들은 우리를 알고 있어. 우리가 이것보다는 영리하다고 생각할 거다.”
“그러니까 오히려 저들이 예상하는 대로 움직여줄 생각이야. 우리가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걸 보면 저쪽도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가 일부러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는 걸 알겠지.”
“.....더더욱 이해가 안가는 구나. 적도 다 아는 술수를 부리는 것치고는 네가 감수해야 하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니? 아까부터 넌 네가 존 왓슨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양 말하고 있는데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구나. 당장 그 작은 남자랑 1대1로 붙었을 때 제압하는 건 고사하고 온전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 주제에.”
아무리 불규칙하고 무모한 생활습관으로 자기 육신을 괴롭혀대도 이렇게 대놓고 육체적 능력치를 의심받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상대가 마이크로프트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발품 파는 일은 하기 싫다고 말하는 형에게 들을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쪽이야 말로 minion들 없이는 14살짜리 애한테도 얻어터질 주제에!’ 사실 마이크로프트에게 갖다대기엔 영국의 14세 청소년들은 너무 위험했다. 머릿속으로 여드름 난 어린애에게 마구 얻어맞는 마이크로프트를 생각하며 히죽대고 있었지만 정작 그의 말에 제대로 된 반론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마이크로프트의 지적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셜록은 이성과는 달리 아직까지 존 왓슨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지속적으로 품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기억 속의 첫만남을 반복 재생해봐도 그때 자신을 올려다보던 눈동자 안에 번지던 따뜻함을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처음 면회실에 앉아있던 모습을 보았을 때의 그 남자는, 그가 있는 부분만 채도를 따로 조절한 것처럼 희미했다. 풀기라고는 하나도 없던 얼굴이 자신을 보고,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자신과 말을 섞으면서 천천히 색을 되찾고 그 눈동자 속에 초점이 잡히고 빛이 머무는 광경은, 아마도 지금 자신이 회상하는 것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가 셜록의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아무리 치밀하고 복잡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범죄라고 해도 방법을 알고 범인을 알아내고 나면 그냥 정리하고 보관해야 할 데이터에 불과했는데 사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그 사소한 기억의 편린 하나가 전해질처럼 온 몸을 떠돌고 있었다. 셜록은 조금 과장해서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고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조사나 추적에 나서지 못할 것 같았다. 존 왓슨이 거짓말쟁이라면 그를 만나는 내내 자신이 그걸 알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셜록 홈즈마저 속일 수 있는 거짓말쟁이라면, 존 왓슨이 눈동자 속의 온기까지 꾸며낼 수 있는 희대의 사기꾼이라면 그걸 확인하는 자리에 반드시 자신이 있어야만 한다. 셜록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걸 자신의 형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우기고 조르고 마이크로프트의 체중을 들먹이고 인내심을 시험해서 동생의 우격다짐에 진절머리가 난 마이크로프트로 하여금 너 좋을 대로 하라고 화를 내며 가버린 뒤, 동생의 기행을 막는 것보다는 이미 저질러진 일의 뒷수습을 하는 편이 그나마 상대적으로 편하다는 걸 상기하게 만들었다.
물론 마이크로프트는 조건을 걸었다. 조건을 걸지 않으면 마이크로프트가 아니다. 그는 존 왓슨과 함께 사는 것은 셜록이되, 그의 신병을 관리감독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임을 확고하게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존 왓슨에게 고지하겠다고 했다. 즉, 아무리 한집에서 살아도 존 왓슨이 말을 들어야 할 상대는 셜록이 아니라 마이크로프트라는 뜻이었다. 그것까지 안된다고 할 명분은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셜록은 툴툴거리면서 승낙했다. 자기가 왜 툴툴거리는지도 모르면서.
셜록이 베이커가로 돌아왔을 때, 존은 허드슨 부인의 거실에서 부인과 함께 TV를 시청 중이었다.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나 부인이 만들어준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웠는데 존으로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녀의 샌드위치는 비스킷 만큼이나 맛있었다.
“셜록! 약속을 해놓고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다니!”
셜록은 당황했다.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그냥 머리에서 지워버리는 건 하루 이틀일이 아니었지만 존 왓슨이 자기 집에 오는 날짜는 연예계 가쉽이나 수상의 이름처럼 하찮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셜록은 해본 적이 없어 익숙하지 않은 사과를 입 안으로 웅얼대면서 존을 2층을 이끌었다. 열쇠로 잠긴 문을 열고 존이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켰다. 존은 거실 안 풍경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있었다. 새삼 자신이 집을 잘 치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셜록은 헛기침을 하며 부산스럽게 소파와 탁자 위에 널려있는 날짜가 지난 신문들과 출력해놓은 병리학 논문 사본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치운다고 해봤자 한 장소에 있는 걸 다른 장소에 쌓아놓는 것에 불과한 행태였지만 존은 웃지도 않고 셜록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셜록은 (그에 기준에) 중요하지 않지만 (보편적인 기준으로) 그냥 버리기엔 애매한 편지들을 모아 벽난로 위에 잭나이프를 꽂아 고정시키는 짓을 마지막으로 소위 ‘정리’라는 걸 마쳤고 존은 아까부터 알아차렸지만 그제야 손을 들어 벽난로 위에 있는 해골을 가리켰다.
“저기 해골이 있네요.”
“....한 가지 말해두자면 난 천치라도 알아볼 수 있는 명백한 관찰결과를 말로 반복해서 알려주는 걸 싫어합니다.”
존은 살짝 눈을 굴렸다. 셜록은 그 모습을 보며 밑도 끝도 없이 자기가 너무 성급하게 굴었다는 생각에 괴로워졌다.
“오케이, 그럼 말을 바꾸죠. 왜 해골이 벽난로 위에 있죠? 진짜 사람 두개골입니까?”
이제 셜록은 존의 질문에 성의있게 답해줘야겠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제 친굽니다. 여기서 제가 친구라면 함은...”
“아뇨, 됐습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는데 알고 싶지 않네요.”
“존, 위층에 있는 침실을 보겠어요? 볕도 아주 잘 들고 마음에 들 거예요.”
존과 반나절 동안 함께 있다보니 이 남자가 더욱 마음에 들어버린 허드슨 부인은 셜록이 무슨 기행으로 이 듬직한 전직 군의관을 쫓아버릴지 몰라서 두 사람을 따라 올라왔다. 부인이 생각하기에 존이 정 싫다고 가버리면 아무리 마이크로프트의 ‘주선’이 있었다해도 자유국가인 영국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허드슨 부인.”
존은 순순히 부인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셜록은 어쩐지 지친 기분이 되어서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존이 다시 거실로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보고 셜록은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일어섰다. 셜록이 그러거나 말거나 셜록 앞에 선 존은 꽤 밝은 얼굴이었다. 침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존은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을 때까지만 해도 셜록은 대체 그 좁고 별 거 없는 침실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을까를 궁리하느라 존이 내민 손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 허드슨 부인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보람도 없이 존은 민망함도 불쾌감도 없이 세워둔 빗자루처럼 가만히 있기만 하는 셜록에게 눈짓으로 자신의 손을 마주잡으란 신호를 보냈고 셜록이 채 손을 다 들어올리기도 전에 먼저 다가가 낚아채듯 악수를 했다. 그리고 더없이 상큼해서 오히려 불길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홈즈씨.”
존 왓슨은 확신했다. ‘나는 가정부로 이 집에 온 것이구나!’ 웃기게도 그 생각은 존에게 적지 않은 정신적 안도감을 주었다.
이 세계관에서는 타임 라인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애매하네요. 일단 현재는 원작 사건이 그대로 일어나는 만큼 101 시점이긴 한데 모리는 존이랑 훨씬 일찍 만났고 기분이 업됐고 그래서 원작 시점보다 2~3년 일찍부터 홈즈 형제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피력했던 걸로 치겠습니다. 음하하;;;
+ 뻔히 다 아는 원작 사건을 AU에 맞춰 재구성하는 건 컨셉의 흥미로움과는 달리 꽤 지루한 작업이었습니다. ㅠㅠ
++ 존이 모자라~ 존이 모자라~
그동안 발걸음 하지 않았던 것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셜록은 빈번하게 기관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에 관한 마이크로프트의 세련되고 심술궂은 코멘트 – 마이크로프트는 이 두 형용사를 아무런 모순없이 함께 쓰는 데 매우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시로 일관했다.
“....이 사건은?”
“10월 19일, 부다페스트. 6인 사망, 3인 중상, 그 중 4명이 사설경비기관 소속의 직원들이었고 공모여부는 입증되지 않았음. 3분 후에 인근 아트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던 칸딘스키의 ‘대지의 초상’이 도난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절도가 아니예요.”
“음?”
“음, 물론 절도도 계획의 일부이긴 했지만, 분명 기억하고 있어요. 그건 절도계획이 아니었어요. 절도가 계획의 일부이긴 했는데 계획의 핵심이 되는 중요범죄는 그게 아니었단 말이죠.”
“....좋아요.”
셜록은 입으로는 오케이라고 말했지만 보여주었던 사진을 다시 걷어가려는 몸짓에서 존이 읽어낸 건 전혀 다른 메시지였다.
“아뇨아뇨, 그거 맞아요. 그거.... 으음, 제임스가 저지른 게 맞아요. 다른 거랑 헷갈린 거 아니예요. 분명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TV에 나온 걸 같이 보기도 했고, 난 기분이 안좋았고, 뭐 항상 그랬지만. 분명 다른 목표가 있는 범죄였는데... 잘 기억이 안나네요. 좀 더 개인적인 동기였던 것 같은데... 사망자들은 부차적인 피해가 아니었어요. 이건 방향을 잘못 튼 절도나 사람 죽이는 걸 무서워하지 않은 특수강도가 아니라 살인을 목적으로 계획되고 행해진 범죄였습니다. 그건 확실해요. 내가 확신할 수 없는 건 정확한 타겟이 누구였냐와 이 범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주 수익이 무엇이었는지예요.”
셜록은 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존 왓슨이 하고 있는 말이 옳다면 셜록은 틀렸다. 셜록은 자신이 이미 해결한, 혹은 해결했다고 믿은 사건을 다시 들쳐봐야 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모리어티의 범죄행각을 추적하는 동안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재고한 적이 없었기에 셜록은 못마땅한 마음으로 가득 찼으면서도 존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데이터가 없었다.
“...좀 더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럼 다음 사건.”
분명 수상하게 보이기는 했다. 셜록이 존을 신문하기 시작한 후로 그가 제공하는 정보의 질은 완전히 달라졌다. 장렬히 산화한 브라운 요원의 아래턱에 축복을. 이 기묘함을 눈치채지 못할 홈즈 형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잠시 두고 보는 걸로 하지.”
“꼭 다른 선택지가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군.”
마이크로프트쯤 되면 항복 선언과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자기 비하도 이토록 점잖다.
“.....바로 그거다(exactly), 셜록. 바로 그거야.”
아직은 셜록 자신이 존 왓슨이란 인간 자체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시점이 아니었지만 설령 그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고 해도 셜록이 존 왓슨을 신문하는데만 자신의 모든 시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존 왓슨은 이미 잡은 고기인 것이다. 셜록만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이미 수중에 들어와있는 자원에 상대적으로 덜 신경쓰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다. 셜록은 존을 만나러 가는 시간을 일종의 오락거리(distraction)으로 정의하고는 꽤 잦은 빈도로 레스트레이드에게 문자를 보내 사건을 독촉했다. 존은 그 이후로 셜록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건을 세 개나 더 짚어주었고 이미 알고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서도 중요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를 통해 셜록은 모리어티의 유산이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에 이르기까지, 촘촘한 사슬처럼 연결되어있는 언더그라운드 갱들에게 분배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기관의 요원들이 한달이 넘는 시간동안 협박하고 강요하고 어르고 달래도 알아내지 못했던 고급 정보였다. 이쯤되자 마이크로프트는 존이 신문에 적대적인 척 하면서 셜록의 등장을 유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셜록은 그것이 타당한 의심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아니라고 해도 그 다음 직면하게 될 의문은 다르지 않다. ‘대체 왜?’ 마이크로프트는 이제 자신이 알고 있는 ‘존 왓슨’이 진짜 ‘존 왓슨’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리어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만큼 존 왓슨에 대해 아는 것도 얼마 없었다. 제임스 모리어티와는 달리 존 왓슨은 군복무의 경력이 있는 의사였고 따라서 정부에서 그의 신원을 잘못 파악할 가능성은 제로 그 이하였다. 하지만 이력서 몇 장이 한 인간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듯이 영국 정부가 존 왓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사실상 존 왓슨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는 있어도 그 남자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주는 것이 없었다. 그는 무고한 방관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손에 피를 많이 묻혔고 조직의 핵심멤버라고 하기엔 한 일이 너무 없었다. 적어도 없어보였다. 그의 정체는 그의 행적에 의해 결정되는 바, 존 왓슨는 어느 한 카테고리에 넣고 단호하게 정의하기에는 너무 어설프게 살아왔다. 범죄조직뿐 아니라 어느 조직이라해도 이런 인사를 내부인으로 받아들이고 참아줄 것 같지 않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임스 모리어티의 등에 총알을 박아넣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이었다. 그 자신은 스스로를 제임스 모리어티의 보디가드 정도의 위치에 놓아두고 있는 듯 보인다. 보고도 못본 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 오로지 보호자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려고 애써온 지난 삶. 그것이 그의 양심과 삶이 서로를 참아내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말이다. 도대체 이 남자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동력에 대체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어서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의 동생을 일단 미끼로 드리우기로 했다. 그의 짐작대로 존 왓슨이 셜록의 등장을 유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셜록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인즉슨, 존 왓슨이 - 그게 뭔지 알 수는 없지만 – 셜록에게서 무언가 약점이 될 만한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셜록 홈즈란 인격체는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는 약점의 총집합이라고 할 만한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이 지금껏 동생으로부터 세상을 (그 역 또한 성립한다) 보호해온 것만큼이나 존 왓슨으로부터 동생을 보호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셜록과 존의 만남에 당분간 아무 제한을 가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바로 그 시점에 우연찮게도 셜록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사건에 대한 정보를 레스트레이드에게 요청하고서 퇴짜를 맞는다. 언론에서는 그 사건들을 일컬어 ‘연쇄자살사건’이라고 칭했다.
4번째 피해자, 제니퍼 윌슨이 로리스턴 가든의 버려진 집에서 발견되자, 레스트레이드는 마침내 고집을 꺾고 셜록에게 자문을 요청했다. 셜록은 분명 즐거웠으나 도노반 경사나 앤더슨을 상대하는 일이 예전보다 더 피곤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자신과의 대화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또 즐겨주는 상대를 만난 뒤 다시 겪게 된 일상적 적의와 한심함은 대비효과로 인해 더욱 두드러졌다. 면전에서 지극히 사적인 일들을 폭로하며 상대방을 모욕하기를 즐겨하는 셜록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 일을 즐기지 않았다. 정말로, 도노반과 앤더슨의 성생활은 폭로하면서 가학적인 재미를 느낄 만큼 창의적이지도 못했다. 그저 그의 경험상, 이런 식의 모욕이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데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따라 도노반과 앤더슨은 평소보다 더 짜증나게 굴었고 – 그게 가능할 줄이야 – 그래서 셜록은 자신의 폭로앞에서 샐쭉하게 입을 다물어버리는 두 남녀의 반응에 상당한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말로 돌려줬다고 한들 자신이 받은 되를 잊어버리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셜록을 상대한지 5년이 넘어가는 레스트레이드는 특유의 드라마틱한 동작으로 코트를 펄럭이며 현장에 들이닥친 셜록 홈즈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 남자의 기분이 약간이나마 뒤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뭔 일이야?”
“경위에게 부하들의 뇌를 개조할 권한이 없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니 신경 꺼요.”
자진해서 셜록 홈즈를 찾아가 자문을 요청한 이상, 평소보다 더 재수없게 구는 행태에 손상당할 만한 감수성이나 자존심이 남아있지 않았던 레스트레이드 경위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사건 현장인 폐가의 방 한가운데, 천 명의 군중 속에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시선을 잡아끄는 핑크색 옷차림의 여자가 죽은 채로 누워있었다. 레스트레이드가 말한 대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이점은 피해자가 왼손 검지손톱으로 바닥을 긁어남긴 다잉 메시지였다. 앤더슨이 포기할 줄도 모르고 쫓아와 자신의 지적능력을 입증하는 동안 셜록은 스마트폰을 몇 번 검색하는 것만으로 제니퍼 윌슨이 독일인이 아니라 카디프에 거주하고 있는 언론미디어계통에서 일하는 프로페셔널로 런던에는 잠시 방문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방은 어디 있어요?”
“아까부터 계속 그 얘기하는데, 대체 무슨 가방?”
“내 말 듣고 있었던 사람 맞아요? 제니퍼 윌슨의 여행가방 말이예요!”
“가방 같은 건 없었어.”
원래부터도 사람을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운 셜록의 눈빛이 더욱 비상한 날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레스트레이드는 직감했다. 뭔가 알아냈구나. 그의 부하들보다 셜록에 대해 훨씬 공정한 평가를 내릴 줄 아는 레스트레이드는 기대감으로 구부정해져있던 등을 곧추세웠다. 물론 이 전율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짜증스러움과 자기비하를 감수해야 하겠지만 뭐 어떤가. 어쨌거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살인범을 잡는 일이지, 자아존중감의 유지가 아니다. 폐가를 온통 헤집을 기세로 여행가방을 찾던 셜록은 어디에서도 가방이 발견되지 않았음을 확인하자마자 선언했다.
“모두 살인입니다. 연쇄살인이예요. 연쇄살인은 언제나 어렵죠. 실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네!”
“기다림은 이미 끝났어요. 그녀를 봐요! 진짜 그녀를 좀 제대로 보라고요! 실수는 이미 했어요!”
뒤로 갈수록 셜록의 대꾸는 무성의해졌고 부리나케 현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기에 레스트레이드는 점점 더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무슨 실수?!”
“핑크!!!”
그게 다였다.
셜록의 논리는 명쾌했다. 명쾌할 수 밖에 없었다. 피해자가 소지하고 있던 가방이 사라졌다. 지갑이나 핸드백이 아닌 여행가방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피해자가 처분했을 리는 없다.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당한 상황에서 무슨 수로 여행가방을 처분한단 말인가. 먹어서?) 그렇다면 결론은 범인이 들고 갔다는 것 뿐이다. 살인범의 첫 번째 실수다. 그런 차림새의 여자가 들고 다닐 여행가방이란, 그것도 장기간 여행이 아닌 하루 이틀만의 돌아가는 단기간의 여행을 위한 작은 사이즈의 가방이라면 당연히 실용성보다는 패션에 어울리는 지를 먼저 고려해서 구입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하이힐에 트렌치코트까지 핑크색으로 맞춰 입는 여자의 여행가방이란 핑크색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핑크색이 아니라고 해도 그 끔찍하게 눈에 띄는 옷에 매치될 만큼 튀는 색깔일 것이 분명하니, 남성이 – 연쇄살인범의 99%는 남성이라는 통계에 비추어보면 무리한 가정은 아니다 – 그런 색상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불필요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될 위험이 있다. 범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자마자 가방을 버려야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셜록은 로리스턴 가든 근처 차량으로 5분 거리내에 있는 모든 쓰레기더미를 뒤져 피해자의 핑크색 여행가방을 찾아냈다. 그는 지저분했고 이상한 냄새를 풍겼으며 오후 4시 이후로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활력이 넘쳤다. 택시기사의 눈총을 받아가며 베이커가 221B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도 그 기묘한 활기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가방을 샅샅이 살펴본 결과, 셜록은 한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제니퍼 윌슨의 수중에 없었던 것은 가방뿐만이 아니다. 휴대폰도 없었다. 살인범은 자신이 의도치 않게 가방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가방을 버렸다. 그런데 그 가방안에도 휴대폰이 없다면? 제니퍼 윌슨의 휴대폰은 살인범의 수중에 남아있다. 어째서 가방은 버린 범인이 휴대폰은 가지고 있을 까? 가방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적어도 셜록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그는 경찰이 신원조사와 함께 알아낸 제니퍼 윌슨의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비록 그의 휴대폰 번호는 그의 웹사이트 ‘추론의 과학’에 올려져있는 고로 언제나 알아볼 위험이 있었지만 애당초 별로 가망성 없는 모험이었다. 셜록은 주저하지 않고 피해자가 보내는 것으로 추정될만한 내용의 문자를 살인범으로 추정되는 자에게 전송했다. 이제 반응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이 부분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일 중에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영역이었다. 물론 미스터리를 풀고 범죄를 해결함에 있어서 기다림은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의 곡에도 좋아하는 부분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분이 있듯이 이 순간, 셜록 홈즈는 철저하게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셜록은 그것이 참으로 싫었다. 괜히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보낼 사람도 없는 문자를 작성하다가 다시 지워버리기를 반복했다. 만약 셜록에게 좀 더 수동적으로 지낼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는 오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짧게 서술하여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갑작스럽고도 낯선 욕구의 근원을 파헤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5초간 셜록은 전화를 받을지 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론은 받지 않는 것으로 났고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알면서도 셜록은 아쉬움을 느꼈다. 불나방처럼 분별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는 않는다고 해도 위험과 스릴을 전혀 즐기지 않고서야 굳이 이런 분야의 미스터리를 푸는 것에 인생을 걸 이유는 없다. 셜록은 오늘따라 자신의 하드드라이브가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정보처리과정 중에 자꾸만 멈칫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센티멘탈해’라던가, 혹은 ‘컨디션이 안좋아’라고 표현할 만한 상황이었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도시의 빛 공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밤하늘의 별빛들을 보며 셜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에 한번도 겪기 힘든 모험을 앞두고서도 그에 대해 문자 하나 보낼 곳이 없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는 셜록 홈즈라니, 단 맛에 질려버린 마이크로프트만큼이나 부조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부조리하든 셜록은 가야할 곳이 있었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대가 아니었다.
노섬벌랜드 가 22번지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 그 근처에 안젤로가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 둘, 그 식당에는 셜록 홈즈 전용석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건너편에 해당하는 노섬벌랜드 가 22번지가 가장 잘 보인다. 셜록이 메뉴판에 없는 음식을 주문해도, 설령 아예 음식을 주문하지 않는다해도 불평할 안젤로가 아니었지만 셜록은 먹지도 않을 샐러드를 주문했다. 동행이 있었다면 훨씬 자연스러웠겠지만 잠복할 때 자연스러워보이기 위한 목적만으로 구하기엔 ‘동행’은 지나치게 기회비용이 많이 드는 존재다. 이쯤되면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심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와서 동행도 없이, 시켜놓은 샐러드는 먹지도 않은 채 뚫어져라 창 밖만 바라보고 있는 키크고 창백한 남자가 눈에 띄지 않을 가능성을 고려해보라. 그나마 창 밖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앉았다는 것 정도가 대비책이었다.
CCTV처럼 셜록의 두 눈은 시야에 담긴 모든 형상을 정보화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갈지자로 걸어가는 중년남자와 다정히 서로를 얼싸안은 채 길을 건너는 연인, 불륜상대를 기다리는 남자, 영업 중이지 않은 창녀, 가석방된 성범죄자 둘 등 노섬벌랜드가를 차지하고 있는, 생물과 무생물을 불문한 모든 물체의 위치와 시간경과에 따른 그 변화를 인식했다. 유력한 후보가 다섯 정도로 좁혀지고 더욱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후보군이 마침내 단 하나로 좁혀졌을 때, 셜록은 통유리창을 뚫고 나가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맹렬하게, 또 그만큼이나 갑작스럽게 가게를 나와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이 도시 어느 곳에서 목격되더라도 아무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검은 차량. 저 런던 캡은 무려 25분간 시동을 건 상태로 정차 중이었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뒷통수가 보일 만한 거리에 들어섰을 때, 택시도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키 크고 시꺼먼 남자의 최종 목적지가 자신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스팔트 위에 스키드 마크까지 남기며 택시는 급출발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은 맨 몸으로 달리고 있는데 상대방은 차량에 올라타있다면 차량이 출발하는 순간 이미 심적으로 추격을 포기한다. 그러나 셜록 홈즈는 한번이라도 그냥 넘어가면 사람들이 잊어버리기라도 할까봐 매번 기회가 될 때마다, 꼬박꼬박, 착실하게 (아마도 셜록 홈즈를 향해 ‘착실한’이라는 형용사를 쓸 수 있는 몇 안되는 경우일 것이다) 상기시켜주듯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런던을 머릿속에 담고 다니는 남자였다. 건물, 도로, 인도, 골목길, 차량은 지나갈 수 없지만 사람은 지나갈 수 있는 장애물 등 모든 변수들을 고려하여 도출된 최단거리는 셜록으로 하여금 마침내 22분만에 속력을 내어 달리는 택시를 따라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가로등이 반사되어 주황색으로 번들거리는 차장 너머로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이 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을 통해 쏟아져나오는 정보를 바르게 해석한 순간, 셜록의 다리는 멈춰섰다.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육체와 정신은 모두 잘 발달되어 있었지만 전속력으로 달리는 동시에 습득한 정보와 기존의 추론 사이에서 모순이 발견되자마자 그것을 정리하여 기존 추리과정에서의 오류를 발견, 교정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햇살 아래 잘 그을린 얼굴, 눈썹손질과 성형수술의 흔적, 무엇보다 어이없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희미하게 공포까지 드리워져있던 표정. ‘미국인, 관광객이로군’ 셜록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숙였다. 자신의 오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패배감과 짜증스러움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달리는 택시도 따라잡을 정도였던 그의 다리 근력을 급감시켰다. 그는 지치고 피곤한 채로 베이커가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자신의 실패에 잔뜩 화가 나있는 셜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난데없이 마약단속을 하겠다며 나타난 레스트레이드와 그의 일당들이었다. 자신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자부심으로 그 거대한 에고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셜록이었지만 스스로에게 화가 났을 때 취하는 행동패턴은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레스트레이드에게 필요이상 화를 냈다. 자신이 핑크색 여행가방을 발견하고서도 증거품으로 인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앤더슨까지 끌고 들어와 자신의 플랫을 뒤집어놓는 행태를 일컬어 유치한 복수라고 말하며 경위의 인격을 모욕했다.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의 모욕에 익숙했다. 하지만 대부분 셜록의 모욕은 그의 지적 능력에 국한된 것이었고 오랜 세월의 힘으로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의 모욕을 흘러넘기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레스트레이드가 자신의 지적 능력과 인간적 가치를 어느 정도 분리시키는 절차를 거쳐야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번에 셜록이 모욕한 것은 레스트레이드의 정신적 성숙도였다. ‘복수’라니! ‘꼭 제 놈 같은 수준에서 생각하기는.’ 온전히 부정할 수가 없어서 레스트레이드는 더 화가 났다. 그러나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결국 속마음을 능숙하게 감출 수 있는 지 여부의 차이이다. 그리고 레스트레이드는 이런 때의 셜록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비록 부부 사이는 점차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렉 레스트레이드는 6세에서 7세 가량의 아동을 두 번 양육해본 경험이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결국 셜록도 칼자루가 레스트레이드의 손아귀에 있음을 알아서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것이다.
“레이첼을 찾았네.”
아니나 다를까, 셜록이 얼굴색을 바꾸며 달려들었다.
“누군데요?”
“제니퍼 윌슨의 딸.”
“어디 있어요? 만날 수 있나요?”
“그녀도 죽었어.”
“멋지네요! 어떻게요? 연관이 있을 겁니다. 있는 게 분명해요!”
“엄밀히 말해 레이첼은 살아있은 적이 없어. 그녀는 14년전에 제니퍼 윌슨이 사산한 딸이야.”
그의 부하들은 셜록 홈즈에 대해 생각할 때면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무표정한 냉혈한’, ‘범죄에 집착하는 변태’, ‘예비연쇄살인마’ 등등의 키워드들을 연상하는 모양이지만 레스트레이드에게 셜록 홈즈라는 인간은 그의 추리보다는 훨씬 파악하기 쉬웠다. 그는 셜록 홈즈를 7세 남아와 동일시할 수 있는, 그 희귀함만으로도 독보적으로 취급받아 마땅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레스트레이드의 눈에 비친 셜록 홈즈는 가지고 있는 정서의 스펙트럼이 극단적으로 협소해서 그렇지, 그렇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정서 하나하나의 진폭은 대단히 컸다. 셜록이 혼란스럽고 당혹한 얼굴로 물러서며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 안되잖아.’ 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앤더슨이 ‘죽어가는 순간에 사산한 딸을 떠올리는 게 말이 안된다고? 소시오패스 맞네.’라고 받아쳤을 때 레스트레이드는 순간적으로 셜록에게 미묘한 동정심을 느꼈다. 물론 그 동정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는 딸을 ‘생각’했던 게 아니야. 손톱으로 바닥에다 이름을 새겨넣었다구. 그건 꽤 힘든 일이었어. 아팠을 거라고.”
과연, 여기에는 앤더슨도 아무런 대꾸를 못했다.
셜록같은 세입자를 참아줄 뿐만 아니라 꽤 아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온화하게만 보이는 노부인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올라와봤는데 고함소리와 함께 쫓겨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평범한 상식인인 레스트레이드에게는 꽤 민망한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셜록은 둥지에 불난 소쩍새처럼 긴 팔다리를 퍼덕이며 플랫 안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역설적으로 레스트레이드는 그 초조함 모습에서 어떤 징조를 느꼈다.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 끝에서만 맴도는 어휘나 관용구처럼 사건의 진상은 셜록 홈즈의 광대한 마인드 팰리스 어딘가에 처박혀있을 뿐, 없는 것이 아니었다. 주인이 그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레스트레이드는 이럴 때의 셜록은 그저 가만히 놔두는 것이 상책임을 알 만큼 그를 오랫동안 상대해왔다. 또한 사건 해결보다 자신의 에고를 지키는 데 더 강한 열의를 지닌 몇몇 부하들과는 달리 레스트레이드는 처음 셜록 홈즈를 사건수사에 개입시키기로 마음먹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변함없이 절박했다. 그래서 그는 뒷수습에 머리가 아파오면서도 셜록이 바라는 대로 앤더슨에게 얼굴을 돌리라고 명령했고 그의 항의를 무시했다. 그리고는 왜소한 뇌를 가진 어리석은 필멸자들(mere mortals) 사이에서 홀로 신의 목소리를 듣는 오만불손한 사제의 말을 기다렸다.
좌절 뒤에 떠오른 해답이었기 때문인지 셜록 홈즈의 이번 show-off는 유독 더 심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와 인간의 어리석음 중에 그것이 무한함을 확신할 수 있는 건 후자라고 말했다. 누가 레스트레이드에게 묻는다면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할 수 있겠냐고 제안할 작정이었다. ‘앤더슨을 모욕하는 방법에 발휘되는 셜록 홈즈의 창의성’.
‘레이첼’이라는 패스워드를 입력하자, 휴대폰의 위치를 추적하는 프로그램이 동작을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로딩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그 결과가 모니터에 나타났을 때, 셜록은 실로 오랜만에 등골 위로 뱀이 지나가는 듯한 서늘함을 느꼈다. 베이커가 221b번지. 앤더슨은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고 레스트레이드는 실망한 기색임이 분명한 한숨을 내쉬었다. 셜록은 온 몸의 털이 죄다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 허드슨 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택시가 와있다고 했다. 아무도 부르지 않은 택시. 자신이 노섬벌랜드가에서 쫓았던 택시. ‘승객이 아니었어.’ 어리석기는! 아무튼 언제나 뭔가가 있다니까. 승객일 리가 없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그들이 갈 리가 없는 장소에서 죽어있었다. 대체 누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순순히 따라가게 만들 수 있을까. 당연히 택시 기사밖에 더 있을까. 셜록은 자신의 집을 가득 채울 만큼의 경찰들 속에 있으면서도 이토록 위태로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바로 저 문 밖에 있어.’ 그는 범인을 밝혀냈다. 하지만 아직 풀어야할 미스터리가 남아있었다. 어떻게 피해자들에게 순순히 독약을 삼키게 만들었을까? 일단 차에 올라탄 승객을 원하는 장소를 이동하는 건 그렇다쳐도 자기 손으로 독약을 먹게 만드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모든 종류의 천재를 천재로 만드는 제 1 전제조건이 있다. 에너지의 집중. 셜록은 상대가 지극히 위험한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도, 바로 눈 앞에 있는 레스트레이드에게 입만 벙긋하면 네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범을 영구히 사회에서 격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그의 시냅스에는 이미 불이 붙었고 그에게 존재하는 모든 의식은 ‘좀 더’를 절규하고 있었다. 그의 육체에서 자체생산되는 모든 화학물질이 그가 지금까지 경험해본 중에서 가장 강한 몰입의 상태를 유도했다. 그 ‘셀프 트랜스’ 상태에서 셜록은 거의 인식하지 못한 채 레스트레이드들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코트를 집어들고 1층 현관 앞으로 내려갔다.
연쇄살인범이 모는 택시의 뒷좌석에 앉아서 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밤거리를 바라보는 기분은 오묘한 것일 터였다. 명백히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상황을 자초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한 셜록 홈즈의 태도는 무슨 일이 닥쳐도 자신만은 살아남으리라는 망상에 가까운 자신감에 기반한 것도, 그렇다고 해서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초연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다만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를 ‘7살짜리 아이’로 생각하는 레스트레이드의 인식은 당사자의 평균적인 지적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통찰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좌절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짜증스러움은 그저 평소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정말 자신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게 만드는 무력감과 패배감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멍청이와 바보들로 가득 찬 장소라 경멸당하면서도 세상은 결국 셜록 홈즈에게 미스터리와 모험으로 가득찬 큰 놀이터에 불과했다. 그의 삶은 쉬웠다. 그 사고의 정교함이나 세련됨과는 상관없이 셜록 홈즈는 단순한 남자였고 그 단순한 남자의 삶에 어떤 고뇌나 고통이 끼어들었다한들 그의 삶은 쉬울 수 밖에 없었다. 영국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를 친형으로 두어서 국민들의 세금을 동원하여 정부 차원에서 그 안위를 신경 쓰고 있는 인간의 삶이다. 태어날 때부터 결코 ‘보통’은 될 수 없었던 남자는 모든 인간을 대중이란 이름으로 익명성 아래 뭉개버리는 현대의 저주와는 결코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입으로 좌절은 사람을 마비시키고 사랑이야말로 더 파괴적인 동기라고 말하면서도 셜록은 자신의 입이 하는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관찰의 결과였다. 논문으로 출판할 수도 있는 통계치. 그가 진정으로 그 아이러니를 보며 압도당한 적이 있을까. 결국 사람의 인생을 진짜로 망가뜨리는 최후의 일격은 절망보다는 소위 사랑이라고 뭉뚱그려질 수 있는 감정군(群)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아직까지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 뿐이었다. ‘이 방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누구지?’ 나다. 내가 여기서 가장 똑똑한 존재이며 그 누구도 나의 지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저 자신이 옳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 자신의 똑똑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 행복이란 그에게 있어 지나치게 고차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지표로서 기능할 수 없다. 만족? 그 정도면 바람직하다. 갓난아이의 세계가 오로지 쾌와 불쾌로만 이루어져있는 것처럼 셜록 홈즈의 세계에서 자극은 오로지 만족스러운 것과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나뉘어진다. 그렇다면 지금은? 총에 맞을 지도 모른다는 위협조차 없는데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놓을 지도 모르는 독약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제프 호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4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그 과정에서 매번 살아남은 것을 천재성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말한다. ‘아직도 지루한 가요?’
단 한 발의 총알이, 밤의 공기를 발갛게 가로지르며 총구에서 발사되었고 그것은 그대로 제프 호프의 어깨를 관통했다. 뱀의 이빨. 그 이빨 끝에서 방울져 떨어져내리는 독액. 총알은 셜록의 등 뒤쪽 창문에서 날아왔다. 경로로 보아 셜록의 오른쪽 어깨 위를 지나 제프 호프의 왼쪽 어깨에 도달한 것이다. 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는 제프 호프의 동맥을 끊어놓은 만큼이나 셜록의 머리를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셜록은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으나 결국 하지 않은 자의 악의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몸을 낮추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수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대신 쓰러진 남자에게 달려가 물었다. ‘내가 맞게 골랐나?’ 남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은 몇분, 아니 몇 초내로 그에게 당도할 것이다. 자신이 똑똑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을 만큼의 어리석음이라 해도 셜록 홈즈에게도 우선순위라는 개념이 존재하기는 한다. 그는 더 중요한 정보를 캐내야했다. 독이 든 캡슐은 집어던져버리고 셜록은 연쇄살인범을 후원하는 스폰서가 누구인지를 추궁했다. 이름을 대라고 외쳤지만 그가 정말로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진짜 이름을 알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연히 가명이겠지. 하지만 별명이든 무엇이든 그 존재를 지명할 수 있는 기호라면 아무것이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시냅스에 붙은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아 그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죽어가는 남자의 상처입은 육신을 공격하여 그를 고문했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되는 일인가에 대한 고민은 한참 뒤에 할 일이 없을 때에 그를 찾아올 것이다. 그는 이름을, 아니 기호를 기다렸다.
“모리아티....!”
뱀의 이빨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독액. 단 한번의 공격으로 코끼리도 쓰러뜨릴 수 있는 맹독. 이미 죽어버린 뱀의, 석화된 이빨에서. 이미 넓은 실습실에서는 홀로 우뚝 서 있는 자 외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셜록은 그저 망연자실하여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말을 반복했다.
"...어제 오후 7시 30분경, 포츠위츠 교도소로 향하던 수송차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호송 중이던 죄수 한 명이 사망하고 업무를 담당했던 두 교도관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경찰은 담당교도관들로부터 자세한 사건 경위를 조사 중입니다. 다음 소식 알려드리겠습니다...."
셜록은 TV를 꺼버렸다.
그 후, 42일동안 셜록은 존 왓슨에 대해 일언반구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자기가 필요하니 살려놓으라고 해놓고 한달이 넘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는 동생의 행동에 대해 마이크로프트가 무슨 생각을 했을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셜록 홈즈가 그의 형에게 존 왓슨을 살려놓으라고 종용한 지 43일째 되는 날, 먼저 전화를 건 쪽은 마이크로프트였다.
셜록은 생각했다. 마이크로프트를 형으로 둬서 좋은 점이라고는 그의 직원들은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는 정부기관의 본사로 자신을 안내할때 눈가리개를 씌우는 바보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이다. 대체에너지를 연구하는 연구소인양 세워진 모던한 건물에는 풍력발전기까지 설치되어있었다. 셜록은 코웃음을 쳤다. 실내는 정신병동과 반도체 제작공장을 섞어놓은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의사 가운이나 실험복 대신 평범한 정장을 입고 있을 뿐 이 건물 안 공기에는 편집증과 강박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유독물질이 떠돌고 있었다. 하나같이 유사한 구조라서 1년 이상 근무한 사람도 주의를 집중한 채 이동하지 않으면 헷갈리기 쉽상이라는 복도를, 셜록은 빠른 걸음으로 스쳐지나가며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 구조도가 런던의 지도처럼 그의 하드 드라이브에 반영구적으로 저장될지, 아니면 3개월만에 폐기처분될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셜록 본인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분 24초 후, 그를 여기까지 안내해온 직원이 마침내 발을 멈추고 겉보기에는 이제껏 지나쳐온 무수한 문들과 전혀 다를 다 없는 평범한 문을 열었을 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존 왓슨을 봤을 때, 그 구조도는 셜록의 뇌리에 영구히 새겨졌다.
존 왓슨은 분명 아무런 설명없이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만을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의 몸짓 언어는 거의 고함을 지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훈련되지 않은 자의 눈에는 혹시 무관심인가 싶을 것이다. 그것은 무관심으로 가장하고 있는 적개심이었다. 몸을 문의 반대방향으로 비틀고서 한손으로 턱을 괸 채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방문쪽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지만 탁자와 의자의 위치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온 몸으로 주장하고 있는 듯한 자세다. 그쪽에서도,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쪽에서도 바로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수동공격적이군.' 셜록은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에게 연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저도 모르게 슬며시 입가가 올라가려는데 그래도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는데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는지 존 왓슨의 시선이 힐끗 이쪽으로 향했다.
"Ah, another Mr. Holmes, how good to see you."
거의 군청색에 가깝게 가라앉아있던 눈동자에 새파란 빛이 돌아왔다. 반가움은 명백했다. 존 왓슨은 셜록을 보자마자 몸을 돌려 바로 앉더니 정중하게 그를 맞이했다. 셜록의 입가를 장식하려했던 은근한 미소는 순식간에 증발했다. 존 왓슨의 왼쪽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멍의 색깔로 보아 예전 부상의 흔적일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이 기관에 42일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결론은 한가지 뿐이었다.
"...요원들 중 누가 당신을 폭행했습니까?"
존은 이상한 콧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이름을 기억할 가치도 없는 얼간이 같은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있었다고요?"
"그가 날 먼저 때렸고 난 그를 더 세게 때렸습니다. 아마 한동안은 여기서 볼 일 없을 겁니다."
5대 1로 싸우면서도 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다른 한 사람은 코마 상태로 몰아넣고 또 한 사람에게서는 영구적으로 생식능력을 박탈해버린 남자의 말이었다. 셜록은 존 왓슨의 말을 100% 믿었다. 다만 그 신뢰와는 별개로 나중에 그의 형과 매듭지어야 할 일이 생겨버린 것 뿐이다. 셜록은 이상하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를 애써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았다.
"What happened?"
셜록의 눈썹이 괴이쩍은 아치를 그렸다.
"그건 내가 당신에게 해야 할 말 같은 데요."
"전혀 아니네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난 겁니까?“
셜록은 전혀 그답지 않은 일을 했다. 그는 침묵을 지켰다.
“내가 이 시설에 온 지 한달하고도 2주 정도 지난 것 같은데...”
“43일째입니다, 정확히.”
“예, 바로 그겁니다. 당신은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이죠. 내가 여기에 온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면서도 한달 넘게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당신 형도 마찬가지였고 덕분에 그동안 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리멸렬함을 다 맛봐야했고 말이죠. 허나 전 한번 한 약속은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닥 믿기 어렵겠지만. 그래서 척추가 꼬일 것 같은 지겨움과 진부함과 무례함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협조중이었죠. 그런데 여기 이렇게 당신이 나타났네요. 만약 여기 있는 사람이 당신 형이었다면 난 기관이 내 협조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란 말이죠.”
“당신이 생각하는 나는 여전히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히든 카드로군요.”
“그건 알아서 생각하시고,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뭐가 변했습니까? 확신하건데 내가 부러뜨린 브라운 요원의 아래턱과는 아무 상관 없을 것 같군요.”
“이름을 기억할 가치도 없다더니?”
“그의 성만 압니다. 이름은 여전히 몰라요.”
셜록은 또 다시 별로 그답지 않은 일을 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What happened?”
자신이 한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받으면서도 방에 들어온 셜록 홈즈를 본 순간부터 존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새파랗고 경쾌한 빛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존은 셜록 홈즈나 그의 형, 혹은 기관과는 다르게 진실이나 사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 남은 것은 길고 긴 에필로그 뿐이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자신이 참으로 굶주려있었던 것, 대화의 즐거움 외의 다른 것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음, 브라운 요원이 저와 제임스의 관계에 대해서, 에, 매우 저열하고 무례하며 상당히 호모포빅한 코멘트를 몇 개 날렸더랬죠. 그 대신 그의 턱이 날아가게 된 거고요.”
그렇게 고급개그는 아니었지만 존은 나름 자신의 농담에 자신이 있었다. 그랬기에 셜록 홈즈가 그 말에 전혀 웃지 않자 (오히려 얼굴을 굳힌 것처럼 보였다) 존은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자신의 기술에 약간 자신감을 잃었다. 실패한 농담을 수습하는 첫 번째 단계는 헛기침, 두 번째 단계는 상대방의 근황을 묻는 것이다. 존은 정석대로 했다. 셜록은 잠깐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자신의 발언에 무게를 두기 위한 일종의 테크닉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존은 셜록이 하려고 하는 말에 온 주의를 집중했다.
“마이크로프트는 당신이 신문(interrogation)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기관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고 있습니다. 진심이예요.”
“하지만 기관에 온 후로 지금까지 당신은 나와 처음 만났던 날 내게 주었던 것과 유사한 정도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닥터.”
존 왓슨은 약간 민망해하는 것 같았다. 셜록은 그 감정이 무엇으로부터 유발되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뭐, 솔직히 기관 소속의 질문자들이 당신만큼 흥미롭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요.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났던 날, 우리가 한 건 ‘대화’였지만 –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어요 - 여기서는 나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고요. 알아요, 내가 웃기지도 않게 센티멘탈하게 굴고 있다는 거. 하지만 좋고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거죠. 난 여기 있는 게 싫어요. 그건 사실이예요. 내가 까다롭게 굴고 있냐고요? 가끔은요. 하지만 결코 의도적인 건 아닙니다. 나는 정말로 내가 기억해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놓았어요.”
셜록은 자신이 42일 동안 존 왓슨을 만나려는 어떠한 자발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던 이유를 분명하게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것이 약간이라도 단서가 될 수 있을까? 존 왓슨을 만날 때마다 셜록 홈즈는 별로 그답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다.